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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 [re] 역주 조천일록 (학고방, 2020) 서평, 사행록 자료의 확장과 연구의 심화 (김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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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5-14 13:11 조회2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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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록 자료의 확장과 연구의 심화

 김일환*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조규익·성영애·윤세형·정영문·양훈식·김지현·김성훈 공역, 역주 조천일록(학고방, 2020)
조규익·성영애·윤세형·정영문·양훈식·김지현·김성훈 공저, 최현의 조천일록 세밀히 읽기(학고방, 2020)

 1. 사행록 연구의 중요 거점, 숭실대

 한국 사행록 연구의 중요한 거점인 숭실대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에서 주목할만한 대명 사행록 자료와 연구서를 출간했다.
1608년 동지사행의 서장관인 최현이 남긴 사행기록을 번역한 역주 조천일록과 좌장인 조규익 교수를 필두로 6명의 중견 연구자가 이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최현의 조천일록 세밀히 읽기가 그것이다.
조규익 교수는 시조와 악장에 정통한 고전시가 연구자인 동시에 한국 연행록 연구에 있어 주목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작년에 돌아가신 고 소재영 교수와 함께 숭실대 박물관 소장본을 대본으로 장서각본을 교감하고, 이해를 돕기 위한 한자를 병기하고 띄어쓰기를 하여 출간한 주해 을병연행록0(태학사, 1997)은 연구자들은 물론
대중 독자들에게까지 ‘홍대용(洪大容)’이라는 18세기 조선의 지식인과 ‘연행(燕行)’이라는 제도/문화를 알리는 단초 역할을 했다.
이를 필두로 현대어 발췌본 김태준·박성순의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돌베개 참 우리 고전4, 2001), 정훈식의 현대어 완역본 을병연행록(경진, 2012)이 차례로 나오면서,
우리말로 씌여진 을병연행록은 ‘고등학생 이상’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고전문학의 중요한 텍스트가 되었다.
20여년 동안 연행노정을 답사하면서 사진전도 열고 다큐멘터리도 만든 바 있는 신춘호 PD도 그렇고, KDI 등 경제 분야에서 활동했던 ‘비연구자’로서 압록강에서 열하까지 완주한 최초의 답사기를 낸
이보근 선생도 자신을 연행 노정으로 이끈 책이 주해 을병연행록이었다고 강조했다.

이후 조규익 교수는 이덕형(1566~1645)의 죽천행록(박이정, 2001), 서유문(1702~?)의 무오연행록(박이정, 2002)을 신뢰할 수 있는 연구 텍스트로 제공했고, 죽천행록-을병연행록-무오연행록-병인연행가로
이어지는 국문사행록의 전변 과정과 개별 작품의 특성과 가치를 소상하게 밝혀 주었다(국문사행록의 미학, 역락. 2004).
또한 한국전통문예연구소(현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를 통해 100여명의 연구자들이 쓴 총 133편의 연행록 논문을 문학(5권), 역사, 정치·경제·외교, 사상·의식, 복식·건축·회화·지리(2권) 등으로 나누어
모두 10권으로 된 연행록연구총서를 간행하였다. 이로써 연구자들이 개별 연행록(대중 사행록)은 물론 ‘연행록’이라는 동아시아의 중요한 문헌군을 정리하고 연구하는 길잡이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는 <동동(動動)>, <봉래의(鳳來儀)> 등 문헌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궁중 정재(呈才)를 복원하여 전통문화를 현재화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한편, 17세기 전반기에 작성된 사행록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명청교체기에 이르는 이 시기는 사행 노정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대내외 정치 상황도 복잡했고, 인조반정이라는 주류 세력의 재편에서 기인한 극단적 역사 평가 상황까지
고려해야 한다. 또한 사행을 다녀온 당사자가 아니라 그 후대인/후손에 의해 간행되는 경우도 있어 가필(加筆)과 산삭(刪削)의 가능성까지 따져야 하는 난점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초 사행록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숭실대 연행록 연구자들의 뚝심의 산물이 조천일록이라 하겠다.


2. 대중 사행록의 중요 텍스트, 조천일록

인재(訒齋) 최현(崔睍, 1563~1640)은 명종 18년에 태어나 선조-광해군을 거쳐 인조 18년까지 살았다.
젊은 날의 그는 고응척(高應陟, 1531~1605), 김성일(金誠一, 1538~1593), 권문해(權文海, 1534~1591) 등에게 수학하면서 목릉성세(穆陵盛世)의 학술과 문화를 경험했다.
이후 정구(鄭逑, 1543~1620)에게 예학과 천문, 지리, 병법, 산수 등 다양한 학문을 배웠다. 그의 스승들이 모두 이황(李滉, 1501~1570)의 제자이므로, 최현 또한 퇴계학의 계승자라 하겠다.
그러나 30대 이후 그의 삶은 두 차례의 왜란, 광해군의 승계를 둘러싼 갈등, 인조반정이라는 권력의 격변을 겪었고, 만년에는 두 차례의 호란 끝에 조국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사건까지 겪어야 했다.
왜란 중에 영남 지역에서 의병에 참여했던 최현은 1606년 4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면서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출사 2년 뒤인 광해군 원년, 사간원 정언을 거쳐 동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남긴 기록이 조천일록이다. 정사는 신설(申渫 , 1560~1631), 부사는 윤양(尹陽, 1564~1638) 그는 사행 후에 ‘昕’으로 개명했다.
이었는데, 이들은 1608년 8월 3일에 한양을 떠나 1609년 3월 22일 복명했다. 조천일록과 달리 광해군일기에는 7월 29일 사행을 떠난 신설이 장계를 보냈다고 되어 있다.

이 사행은 정례사행인 동지사였으나, 조천일록에는 민감한 외교적 현안으로 가득하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는 갈등 관계에 있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왕세자가 되었고, 분조(分朝)를 이끌면서 전란을 극복하고 민심을 수습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워다.
하지만 명 조정은 임진왜란 시기는 물론 종전 이후에도 광해군의 왕세자 승인 요청을 줄기차게 거절했다. 적자(嫡子)가 아닌 첩빈(妾嬪)의 소생이자 둘째아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592년부터 1604년까지 13년 동안 다섯 차례 주청사가 파견되었지만 모두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아직 황태자를 정하지 못한 명나라 내부 사정 때문이었지만,
1602년 선조의 재혼, 그리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나면서 사정은 더욱 복잡해졌다. 집권 소북파가 광해군을 견제하기 위해 명에 책봉 승인을 주청하는 것조차 기피하면서, 광해군의 정치적 위기는 지속되었다.
결국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논란이 일단락될 것처럼 보였지만, 명 조정이 이번에도 광해군의 왕위를 승인하지 않았다.
1608년 9월 20일 요양의 회원관(懷遠館)에 머물러 있던 최현 일행은 북경에서 돌아오는 고부사(告訃使) 이호민(李好敏, 1553~1634)과 부사 오억령(吳億齡, 1552~1618), 서장관 이호의(李好義, 1560~1624)와 조우한다.
이호민 사행의 정식 명칭은 고부 청시 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로 앞서 2월 21일에 북경으로 출발했다. 이들은 출발한 지 거의 8개월이 지난 10월 17일에 복명했다.
선조의 부고를 전하면서 시호를 청하고, 광해군의 승습을 허락받는 목적을 가지고 출발했으나, 명 조정은 도리어 형 임해군이 왕위를 사양한다는 증거를 제출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호민을 북경에 머물게 하고는, 요동도사 엄일괴(嚴一魁)와 자재주지부(自在州知府) 만애민(萬愛民)을 조선에 파견하여 사문(査問)하게 하였다. 강화도 교동(校洞)에 있는 임해군을 한사코 만나겠다는 두 사람에게
조선 조정이 막대한 은자를 뇌물로 바치면서 이 조사는 적당히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호민 사행은 명 조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임해군에게 폐질이 있다면 그가 임금의 자리를 양위한다’는 수본(手本)을 가지고 오라는 말을 들었고, 결국 유례없는 조사관 파견까지 이루어지면서,
귀국 전부터 처벌을 요구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이호민 일행과 최현 일행이 요동 숙소 한켠[西上房]에서 밤새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런 맥락이 있어서였다. 조천일록 1608년 9월 21일(을사).

한편 두 명나라 관리가 조사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당일인 6월 20일, 광해군은 정사 이덕형(李德馨, 151~1613), 부사 황신(黃愼, 1560~1617), 서장관 강홍립(姜弘立, 1560~1627)으로 구성된 주청사(奏請使)를
거듭 파견했다. 최현 일행은 11월 1일 북경의 옥하관에서 책봉과 조사(詔使) 파견을 요청하는 정문(呈文)을 다섯 차례나 올린 상황에서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한 이덕형 일행을 만난다.
다행히 이튿날인 책봉 성지가 내려오면서 진주사행은 귀국길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주청사행이 출발할 때 미처 수령하지 못한 함경도 제공 노비(路費)를 최현 일행이 가져오게 되었는데,
동지사행의 정사 신설은 아직 노비를 실은 수레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노비를 주청사행에게 넘겨주기를 미적거린다. 11월 5일 주청사행이 귀국길에 오를 때까지 두 사행은 노비를 누가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결국 주청사행이 가져가는 것으로 정리가 되는데, 이와 같은 신경전이 벌어지는 것은 명나라와 교섭하는 과정 곳곳마다 존재하는 인정[뇌물] 때문이다.
고위관료와 환관들은 물론 각 부서의 실무자, 옥하관의 관리인, 하인 무리들까지 뇌물을 요구하는 쇠퇴기 명나라 구성원들의 탐풍(貪風)과 각종 불합리한 요구에 시달리면서도 거기에 응할 수밖에 없던 제후국 조선의 비애를
조천일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천일록 1608년 11월 4일; 광해군일기 1년 3월 28일(기유).

최현 일행은 귀국 후 파직을 당하게 된다. 그들이 받아온 예부의 자문에 ‘조선국권서국사일원(朝鮮國權署國事一員)’이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아직 책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책봉례(冊封禮)를 주관하는 태감 유용(劉用)은 그해 6월에 입국했다.
‘왕’이 아닌 ‘권서국사’라는 칭호는 불가피했지만, 그 뒤에 붙은 ‘일원(一員)’이란 용어 때문이었다. 조천일록 1609년 4월 6일.
귀국 후 이게 문제가 되자 최현은 그 문서가 견고하게 봉함되어 있었고, 봉투 겉면에 ‘朝鮮國權署國事開坼’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구절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변명하였다. 조천일록 1609년 4월 18일.
또한 조천일록에는 황제의 칙서를 미리 입수한 사행단이 일부 문구를 고쳐달라고 요청할 것인가를 두고 격렬하게 대립하는 장면도 보인다. 조천일록 1608년 13월 23일.
최현이 ‘국가의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 아닌데 어떻게 황제에게 수정 요구를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자, 상사 신설은 귀국해서 일이 생긴다면 본인이 감당할 것이라며 수정해야할 것을 주장하지만
부사까지 최현의 견해에 동조하면서 앙앙불락하고 있다. 이처럼 조천일록은 조선 조정과 명 조정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교의 최일선에 있던 사신들의 활동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당시 명나라는 조선에 두 차례나 대규모 원병을 보내면서 1천만 냥이 넘는 군비를 지출했고, 이는 국가재정을 궁핍으로 몰아갔다. 또한 요동의 주둔군을 조선에 파견하는 바람에 이 방면의 방위체제가 약화되면서,
누루하치의 여진 세력이 비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고 말았다. 조천일록의 곳곳에 누루하치의 건주위 여진 세력은 물론 재새(宰賽, Jayisai) 등의 몽골 세력들이 출몰하고 있고,
이들을 견제하는 주요 거점인 해주위(海州衛), 노하(路河)의 제방, 광녕(廣寧)의 주요 방어 시설과 주둔군을 자세히 관찰한 묘사와 설명이 산포되어 있다.
광해군이 즉위한 직후, 광녕총독이었던 이성량은 아직 광해군을 책봉하지 않았고, 형제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이 있다며, 조선을 정벌한 뒤 군현을 설치하자는 비밀 상주를 올린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에 행성(行省)을 설치하고 순무(巡撫)를 파견하여 중국식으로 통치하자는 논의가 있었기에, 조선 조정의 위기 의식이 고조되었다.
특히 이성량이 휘하의 참장 공념수(龔念遂)와 유격 최길(崔吉)을 보내 선조의 상에 조문한 것을 두고, 조선의 정치 상황과 군사 이동 경로를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조천일록 1608년 8월 9일. 정영문, 「조천일록과 현실인식」, 최현의 조천일록 세밀히 읽기, 학고방, 2020, 82쪽.
따라서 최현 일행이 광녕에 머물면서 체직되어 자신의 집에 은거하고 있던 이성량에게 역관을 보내 황화집(皇華集)을 전달하게 한 것은 심상한 문화 교류가 아니라 ‘감시’에 대한 ‘감시’였다.
명 조정에 의해 건의가 묵살되고, 요동태감 고회의 일에 연루되어 파직당한 이성량은 ‘체직된 관리가 어찌 조선 국왕의 선물을 받겠냐’며 수령을 거부했다. 조천일록 1608년 10월 5일.
또한 조천일록에는 원군으로 왜란에 참전했던 명군 장수 양원(楊元) 조천일록 1608년 9월 22일.
과 동일원(董一元) 조천일록 1609년 2월 20일.
등의 요동에서의 활동도 확인 가능하다.


3. 엄정한 학술 번역과 종합적인 이해를 위한 길잡이

역주 조천일록은 전문연구자를 위한 학술번역이다. 특히 조천일록의 구조와 이중적 글쓰기 양상까지 그대로 전하고자 노력하였다.
명나라 영역으로 들어갔을 때의 일기는 대개 본문과 부기가 병행되어 있다. 조선의 영역에서 있던 일은 ‘서장관’의 보고 사항이 아니므로 압록강 도강 이전의 본문은 개인 일기였다.
임금에게 올린 공식적인 보고로 이루어진 본문보다는 저간의 사정과 사건의 전후맥락을 두루 살핀 부기가 분량도 많을 뿐만 아니라 연구 자료로서는 가치는 물론 독서물로서의 흥미와 정보가 훨씬 많다.
본문은 임금에게 보고하는 내용이므로 ‘합쇼체’, 부기는 개인 일기의 성격이 강하므로 ‘해라체’로 번역하였기 때문에 독자들은 최현의 체험과 고민이 어떤 맥락에서 공식 보고의 형태로 가공되었는가를 유추할 수 있다.
다만 정영문의 지적처럼 부기의 내용이 사행참여자[1차 기록자]와 후대의 기록자[2차 기록자]의 합작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정영문, 앞의 책, 82~83쪽.
조천일록은 이헌경(1719~1791)이 1785년(정조 9) 12월에 작성한 서문이 붙어 있는 인재선생속집에 수록되었는데, 문집 간행을 주도한 6세손 최광벽이 내용을 정리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행 시점에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던 이성량의 조선 병탄 시도의 전후맥락이 정확하게 정리되어 있는 점도 그 증좌가 될 수 있으나, 광해군의 즉위 시점에 작성된 글이 인조반정 이후의 정치적 맥락에서 읽어도
전혀 문제될 지점이 없는 점이 그 혐의를 더하게 한다.
물론 최현이 사행 이후 30년을 더 살았으므로, 즉 인조반정 이후 병자호란 이후까지 생존했으므로 본인 스스로 내용을 정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 부분은 후속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직역과 완역이라는 번역에서의 엄정함과 진지한 태도는 역주 조천일록의 편집에도 반영되었다. 편집에서는 본문 뒤에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며 [부기]를 적어 이를 구분하였다. 10월 15일자 일기의 본문은 간단하다.
전둔위를 출발하여, 중전소에서 점심을 먹고, 산해관의 나성[東邏城]에 도착한 뒤 여(余)씨 성을 가진 민가에서 숙박했다는 내용뿐이다. 하지만 부기는 굉장히 자세하다.
전둔위에 있는 양조와 그 일족의 묘지, 그리고 각각의 약력을 자세히 기록하여 ‘양씨세수(楊氏世帥)’라는 말의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 이후 강녀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하지만 단락 구분 없이 한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제목으로라도 연행노정의 주요 지점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었다면, 자료집으로서의 가치를 배가시킬 것으로 보인다.
10월 16일 최현 일행은 산해관에서 수레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귀로의 성절사(聖節使) 윤휘(尹暉, 1571~1644)와 서장관 이욱(李郁, 1588~1619), 천추사(千秋使) 김상준(金尙寯, 1561~1635)과 서장관 소광진(蘇光震, 1566~1611)과 만난다.
앞서 언급한 바와같이 최현 일행은 8개월 동안 한양-북경, 요양-북경을 오가는 각종 행렬과 조우함으로써 17세기 초 조명관계와 동북아시아의 변화무쌍한 대외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성절사와 천추사와 같은 비정기 사절에 대한 주석이 따로 없다.
또한 성절(황제의 생일)을 맞이하여 제후국인 조선만 하례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요동의 부총병 오희한과 방국개원위삼도사 고관도 표문을 올리기 위해[進表] 임소를 비운 상황이었다. 조천일기 1608년 9월 15일.
주석을 통해 일기의 전후 맥락을 잡아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이들 4명의 귀환 사절의 약력이 주석에 달렸는데, 그 설명이 균일하지 못하다.
김상준의 약력에만 1608년 사행에 대한 언급이 제대로 되어 있고, 윤휘와 이욱의 약력에는 누락되었고, 소광진의 경우에는 연도가 누락되어 있다. 한편 부기에서 최현은 이들 네 명을 다시 자(字)로 호명하고 있는데,
번역에서는 성절사와 그 서장관에 대해 다시 각주를 붙였다. 윤휘의 성절사행에 대해서는 이 두 번째 각주에서 다시 설명하고 있는데, 앞의 각주와 통합하는게 좋겠다. 또한 이욱의 자가 중당(仲堂)인데,
최현이 그를 ‘이실(而實)’로 부르면서 혼동이 생겼는지, 주석에는 그를 이지화(李之華, 1588~1666)로 재구했다. 그러나 1609년의 이지화는 아직 사마시에도 급제하지 못한 약관의 젊은이였다.
망헌 이주(李胄, 1408~1504)의 시가 10월 26일과 1월 10일 일기에 두 번이나 인용되어 있는데, 두 시의 번역이 다를 뿐만 아니라 두 번째 시에는 오자도 있다.
굳이 이런 사소한 실수를 언급한 것은 조천일록의 갖는 자료적 가치 때문이다. 연행록에서의 위상도 위상이지만, 조천일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조선으로 제한하면 ‘임란수습기’,
세계적으로 보면 ‘명청교체기’라는 혼란기에 활약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최현의 사행 체험은 그만의 특수한 경험이기도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갔던 관료들의 공통의 경험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이후 행적과 이들이 남긴 시문을 해석함에 있어 조천일록은 주요한 참조점을 줄 수 있다.
예를들면 주청사 서장관 강홍립의 북경 체험이 10년 후 심하전역에서의 결정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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