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기 [126] 여행단상(11) : 컴퓨터 내 사랑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03 14:50 조회 1,587회 댓글 0건본문
여행단상(11) : 컴퓨터 내 사랑
유럽 장정(長征) 석 달 째. 자동차 트렁크 속의 괴나리봇짐들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이동할 때면 가장 안전한 곳에서 호강하는 게 컴퓨터와 카메라다. 3대 독자(獨子)를 등에 업은 아버지 마냥 나는 늘 컴퓨터를 등에 지고 어디든 간다. 음산한 날씨에도 내 등에 착 달라붙은 컴퓨터가 매우 따뜻해서 좋다. 자식의 가슴팍보다 더 훈훈한 온기가 전해온다. 이 녀석의 머릿속엔 우리의 유럽 장정에 관한 모든 게 들어있다. 백 편이 넘는 글과 수천의 사진들. 그래서 그런가. 날이 갈수록 무거워진다. 갈수록 무게가 늘어 늙은 아버지로서는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연행사(燕行使)’에 비유하게 되었다. 조선정부가 청나라 조정에 파견하던 연행사. 물론 연행사가 지닌 ‘사대외교(事大外交)’의 임무까지 우리가 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연행사라고 지칭한 것은 외국에 나가 ‘새로운 문물’을 접하며 놀라던 그들의 내면, 그리고 외국인들 앞에서 늘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우리 자신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한 차례에 수백 명씩이나 파견되던 연행사. 그 중의 수뇌부는 정사(正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 등 삼사(三使)였다. 나는 정사와 서장관, 역관에 마두(馬頭)까지 겸하고 있다. 순방하는 나라들마다 사절을 대표하기도 하고 자동차를 운전해야 하며 모든 견문들을 기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부사, 건량관(乾糧官), 부역관, 주방(廚房) 등을 겸하기로 했고. 그러는 중에 우리는 컴퓨터의 고마움을 공감하게 되었다.
그 옛날 서장관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모든 공식적인 기록의 책임자는 그였다. 상대 나라 조정과의 외교문서, 본국 조정에 올리는 각종 보고서 등,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수시로 목격하는 기사일문(奇事逸聞)들을 어찌 놓칠 수 있으랴. 그러려면 그의 곁에는 항상 벼루와 먹, 붓, 그리고 종이가 구비되어 있었어야 할 것이고. 그러나 그것들이 좀 거추장스러운가. 물론 통에 넣고 다니는 이른바 ‘인스턴트 먹물’이 있긴 했겠지만. 그렇다 해도 일이 있을 때마다 종이를 펴고 붓을 놀린다는 게 쉽진 않았으리라. 툭하면 하얀 옷에 검은 먹물이 떨어지기도 했을 것이니 그 세탁은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둘러보아야 지저분한 중국의 저잣거리이고 보면 글 쓰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았음에 틀림없다.
오늘날의 우리처럼 ‘성능 좋은’(?) 카메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위치만 넣으면 작동되는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테니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래서 아내는 늘 나보고 그 옛날 태어나지 않은 게 얼마나 행복하냐고 말하며 웃는다.
***
호텔방에 도착하면 우선 컴퓨터와 카메라를 켜고 그 날의 수확물을 정리한다. 추려낸 사진들에 날짜와 내용을 입력한 다음, 그날 일정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 대부분의 일을 ‘사랑하는’ 내 컴퓨터가 수행한다. 그 옛날 서장관의 ‘지·필·묵·연’이 행하던 임무를 한꺼번에 행하는, 대견한 내 컴퓨터.
그 뿐이랴. 인터넷에 연결만 되면 이 녀석은 본국 조정에 대한 파발마 혹은 연락관의 역할까지 겸한다. 아, 이 녀석이 없었다면 내 여행은 어땠을까?
호텔 방에 앉아 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꽁당꽁당 적어나가는 백규거사의 궁한 모습을 좀 상상해 보시라! 어느 세월에 그 많은 견문들을 기록할 수 있었으리?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으면 내 상상의 나래는 이곳 유럽 상공에서 활개를 친다. 좀 더 높이 올라가면 조국의 산하도 보이고. 그건 이 녀석과 나의 교감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일 터. 내가 서장관이 아니라 이 녀석이 진짜 유능한 서장관임을 오늘 부로 인정하고 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맡기려 한다.
사랑하는 내 컴퓨터여!
<계속>
**늘 저와 함께 붙어다니며 고락을 함께 하는 컴퓨터입니다. 많이 사랑해 주세요.
2005-11-15
- 이전글[127] 체코 제6신(1) : 폴란드로 동진(東進) 중 만난 아름다운 도시들과 아름다운 사람들
- 다음글[125] 체코 제5신(3) : 폐광 위에 꽃 핀 세계문화유산-쿠트나호라KutnaHora의 은광과 바르보라 성당Chram sv. Barbory/St. Barbara Cathedral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