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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 [273] 이탈리아 제1신(3) : 삶은 축복인가 고통인가-폼페이의 비극을 보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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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05 13:55 조회 92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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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제1신(3) : 삶은 축복인가 고통인가-폼페이의 

                           비극을 보며(3)




 폼페이! <폼페이 최후의 날>이란 소설과 영화로 이미 우리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준 도시. 그러나 현장에서 보는 폼페이는 허구화된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정겹고도 슬픈 현실의 공간이었다.

 정겨움과 슬픔. 일견 모순적인 두 감정의 근원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의 모습들과 큰 차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 전자이고,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그 속에 생명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 후자이리라. 그 날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던 베수비우스 산정엔 하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용하게, 흡사 경고라도 하려는 듯 침묵 속에 무언가를 피워 올리는 그 자태가 음산했다. 

 지금으로부터 1926년 전인 A.D. 79년 8월 24일 이른 오후. 한창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던  시각. 대부분의 폼페이 사람들이 늘 그래왔듯 일상에 분주하던 바로 그 때, 엄청난 포효와 함께 베수비우스산은 폭발했다. 검은 화산재는 용암과 함께 분화구를 솟구쳐 나와 도시를 덮쳤고. 단숨에 모든 것을 가두어 버린 죽음과 파괴의 견고한 울타리로 변했다. 영광과 긍지의 폼페이는 일순 지표에서 6-7m 아래로 매장되고 말았다. 

 기원전 8세기 경, 티레니안 해변을 따라가며 정착하기 시작한 일단의 오스칸(Oscan) 사람들. 과거 언젠가 베수비우스산의 융기로 만들어진 높은 지역에 마을의 중심을 만들었다. 그것이 폼페이의 두드러진 전략적 위치였다. 그 때문에 속속 이 지역의 주역들은 바뀌게 된다. 에트루스족(Etruscans), 그리이스족(Greeks), 샘족(Samnites) 등. 결국 폼페이는 로마의 지배에 들어가고, 기원전 80년엔 로마의 식민지가 된다. ‘콜로니아 베네리아 코르넬리아 폼페이(Colonia Veneria Cornelia Pompeii)'란 이름도 갖게 되었고. 

 화산재에 덮인 지 1천 7백년 후 사르노(Sarno) 계곡에서 터널을 건설하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가 명문(銘文) 석판을 우연히 발견함으로써 파묻힌 도시를 발견하게 된다.

 1748년 실질적인 첫 탐사가 챨스 부르봉(Charles Bourbon)의 지휘로 이루어졌고, 그로부터 1세기 가량 뒤인 1860년 쥬제뻬 피오렐리(Giuseppe Fiorelli)에 의해 ‘신화 속의 폼페이’는 기적적으로 우리들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80% 정도만 빛을 보았고, 나머지 20%는 아직도 암흑 속에 갇혀 있다.

 3km의 긴 성벽에 여덟 개의 문을 가진 폼페이. 서쪽에는 신전들과 공공건물들이 있는 포럼(Forum)이, 앞쪽에는 대극장과 일반 주택들이, 성문 밖에는 네크로폴리스(Necropolis)가 각각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 바다로부터 500m 정도 떨어져 있던 폼페이. 그러나 화산 폭발 후 항만이 메워져 그 거리는 2km로 늘어났다. 물론 항만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도 알 수 없지만. 

<계속>


**사진 위는 폐허로 변한 폼페이 극장, 아래는 미이라 상태로 변한 일가족의 처참한 모습


200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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