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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 [240] 에피소드 11(1) : 터키에서 만난 터키 사람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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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05 01:17 조회 99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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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에서 만난 터키 사람들(1)



터키에서 우리가 만난 터키인들은 대부분 별난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별종들. 크게 피해를 보지 않으면 그냥 ‘재미있는 사람들’이라고 치부할 수 있으나, 언제든 큰 손해를 입힐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존재들이었다. 접촉하면서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일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12월 20일, 파묵칼레에서 경험한 일이다. 유럽에 오기 전 ‘알가우 호텔Hotel Allgau’ 추천의 글을 인터넷에서 읽은 우리는 망설임 없이 그 호텔을 찾았다. 손바닥만한 파묵칼레를 몇 바퀴나 돈 끝에 변두리에 숨듯이 서 있는 호텔을 발견한 것이었다.

 반색하는 주인의 표정과 깔끔한 건물, 한적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방 하나를 쓰기로 했다. 문제는 밤에 일어났다.

 갑자기 건물 전체가 들썩들썩했다. 여러 날 묵고 있는 투숙객들이 밖에서 돌아온 것이었다. 쾅쾅 방문을 여닫는 소리, 꽥꽥거리며 사람을 부르는 소리, 신발을 찍찍 끌고 복도를 오가는 소리, 안 열어주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 계산을 두고 서로 싸우는 소리 등등. 어느 호텔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아수라장’이었다. 유럽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소동이었다. 이런 소동을 통해 터키가 과연 아시아 국가란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이스탄불에서 온 ‘떠돌이 장사꾼들’이었다. 불경기를 맞은 이스탄불을 떠나 각지의 바자르를 돌아다니며 주방용품을 파는 상인들이었다. 장사를 끝내고 돌아와 기분을 푸는지, 결산을 하는지 시장판보다 더 시끄러웠다.

 열두시가 다 되는 시각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흡사 콘도미니엄이 유행하던 때의 우리나라 같았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몰려다니며 술타령, 노래타령을 벌이던 우리나라 초창기의 콘도 문화가 떠올랐다.

 잠자리에 들었던 아내, 참다못해 문을 열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자 좀 조용해지는 듯 했으나, 우린 잠을 설치고 말았다. 아침이 되면 주인에게 대책을 요구하거나, 호텔을 옮기기로 했다.  

 이튿날, 호텔의 식당으로 아침을 먹으러 가니, 안주인이 자신들의 거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늘 히잡을 쓰고 다니는 호텔 안주인. 영어가 유창했다. 우리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는 속사포처럼 말을 쏘아댔다. 참으로 사근사근 친절하기도 했다.

 우리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한국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정색을 하며 ‘들어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안다’고 했다. 다시 묻기도 전에 그녀는 자기 시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했다. 지금 98세로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데, 치매에 걸려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속으로 감격했다. 생각 같아선 그 노인을 찾아 병문안이라도 하고 싶었다. 언뜻 ‘지금 98세면 그 노인은 대체 몇 살에 한국전에 참전했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 한국전 참전용사의 며느리가 친절하게도 직접 아침을 챙겨주며 주변 지역 관광안내까지 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녀는 우리에게 아프로도시아스Aphrodosias라는 곳을 알려 주었다. 에페수스보다 훨씬 크고 환상적인 곳이라면서. 가고 오는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감격했다. 한국전 참전용사의 아들과 며느리가 운영하는 호텔. 좀 시끄러우면 어떠랴! 참고 말지. 결국 우리는 호텔을 옮기겠다는 말을 못하고 그냥 아프로디시아스로 떠났다. 그러나 그녀가 말한 것보다 두 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늦게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끼리 붙어서 새벽 3시가 되도록 싸움까지 해대는 바람에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호텔을 떠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한국전 참전용사의 아들, 며느리가 운영하는 호텔이니까.

 아침이었다. 안주인은 어디 나갔는지, 남편이 식사를 차려 주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야기가 오고 갔다. 나는 ‘한국전에 참전하신 당신의 아버지께서 지금 치매로 앓고 계시다는데 어떠시냐?’고 예의를 갖추어 물었다.

 그러자 그는 ‘뻥’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당황하는 빛이 그의 표정에 역력했다. 그러나 그도 미련하지는 않았다. 얼른 사태를 수습하고 나섰다. ‘아, 할아버지요? 지금 많이 아프세요. 한국전 뭐라고 들었는데, 나는 잘 몰라요. 아마 잠시 봉사하셨을 거예요’라고 간신히 대답했다.

 자꾸만 화제를 바꾸려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리도 다른 이야기를 이어댔다. 잠시 후 그의 아내가 들어왔다. 자신의 남편과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긴장하는 빛이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리곤 전과 달리 한 마디도 말을 건네지 않고, 거실 한 쪽에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면서 나는 ‘이 호텔과 당신의 가족들을 한국에 소개하여 한국인들이 이 호텔을 많이 이용하도록 하겠다. 그 일이야말로 한국전 참전용사의 후예인 당신들에 대한 나의 의무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남편이 당황하며 ‘우리 가족에 관한 것은 빼고 이 호텔만 소개해 달라’고 애원하듯 말하는 게 아닌가. 그 때 언뜻 깨달음이 왔다. 아, 터키 사람들에게 또 속았구나!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깔깔대고 웃었다. 호텔 안주인의 감쪽같은 트릭에 완벽하게 넘어간 우리. 도대체 그녀는 우리에게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걸까. 투숙하던 장사꾼들의 소동에 우리가 호텔을 옮기겠다고 나설까봐 작전을 쓴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우리에게 좋은 정보를 준다면서 그 먼 곳까지 가게 했다. 가보니 그런대로 좋은 곳이긴 했으나, 그것 역시 트릭의 하나였다. 늦게 돌아온다면 어쩔 수 없이 하룻밤을 더 묵어야 할 게 아닌가.

 그녀는 98살 먹은 노인이 남편의 아버지인지 할아버지인지도 몰랐다. 98살 먹은 노인이 한국전에 참전했다면, 50대에 병정으로 한국에 나왔단 말인가. 참으로 가증스런 거짓말이었다. 

 한국인들을 만나면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거짓말을 많이 한다는 터키 사람들. 언젠가 읽은 내용이 ‘버스 지나고 난 뒤’에야 생각이 났다. 참으로 ‘못 된’ 여자였다. 문제투성이의 장기 투숙객들이 있을 경우 미리 양해를 구했거나, 아침에라도 사과를 했어야 정상이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틀 동안 일언반구도 말이 없었다. 더구나 말만 번드르르했지 정작 서비스는 엉망이었다. 침구도 엉망이고, 방엔 옷장은커녕 옷걸이도 없었다. 옷걸이라도 마련해 달라고 했으나, 지금 비수기라서 여유가 없다고 대답하는 그녀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국전 참전용사의 후예’라는 말에 스르르 녹아 불편을 감수하고 지낸 것이었다. 

<계속>

  

**사진 위는 알가우 호텔, 아래는 그 호텔의 안주인


200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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