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이탈리아 제5신(2) : 프란치스꼬Francis 성인과 함께 살아있는 산정(山頂)의 낙원-돌의 도시 아씨시Assisi(2) >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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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 [300] 이탈리아 제5신(2) : 프란치스꼬Francis 성인과 함께 살아있는 산정(山頂)의 낙원-돌의 도시 아씨시As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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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05 14:54 조회 96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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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제5신(2) : 프란치스꼬Francis 성인과 함께 살

                           아있는 산정(山頂)의 낙원-돌의 도

                           시 아씨시Assisi(2)



 수바시오Subasio 산 지맥(支脈)의 서쪽 중턱에 위치한 도시, 아씨시. 그 정상인 해발 505m 지점엔 이 도시를 지키는 성채 로카 마기오레(Rocca Maggiore)가 있다. 수바시오(해발 1290m), 치베텔레(1261m), 세르몰라(1192m), 콜레 산 루피노(1192m), 피에트로 룬고(914m) 등이 수바시오 그룹에 속한 산들이었다.

 아씨시와 스펠로(Spello) 사이의 남서쪽 면엔 광대한 올리브 밭이 형성되어 있다. 아펜니노(Appenine) 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건조하고 추운 날씨라고 한다. 이 지역의 대리석은 엄청난 양으로 아씨시의 건물들은 대부분 이 돌을 주된 재료로 쓰였다.  

 이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900-1800년인 청동기 시대부터였다. 로마 시대 이전이나 로마 시대의 ‘아씨시’란 이름은 역사 문서보다는 비문이나 고고학적 자료에서 쓰였는데, 그 첫 사례가 바로 프로퍼티우스(Propertius)의 라틴 애가(哀歌)였다.

 아씨시의 주민들은 움브리아 구성원들이었다. 도시 이름은 톨레미(Ptolemy)와 프로코피우스(Procopius)의 그리이스어 문서에서 발견된다는 플리니(Pliny)의 견해를 참고한다면, 이 도시의 역사는 매우 오랜 셈이다. 그러다가 아씨시는 기원전 89년에 로마제국의 일원이 되었다.  

 아씨시는 3세기에 다신교에서 기독교로 전환되었고, 첫 주교였던 루피노 성인(San Rufino)의 순교가 그 계기였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씨시가 겪은 우여곡절들을 모두 언급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프란치스꼬 성인과의 관계다.

 몬나 피카(Monna Pica)와 피에트로 디 베르나도네(Pietro di Bernadone) 사이에서 12세기 말경 태어난 페이프란치스꼬 성인. 정확한 탄생 날짜는 모르나 그의 몰년으로부터 역산하면 대충 1181년과 1182년 사이가 된다고 한다.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서 예절 바르고 관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으나, 기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1202년 실제로 콜레스트라다(Collestrada)의 전투에 참가했다가 잡혀서 갇히기도 했다.

 석방된 뒤엔 아씨시로 돌아왔고. 쉴 틈도 없이 잠시 후 다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아풀리아(Apulia)로 갔다. 여행 중 병에 걸렸던 그는 오랜 동안의 묵상을 통해 ‘기적적 통찰’을 얻은 후 아씨시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청산하고 자선(慈善)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로마 순례 도중 가난한 여인을 만나 자신의 화려한 옷을 거지의 누더기로 바꾸어 입고, 나머지 가진 것들 모두를 주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다미안(Damiano) 성인의 계시를 들었다. 기적적인 일이었다. 즉 “가라, 그리고 내 집을 고쳐라”는 계시였다. 프란치스꼬는 다미안 성인이 가난 속에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길 원한다고 확신했다.

 좋은 옷을 버린 프란치스꼬는 은자의 도포와 부츠에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성가를 듣던 중 그는 완벽하게 살려면 절대 가난과 순결 속에 살 뿐 아니라 신의 말씀을 설교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청빈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1209년과 1210년 사이에 프란치스꼬는 동료들과 함께 로마 교황에게 찾아가 그들의 종교적인 삶의 방식을 확인받고자 했다. 당시 교황 이노센트(Innocent) 3세로부터 승인을 받고 처음엔 리보토르토(Rivotorto)로, 다음엔 산타 마리아 데글리 안젤리(Santa Maria degli Angeli)로 돌아가 자신들의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211년-1212년 사이엔 성녀 클라라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란치스꼬의 뒤를 따라 집을 떠나기도 했다. 클라라와 초기 추종자들은 성 다미안 교회에 그들의 거처를 마련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청빈의 삶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공동체가 이룩된 것이다.

 1226년 그가 죽자 그의 추종자들과 아씨시 시민들은 성 기오르기오 교회(지금 산타 클라라 교회의 사크라멘트 채플)의 묘지까지 행렬을 이루어 그의 시신을 운구했다. 

 아씨시는 좁았다. 그러나 정신만은 아주 넓고 깊었다. 프란치스꼬 성인의 삶과 정신이 꽃 피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메인 광장인 피아자 꼬무네(Pizza del Comune)를 가로지르는 거리의 양 끝에는 성 프란치스꼬 대성당과 성 클라라 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클라라 성당 위쪽에는 주교좌 성당인 성 루피노 성당이, 꼬무네 광장 바로 아래쪽엔 치에사 누오바(Chiesa Nuova)가, 누오바 교회 바로 아래엔 성 안토니오 성당이, 광장엔 성 도나토 성당이, 프란치스꼬 대성당 아래쪽엔 성 베드로 성당이 각각 서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당들에서 프란치스꼬 성인의 삶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그의 삶은 하나님 말씀의 진리성을 증거하고 있었다.

<계속>   


**사진 위는 미네르바 신전 터의 성 도나토 성당 안에 있는 프란치스꼬 성인, 아래는 성 클라라 교회 안에 안치되어 있는 클라라 성인의 시신


2006-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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