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기 [112] 여행단상(9) 자기모순에 빠진 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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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03 14:02 조회 1,776회 댓글 0건본문
자기모순에 빠진 백규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대는 인포메이션 센터. 갑자기 일단의 관광객이 들이닥쳤다. 주름 진 얼굴에 하얗게 분칠한 듯한 화장, 고만고만한 키에 가방을 하나씩 둘러멘 ‘아줌마 부대’였다. 그 중의 한 여인이 책자의 진열대로 가더니 ‘하, 고꼬니모 니혼고노 가이도가 아리마스네에!’ 하고 길게 뽑았다. 그러자 그 쪽으로 우루루 몰려가는 그들. 알 수 없는 말들로 왁자지껄 지껄였다. 아마도 ‘그것 봐. 역시 우리 일본이야!’ 정도의 뜻이었을까.
창구에서 조용히 차례를 기다리던 나는 속에서 끓어올랐다. ‘◯◯먹을 ◯◯◯들!’ 하고. 내뱉어 보았자 알아들을 리도 없지만, 왠지 내 자신의 입이 더러워지는 듯하여 가래침 마냥 꾹 삼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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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온 이래 외국인들을 만날 때마다 열에 여덟은 우리보고 ‘야뽕’ 아니면 ‘야판’이냐고 물었다. ‘일본인이냐’는 뜻이다. 어떤 녀석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면서 ‘곤니찌와!’를 외치기도 하고. 심지어 음식을 맛있게 먹고 나서 계산을 하고 나설라치면 어떤 반죽 좋은 카운터 아줌마는 ‘사요나라’를 외치기도 한다. 그 뿐인가. 기념품 가게의 아줌마들도 ‘아리가또’를 외치며 우리의 환심을 사려 한다. 도대체 우리의 영어를 듣고도 그런 ‘망발’을 하다니! 우리의 이 모습에서 어찌 일본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굳도 모닝구’ 식의 영어와 우리의 매끄러운(?) 영어가 어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번번이 ‘We are from Seoul Korea'를 외치긴 하지만, 그런 대접을 받은 날엔 영락없이 속이 쓰렸다.
멀리서 유치원생들처럼 가이드를 졸졸 따라다니는 작달막한 아줌마 아저씨 부대만 나타나면, 옆 골목으로 피해버리는 요즈음이다. 못된 버릇임은 분명하나, 언짢은 기분을 갖지 않으려는 ‘자구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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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로부터 압박을 받은 민족의 일원이란 점. 집단적 자아의 측면에선 나도 그들을 미워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과거의 일. 개인적 원한이 없는 한 그들을 미워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더구나 코스모폴리탄을 자처하고 있는 백규 아닌가. 그런 내가 외국에 나와서 그들을 까닭 없이 미워하다니!
곰곰 생각해 보았다. 갑자기 내 목에 걸고 있는 카메라가 떠올랐다. 어김없는 일제 카메라였다. 어쩔 수 없었다. 한국에서 나는 우리나라 모 회사의 카메라를 쓰고 있었다. 그걸 들고 유럽에 오려 했다. 그러자 내 주변에 있는 몇몇 분들이 핀잔을 주는 것이었다. ‘그걸 들고 어떻게 일생 처음 가는 유럽에 가려 하느냐! 카메라 하면 일제 ◯◯◯◯을(를) 써야한다. 후회하지 말라!’ 는 요지였다. 깜짝 놀란 나는 출발 직전 이 카메라로 바꾸었다. 써 보니 좋긴 했다. 내가 찍은 것 같지 않게 사진들이 쑥쑥 잘도 나왔다. 그러나 일본인들을 미워하게 된 요즈음 이 카메라가 부담스럽다. ◯◯◯들을 미워하면서 왜 그들의 제품은 신주단지 모시듯 목에 걸고 다니는가. 스스로 부끄러워지면서, 우리나라의 공학도들과 회사들에 대한 원망이 생기는 것이었다. ‘밥 ◯먹고 그동안 뭣들 하고 지냈길래 조막만한 카메라 하나 제대로 못 만들어 냈느냐’는 요지의 원망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만나는 외국 사람들 열에 아홉은 일제 카메라나 캠코더를 들고 있었다. 참으로 부끄러우면서도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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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이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한국에서 읽은 관광책자들도 수상쩍었다. 상세하게 설명된 세계 각국의 도시들, 풍부한 내용들. 도대체 우리나라의 누가 언제 그곳들을 다니며 그런 내용들을 조사했단 말인가. 며칠 전 그 가운데 한 부분을 읽다가 무릎을 치고 말았다. 유럽에서 ‘글뤼봐인’이라 발음하는, ‘데워 마시는 와인’. 아, 그것을 그 책은 ‘구루바인’으로 써놓은 게 아닌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 책은 일본의 해외 관광 가이드북을 베껴놓은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저자도 번역자도 밝혀져 있지 않은 여행 관련 책자들이 한국의 서점엔 그득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대부분 도토리 키 재기 식의 내용들. 다른 건 표지 디자인뿐이었다. 모두 일본책을 무단 도용한 해적판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혐의를 내심 갖게 되었다. 유럽을 다니다 보니 일본사람들의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쩌면 그리도 속속들이 다녔으며, 어쩌면 그리도 상세히 조사할 수 있었는지 기가 찰 일이었다. 어쨌든 우린 그런 책들의 도움을 받아 여행을 준비할 수 있었다.
또 있다. 앞서 유럽 사람들은 우리를 일본인으로 알아본다는 말을 했다. 바로 그 점이다. 일본인들 덕분에(?) 아시아인들의 존재를 알게 된 유럽인들. 그들이 우리를 제대로 알아보든 일본인으로 알아보든, ‘처음 만나는 인종’ 이라 하여 우리를 원숭이 보듯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일본인으로 오해할 때마다 우리가 한국인임을 깨우쳐주면 된다고 믿는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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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일본 관광객들에게선 배울 점도 많다. 비록 ◯◯◯떼처럼 몰려다니긴 하지만, 가는 곳마다 가이드의 설명에 귀 기울이며 열심히 메모하는 그들의 모습은 솔직히 ‘존경스럽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모습은? 이곳에서도 가끔 우리나라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아무데서나 담배 꼬나물고 건들거리는 모습들. 대충 둘러보곤 훌쩍 식당으로 몰려가거나, 서로 기념사진 찍기에만 바쁜 모습들. 가이드의 설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의 잡담에만 신경 쓰는 사람들.
하이델베르크 고성에서의 일이다. 고성 내부의 방들은 따로 돈을 내고 성 전속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관람할 수 있다. 가이드 투어의 시간이나 인원도 제한되어 있다. 어떤 한국인 아저씨 한 분. 여러 친구들을 거느리고 제왕처럼 그곳에 나타났다. ‘Romantische'라고 쓰인 입구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관리원이 제지했다. ‘여기를 들어가려면 가이드 비를 낸 다음 정해진 시간에 가이드를 따라 들어갈 수 있습니다’라는 게 그가 말한 요지.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아무 대꾸나 질문도 없이 친구들에게 돌아간 그 아저씨. ‘야 저긴 로마의 유물들이 있는 곳이야. 볼 필요 없어!’라고 한 마디로 일갈하곤 무리를 이끌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로마의 유물이 아니라 그 성에 관련된 로만틱 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된 곳이었다.
성 내부 투어를 마친 우리. 그 아저씨를 지하 와인 수장고에서 또 만났다. 예의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이 새끼들, 한가해서 이런 와인 통이나 만들고 있었던 거야!’ 하고 너스레를 떨며 그곳을 독점한 채 기념사진만 열심히 찍어대는 것이었다. 놀라웠다. 아직도 이런 사람들이 우리 속에 있다니! 이런 식으로 해외관광을 나온다면 과연 무엇을 배워간단 말인가. 극소수이겠지만, 일본인들과 대조되는 일면이었다. 이런 한국인으로서 일본인들을 어떻게 미워하고 빈정댈 수 있단 말인가.
***
일제 카메라를 메고 다니고, 일본인들이 만든 관광 책으로 공부했으면서 일본인들을 미워하게 된 백규. 일본인만 보면 늘 임진왜란과 일제 36년이 떠오르고, 당한 것 없으면서도 미워하게 되는 피해의식. 유럽의 관광지에서 ◯◯◯떼처럼 몰려다니는 그들을 보며, 비슷한 모습 때문에 창피해지는 이 마음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코스모폴리타니즘과 내셔널리즘이 내 안에서 뒤죽박죽 된 요즈음. 갑작스레 자기모순에 빠져버린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 요즈음이다.
<계속>
**사진 위는 체스키크룸로브 시내에서 만난 어떤 까페테리아의 재미있는 간판, 아래는 체스키크룸로프성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2005-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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