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기 [111] 체코 제1신(3-2) : 보헤미아Bohemia의 문화적 자존심과 아름다운 자유혼-체스키크룸로프에 중세와 르네상스는 …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03 13:57 조회 1,798회 댓글 0건본문
체코 제1신(3-2) : 보헤미아Bohemia의 문화적 자존심
과 아름다운 자유혼-체스키크룸로프
에 중세와 르네상스는 살아 있었네(2)
*
11월 6일 아침. 잘 차려진 펜션의 아침상을 받았다. 지금까지 다녀 본 어느 호텔보다 멋진 상차림이었다. 함께 식사를 한 오스트리아인과 나누던 대화를 서둘러 마치고, 우린 에곤쉴레를 만나러 시가지로 나갔다.
에곤쉴레 미술관. 센트룸의 시로카Siroka거리에 있었다. 그 옛날 양조장으로 쓰이던 건물이라 했다. 마침 에스토니아 작가들의 작품전이 함께 열리고 있었고, 대만 화가 양춘선의 설치미술도 전시되고 있었다. 마침 오늘(11월 6일)이 마지막 날이었다. 우리에겐 행운이었다.
재미있게 꾸며진 내부였다. 원래 양조장이었던 목조빌딩에다가 통로도 바닥도 에곤쉴레의 작품처럼 자유로운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에곤쉴레에 대한 소개를 첫 방에서 만났다. 어릴 적부터 죽을 때까지의 사진들이 순서대로 걸려 있었고, 시기별 행적 또한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1890년 6월 12일 빈 서쪽 40km 지점인 도나우 강가 툴른Tulln에서 출생. 1918년 8월 31일 빈에서 인플루엔자로 사망. 28세, 꽃다운 청춘의 요절이었다. 1918년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여 수백만을 희생시켰던 인플루엔자. 아기의 출산을 기다리던 아내 에디뜨Edith는 인플루엔자로 그보다 사흘 전에 죽었고, 감염된 그 역시 사흘 후 세상을 뜬 것이다.
10대 초반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죽기까지 겨우 10여 년 동안 330작품의 유화와 3천점 이상의 각종 그림들을 남긴 천재화가. 그의 어머니가 바로 이곳 체스키크룸로프 출신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이곳을 사랑했다.
그는 모델 발리 노이칠Wally Neuzil을 데리고 21살 때인 1911년 이곳으로 왔다. 그러나 그의 자유분방하고 매이지 않는 생활태도는 동네사람들의 비난을 사게 되었고, 금방 떠나야 했다. 특히 동네의 여자애들을 누드화의 모델로 쓰는 데 대하여 보수적인 동네사람들이 참을 수 없었던 듯하다.
어디서 그린 것들인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누드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비정상적인 모습들, 살아 움직이는 모습들이 바로 그가 지향한 미의 세계였다. 움직임 없는 누드는 하나도 없었다. 고전적 비율의 구도 역시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남녀가 격렬하게 껴안고 있는 누드, 여체의 적나라한 아름다움 등 다양했다. 누드화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훨씬 넘어서는 것들이었다. 지금 보아도 좀 그런데, 지금부터 100년 가까운 세월 전의 사람들을 이해시키긴 어려웠을 것이다. 거기에 천재 에곤쉴레의 고민이 있었으리라. 나는 기념으로 누드화중 하나를 골랐다. 그러나 ‘매사에 조신한’ 아내는 완강히 반대했다. 하는 수 없이 ‘제멋대로인 듯한’ 에곤쉴레의 자화상으로 낙착을 보고 말았다.
에스토니아 화가들의 그림들 또한 현란했다. 포스터로 등장한 에두아르트 빌라트Eduard Wilrat의 ‘붉은 스커트를 입은 여인Woman in a Red Skirt'. 붉은 치마가 바람에 날려 드러난 여인의 몸매! 아랫배와 퉁퉁한 두 다리가 괴기스러울 정도의 사실성을 자아내는 누드. 1930년에 파스텔로 그린 기발한 착상의 누드였다. 뛰어난 화가로 알려져 있는 오스카 코코쉬카Oscar Kokoschka의 그림들 역시 우리의 감동을 자아내긴 마찬가지. 에스토니아 화가들, 서로 다른 예술세계를 보여주면서도 인물들을 주로 묘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에곤쉴레의 그것과 ‘같고 다른 점’을 비교해 보라는 주최 측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에곤쉴레의 예술적 세례를 받아서 그랬는지. 우리는 휘청거리는 마음과 몸으로 거리 투어에 나섰다. 산 위에 우뚝 솟은 고성을 찾았다. 10월 말까지 이미 고성의 내부 투어는 끝났다고 했다. 서운함을 달래면서 고성의 통로와 정원, 탑을 찾았다.
탑에 오르니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왜 세계인들이 체스키크룸로프를 찾아오는지는 이 탑에 올라야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한다. 말 그대로 동화 속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빨간 색 지붕의 집들이 빽빽이 들어찬 곳. 그 사이의 길에 우산을 든 많은 사람들. 세계 각처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이다.
사시사철 주야로 흘러내리는 블타바 강.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것을 미래를 위한 삶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체코인들의 슬기가 역력히 드러나는 곳. 살아있는 중세 도시 체스키크룸로프의 모습이다.
도시의 경관에 취해있던 우리는 탑에서 내려와 다시 골목을 뒤졌다. 성 비투스 교회.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건물로 원래는 고딕 양식. 여러 차례의 개축을 통해 현재와 같은 신 르네상스 양식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성 비투스 교회는 체코의 원래 지배자였던 프레미즐 왕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은 보르지보이 왕, 그의 손자인 바츨라프 1세가 성 비투스를 받드는 교회를 처음으로 건립한 것이 시초였다. 그러니 체스키크룸로프의 중앙에 성 비투스 교회가 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교회 안으로 들어가 소박하면서도 장중한 내부구조를 살피고, 잠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미사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가. 교회 안에는 향내가 은은했고, 그 속에 묵상에 잠긴 사람들이 몇 있었다.
교회를 떠나 센트룸의 레스토랑에서 체코 음식과 부데요비치 맥주(‘버드와이저’)로 목을 축인 우리. 어두워지는 거리를 빙 돌아 강변의 숙소로 돌아왔다.
***
체코는 생소한 곳이었다. EU에 속한 나라이긴 하나 화폐도 다르고, 우리에겐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 우리를 적대시하던 공산국가였다는 사실 만 우리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기껏 ‘프라하의 봄’이나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폴란드 등 주변국들과 공유하는 역사 약간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체코의 국경을 넘으면서 이 나라가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원활한 인터넷 시스템. 지금까지 거쳐 온 어느 나라보다 체코는 인터넷에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체스케부데요비치의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인터넷을 물었더니 턱으로 컴퓨터를 가리켰다. 한 번 접속해보라는 것이었다. 시험적으로 키를 눌렀다. 백규의 홈페이지가 순식간에 떠올랐다. 자판이 달라 글자를 처넣을 수는 없었지만, 홈페이지 안의 모든 파일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는 탄성을 울리고 말았다. ‘Ceska internet is fantastic!'이라고 추어주었더니 그녀는 자랑스레 미소를 지었다.
숙소 가이드를 들춰봤다. 아주 작은 펜션까지 모두 홈페이지가 구축되어 있는 게 아닌가. 구멍가게에 가서 무얼 물어도 점원은 즉각 컴퓨터를 누른다. 그만큼 정보망이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고, 검색 또한 원활하다는 것. 우리만 IT의 강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미지의 세계 체코에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체코에 들어온 지 사흘. 짧은 기간, 우리는 체코와 친숙해질 수 있었다. 말과 문자는 아직도 깜깜하지만, 어떻게든 의사소통이야 못하겠는가. 이제 프라하로 입성할 준비는 마친 셈.
오늘 우리는 ‘역사가 살아 숨 쉰다는’ 프라하로 들어간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리고 용감하게!!!
*알파벳의 머리 부호들(ˇ, ʹ)을 이 컴퓨터에서는 처리할 수 없으므로 생략합니다. 서울에 돌아가서 해결하겠습니다.
<계속>
**사진 위는 체스키크롬로브의 숙소(Anna Salonova Penzion)에서의 아침식사, 아래는 체스키크룸로브 젠트룸의 에곤쉴레 아트센트룸Egon Schiele Art Centrum에서 진행되고 있는 표현주의 전시회-아스토니아 작가(2005. 11. 6. 까지) 포스터
- 이전글[112] 여행단상(9) 자기모순에 빠진 백규
- 다음글[110] 체코 제1신(3-1) : 보헤미아Bohemia의 문화적 자존심과 아름다운 자유혼-체스키크룸로프에 중세와 르네상스는 살아 있었네(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