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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 [262] 여행단상 20 : 장사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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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05 13:33 조회 1,03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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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사의 꿈



 어릴 적, 나는 유난히 힘에 관심이 많았다. 그 시절 우리 동네엔 황소 같은 총각들이 많았다. 만나면 팔씨름을 하며 힘자랑들을 했다. 봄·여름·가을·겨울, 농사일을 해나가는 도중 그들 사이에는 힘의 서열도 대충 정해지기 마련이었다.

 힘 센 총각은 어디서나 당당했다. 사람들도 그를 좋아했다. 힘 쓸 일이 많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쓰임새가 많은 사람은 사는 보람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시절엔 왕왕 힘자랑들을 하고 다녔는지도 모른다. 


 어려서 나는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으나 겨울철 감기 몸살 등은 달고 다니다시피 했다. 내가 선망한 대상은 둘이었다. 하나는 우리 집의 암소, 또 하나는 동네의 이씨 아저씨였다. 기운이 세고 순했던 그 암소. 내 어린 시절 그 소는 우리 집의 논과 밭을 모두 갈고도 힘이 남았다. 그 소가 쟁기를 끄는 모습이 참으로 부럽고도 신기했다. 콧김을 기차 화통의 수증기처럼 뿜어내면서 이른 봄날 아침 자갈밭을 잘도 갈았다. 나도 그 소처럼 힘이 세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네의 이씨 아저씨. 당시 우리 마을엔 탈곡기가 한 대밖에 없었다. 그런데 작업마당마다 원동기를 옮기는 일이 큰 문제였다. 수십 마력짜리 원동기는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대개 피대를 거는 바퀴와 몸체를 분리하여 지고 다녔다. 그것들은 아무나 질 수 없었다. 워낙 무겁기 때문이었다.

 김씨 아저씨와 이씨 아저씨가 원동기 옮기는 일을 도맡아 했다. 그들은 힘이 좋았다. 그 가운데 이씨 아저씨가 훨씬 힘이 좋았다. 어느 날이었다. 파장의 타작마당에서 힘자랑이 벌어졌다. ‘누가 원동기를 통째로 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힘을 써보았으나, 김씨 아저씨는 일어서질 못했다. 다음 차례는 이씨 아저씨. 잠시 눈을 감은 채 기를 모으더니 ‘이여차!’ 소리를 내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쏟아지는 찬탄의 박수. 그는 으쓱했다. 나도 놀라고 말았다. 그 때부터 ‘장사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어린 시절엔 늘 볏가마니를 트럭이 닿는 고갯마루까지 져 올리는 게 큰일이었다. 10대 초반엔 먹는 게 모두 힘으로 간다든가. 잔병치레하던 내가 볏가마니를 져 나를 수 있을 만큼 세월은 흐른 것이다.

 열 몇 살 때의 어느 날인가. 힘자랑을 할 기회가 생겼다. 벼 두 가마니를 한 지게에 올렸다. 아침밥도 많이 먹은 터라 ‘끙’하고 힘을 주니 정말로 일어나지는 것이었다. 그 뒤로부터 나는 ‘장사의 꿈’을 일단 실현한 것으로 착각하고 지금껏 지냈다. 아무도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지만.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힘은 더 이상 생기지도 않았고, 쓴다고 써지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쓸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


 별 건 아니지만, 해외여행 넉 달이 지났다. 거의 매일 먼 거리를 운전해야 하고 먼 거리를 걸어야 한다. 장사의 꿈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아직도 힘에는 자신 있다고 자부해온 터라, ‘까짓것 유럽 천지를 운전해 다니면서 조금씩 걷는 일이 무슨 대수겠는가’라고 큰 소리를 치곤했다.

 그러나 해외여행 4개월이 지나면서 이젠 걷는 일이 제법 힘들어졌다. 많이 걷고 나면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다. 가끔씩 머리도 아프다. 하루 종일 걸으면서 보고 들은 걸 정리하려니 안 아픈 게 오히려 이상한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 해 전인가. 테니스를 하면서 ‘엘보 병’에 걸려 한동안 라켓을 놓은 적도 있다. 무리하게 힘자랑을 한 결과였다. 건강에 대한 과신은 금물. 더욱이 힘자랑은 해서는 안 될 일. 신이 인간에게 무제한의 힘을 주신 건 아니다. 그러니 적당히 아껴 쓰는 게 도리다. 샘물은 퍼내야 솟는다지만, 그것도 때가 있는 법. 인간의 힘도 써야 생긴다지만, 샘물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고갈되거나 관리가 부실하면 금방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힘은 쓸 때 써야하고, 쓸 데 써야한다. ‘장사’는 꿈일 뿐, 실제로는 없다. 이제 적당히 힘 관리를 할 때가 된 듯 하다. 아킬레우스를 만난 그리이스. 이탈리아로 건너가기 위해 배를 타러가는 이 아침의 짧은 생각이다. 

 2005. 12. 31. 

  

**사진 위는 바다의 괴물과 씨름하는 헤라클레스(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아래는 암소를 잡아먹는 암사자


2005-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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