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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 [144] 폴란드 제1신(3) : 대체 무엇 때문이었는가? 잠들지 않는 아우슈비츠의 광기(狂氣)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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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03 15:32 조회 1,77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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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제1신(3) : 대체 무엇 때문이었는가? 잠들지 않

                        는 아우슈비츠의 광기(狂氣)여!(3) 



 오후 1시. 따로 돈을 내고 뮤지엄 측에 전문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다. 투어의 대상은 이곳 아우슈비츠와 이곳으로부터 3km 떨어진 비르케나우 등 두 곳. 가이드를 따라 두 곳을 도는데 3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했다. 영국에서 온 듯한 젊은이들 십여 명과 함께였다.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참상들. 가이드의 현란한 영어에 취할 여유가 없었다. 수용소의 출입문. ‘Arbeit Macht Frei'란 문구. 박성준 선생은 ’일하면 자유로워진다‘고 번역했지만, 문외한인 나라면 ‘죽도록 일해라. 그럼 풀어줄 것이다’라고 번역했을 텐데. 그 기만적인 문구가 가증스러웠다. 아우슈비츠에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곳은 제4·5·6·7·11 블록과 점호광장, 화장터와 개스실 등. 그리고 인근 브졔진카의 비르케나우 수용소. 

 어느 한 구석 ‘인간적인 면모’가 전제될 경우에나 쓸 수 있는, ‘끔찍하다’는 말. 그러나 이 경우엔 그 표현도 적합지 않다. 아무리 사전을 뒤져보아도 마땅한 말이 없다. ‘쥬라기 공원’의 티라노 무리에게 인간을 벌거벗겨 던져준들 이렇게 다룰 수 있을까. 산더미처럼 쌓인 갖가지 모양의 구두들, 아직도 형형한 눈동자들이 살아 비치는 안경들, 꿈을 가득 담아 들고 온 가방들, 바리바리 싸온 취사도구들, 금이빨들, 머리빗들, 의족들, ... 다시 무엇을 덧붙이랴.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한 건 엄마의 손을 잡고 가스실로 향하는 아이들의 천진스런 표정, 돌쟁이들의 앙증스런 옷가지들이었다. 살아가면서 별로 울어본 기억이 없는 우리지만, 비로소 뜨거운 눈물이 가슴으로부터 솟았다. 그들은 샤워의 즐거움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꿈만 같은’ 모처럼의 호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비참한 죽음으로 향하는 길임을 어찌 알았으랴. 

 제 4블록 2층 5호실. 우리가 인간의 탈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부끄러워진 곳. 내 안에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르는 악마성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준 점, 히틀러와 당시의 독일인들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그곳 창고엔 사람의 머리털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들의 머리털을 잘라 모아놓은 곳. 그 옆방엔 그 머리털을 재료로 짜낸 매트리스와 천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들은 시신들에서 뽑아낸 금이빨, 각종 장신구들로 막대기 모양의 금괴를 만들어 독일 중앙 위생국으로 보냈단다. 머리털은 잘라 독일의 공장으로 보냈고. 거기서 인간의 머리털로 매트리스를 짜 내고, 옷감을 만든 그들. 살점을 베어내 스테이크로 만들어먹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일인가. 

 ‘총살의 벽’ 바로 옆 건물에서 우리는 숭고한 자기희생을 발견했다. 바로 콜베신부. SS대원들이 유태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던 그 건물 첫 방. 그들에게 삶을 간구하는 어떤 유태인을 대신해 총살의 벽에 선 콜베신부. 나치가 만들어낸 불지옥 속에서도 자기희생의 숭고한 휴머니즘은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수 있었다. 폴란드인 콜베신부. 아마도 크라쿠프에 가면 그 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온갖 기발한 착상의 고문 방법. 인간의 두뇌가 고안할 수 있는 방법이란 방법은 모조리 동원한 그들. 그렇게 인간을 말려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는 대체 뭘까? 단순히 히틀러가 내세웠다던 ‘자민족 제일주의’ 때문이었을까. 유태인만 다 죽이면 지상에서 독일인이 가장 위대해진다고 그는 정말로 믿고 있었던 것일까. 유태인에 대한 증오? 히틀러의 전기를 자세히 읽진 못했으나, 개인적인 증오가 민족 전체에 대한 증오로 그토록 쉽게 확대될 수 있는가. 

 어쩌면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을 히틀러 자신도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직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나, 일단 만들어진 조직은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가는 법. 나중엔 만든 사람까지 그 조직의 통제를 받게 되는 것이 인간사회의 속성. 컴퓨터를 인간이 만들었으나, 인간이 그 컴퓨터의 통제를 받는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조직의 비인간적 속성. 지금 눈앞에서 확인하는 이 참상. 결국 그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투어 내내 우리의 마음은 참담했다. 심지어 ‘아우슈비츠에 오기 전 독일 코스를 끝낸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고 아내는 덧붙이기도 했다. 듣고 보니 그랬다. 그 선량하던 독일인들. 알펜 가도 라우펜엑의 농가에서 만난, 순박한 아줌마와 아저씨. 그들의 얼굴 어디서 히틀러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


 투어 도중 우리는 <인생은 아름다워라>나 <쉰들러 리스트> 등의 영화에 대하여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두 작품 모두 바탕은 휴머니즘. 전자는 마침내 어린 아들을 구하고 형장으로 끌려간 아버지의 사랑을, 후자는 유태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애쓰는 독일인 쉰들러의 자각을 각각 그렸다. 감독도 주연배우도 모두 잊었지만, 당시 이 영화들을 보면서 그 사실성에 치를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한 복판에 선 지금, 가스실에서 죽어간 영혼들의 아우성을 듣는 지금. 그 영화들이 얼마나 낭만적인 것들이었는가를 깨닫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참상들은 엄청나게 절제된 것들이었음을 이 장소에 와서야 알았다. 관객들이 받을 충격을 감안한 배려였는가, 아니면 예상되는 비난에 대비한 ‘자기 검열’의 결과였는가. 그 영화들의 사실성은 이 자리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그것의 천분지일도 되지 못한다는 것, 따라서 그 영화들이 사실적이기보다는 낭만적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 등을 비로소 확인했다.    

 우리가 탁상에서 거론하는 휴머니즘이야말로 얼마나 공소(空疎)한가. 나치의 혹독한 폭력 속에서 어린 아들로 하여금 위기를 건너갈 수 있도록 한 아버지의 마음은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 그러나 쉰들러 같은 사람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상이다.

 히틀러를 키워낸 독일인들이 유태인과 한 하늘 아래 숨 쉬고 살아갈 수 있으려면, 자기들 속에 수많은 쉰들러들이 있었다고 믿는 수밖엔 없을 것이다. 단 하나의 쉰들러도 없었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더 이상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갈 힘을 잃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아우슈비츠에서 우리는 재생을 경험했다. 어제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얻은 것이다. 내면의 정화. 많은 때가 끼어 제대로 보지 못하던 우리의 내면을 아우슈비츠의 시취(屍臭)와 시즙(屍汁)으로 말끔히 씻어냈다. 드디어 응시할 수 있게 된 우리의 자성(自性).  

 그래서 아우슈비츠는 제의(祭儀)의 공간일 수 있었다.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애도하는 공간이자 인간 모두가 스스로의 ‘사악한 자아’를 죽이고 ‘새로 태어나는’ 제의의 공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린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 현장, 크라쿠프Krakow로 떠난다. 


<계속>


**사진 위는 폴란드 아우슈비츠Auschiwitz 수용소 안의 즉결처분장(나치친위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으면 끌려나가 이곳에서 총살되었다), 아래는 폴란드 버켄하우Birkinau 수용소 안에서 끝난 철로(유럽 각지에서 유대인들은 이곳으로 끌려왔다-죽음의 종착역인가)


200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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