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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 [96] 에피소드4 : 초대받지 않은 생일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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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2-30 01:17 조회 1,67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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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4 : 초대받지 않은 생일잔치 




 잘츠부르크 외곽의 헬브룬궁을 관람하고 나니 1시쯤이었다. 호텔의 아침, 식당의 갓 구어 낸 빵이 맛있어 좀 과식했던 듯. 때는 지났으나 별로 점심 생각이 나지 않았다. 헬브룬 산맥 끝에 외따로 떨어진 헬브룬궁이라 근처엔 식당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붸르펜을 향해 달리기로 했다. 가다가 그럴 듯한 마을이 나타나면 들어가 요기를 하기로 하고.

 산을 넘고 몇 개의 마을들을 지나치자 시장기가 찾아왔다. 우선 눈에 띄는 마을에 들어갔다. 그런데 베이커리도 수퍼마켓도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다음 마을로 들어갔다. 베이커리, 수퍼마켓 뿐 아니라 그 흔한 케밥집도 핏자집도 주유소 안의 마켓도 닫혀 있었다. 다음 마을도, 그 다음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2시쯤이었다. 수요일 오후 2시밖에 안 되었는데. 토요일도 아니고, 일요일도 아닌데. 대체 이 나라 사람들은 언제 일해서 먹고 산단 말인가. 배가 몹시 고프다 보니 오스트리아 사람들 사는 문제까지 걱정하게 된 것이었다. 

 간신히 붸르펜에 도착, 시가지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기차역 안의 상점은 웬만해선 닫지 않는다는 그간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곳은 간이역 밖에 없었다. 그저 한 시간에 한 두 개의 열차만 통과하는 곳. 상점이 있을 리 없었다.

 길옆에 주차하고 나서 대책을 숙의했다. ‘숙소고 나발이고 우선 민생고부터 해결하자!’는 게 당면 목표. 그러나 구멍가게 하나 열려있지 않은데, 어디서 민생고를 해결한단 말인가. 지나가는 아주머니를 불러 세웠다. 그 아주머닌 영어를 몰랐다.

 지나가던 다른 아주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그 아주머닌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다가온 이유를 알만했다. 배고픈데 가게를 연 마을이 한 곳도 없다고 하소연하니, 이유를 설명한다. 10월 26일 오늘이 오스트리아 건국기념일이라고.

 아하, 그랬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우린 휴일 날 점심 대책도 없이 길을 떠나온 것이었다. 그 아줌마는 다음 마을(비숍스호펜Bishofshofen)에 가면 딱 한 식당이 열려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그 식당의 음식이 값도 싸고 맛도 좋다면서. 우리의 귀가 번쩍 뜨인 건 물론이다.

 마구 달렸다. 잠깐 만에 그 마을이 나왔고, 큰 길 옆에 그 식당(란트가스트호프Landgasthof 라이트사머호프Reitsamerhof)이 있었다. 크게 열린 문으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


 쾌재를 부른 우리는 들어가 앉자마자 음식을 시켰다. 늘 그렇지만, 메뉴판엔 알아볼 수 없는 오스트리아 요리 이름들이 가득했다. 영어도 안 통하는 곳. 까막눈의 설움을 절감하면서 손짓 발짓으로 음식을 주문하고, 기분에 맥주도 한 잔씩 시켰다.

 주문을 하고 나니 갑자기 주악소리가 들려왔다. 옆의 홀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유리창으로 훔쳐보니 많은 사람들이 좌석을 그득 메웠는데, 연방 술잔이 들어가고 있었다. 식당 직원을 부르니 다행히 영어가 웬만큼 통하는 아가씨였다. 도대체 무슨 모임이냐고 물었다. 들어보니 앞 동네에 사는 어떤 어른의 생일잔치였다. 식당의 한 홀을 전세 내어 오후 내내 잔치를 한다고 했다.

 음악을 들어보니 TV나 영화에서 많이 보고 듣던 이 지역의 전통 민요인 듯 했다. 현악기와 관악기로 신나게 연주하면 쌍쌍이 붙들고 돌아가며 춤을 추는 노래였다. 아, 이제야 드디어 한 건 올리나 보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오랜만에 이곳 전통 잔치 구경도 하고 사진도 몇 장 찍어보자. 혹 아는가. 전통음식이라도 좀 얻어먹을 수 있을지.

 분명 빈속에 들어간 맥주가 작용을 한 것이리라. 매사에 조심성이 너무 많아 불만인 아내. 그녀가 극구 말려도 내 호기심은 잠들 줄 몰랐다. 나는 작업을 시작했다. 아까 불렀던 그 종업원을 다시 불렀다. ‘나는 이곳에 온 관광객인데, 생일잔치 사진을 좀 찍으면 안 되겠느냐’고. 잠시 후 돌아온 그녀는 ‘대환영’이라 했다.

 신이 오른 내가 잠시 창문으로 그 쪽의 분위기를 보니, 선물 증정시간인 듯 했다. 동네 꼬마에서 노인들까지 각자의 선물을 주인공에게 전달하는 순서였다. 가만히 생각했다. 명색이 대한민국의 대학선생인 내가 남의 나라 노인 생일잔치에 참석하는데 빈손으로 갈 수야 있나?

 그러나 들고 갈 것이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든가. 다짜고짜 아내의 가방을 열었다. 길 안내를 해주는 등 고마운 사람들에게 주려고 준비해온 ‘이쁜 책갈피’들이 여러 개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꺼내 봉투에 넣고 몇 마디 축하의 말을 쓴 다음 들고 갔다. 물론 그 통역을 대동하고. 떠들썩하던 좌중의 시선이 내 번들거리는 이마에 꽂혔다. ‘대체 어디서 굴러온 뼉다귀일까?’ 의아해하면서도 재미있다는 표정들이었다. 통역이 내 말을 주인공에게 전했다. 그러자 그 주인공은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생각해보라. 김일성 같은 거물이나 되어야 해외의 사절들이 생일축하선물을 들고 찾아오는 법이다. 그 주인공은 수십 년을 살았겠지만, 기껏 동네잔치나 벌일 줄 알았지, 한반도의 특사가 선물을 들고 찾아오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니 당황한 것도 당연했다. 나는 그 선물을 건네면서 생일을 축하한다고, 무병장수하시라고 덕담을 건넸다. 사람들이 박수를 쳐대고 환호성을 내뱉는 통에 통역을 쓸 여유도 없었다. 내 말이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주인공은 얼굴에 홍조를 내보이면서까지 좋아했다. 자못 흐뭇해진 나는 다시 옆방으로 돌아와 주문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잠시 후 체구 좋은 아줌마 한 사람이 건너왔다. 떠듬거리는 영어로 전하는 말인 즉은, ‘자신은 주인공의 부인인데, 잠시 후 주악을 울릴 것이니 와서 함께 놀 수 있겠느냐?’는 요지였다. 참새가 어찌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며, 누렁소가 어찌 콩밭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Of course, I can!’ 나의 이 한 마디에 그녀는 의기양양해져서 돌아갔다. 

 그러나 음식을 먹으면서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곳 분위기나 은근한 표정으로 보아 그녀는 분명 내게 춤을 청할 텐데. 앞에 버티고 있는 엄처(嚴妻)도 걱정이려니와 무엇보다 나는 춤을 출 줄 모른다. 춤을 배워본 적도 없고. 어느 기회에 두어 번 추어보려 했으나 도무지 박자를 맞출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날 이 때까지 막춤조차 추길 꺼려하는 나였다. 그런데, 동양의 신사를 자처하는 내가 서양여자를 안고 돌아가며 박자조차 맞추지 못한다면?

 전통시대 동양에서는 가(歌)·무(舞)·악(樂)이야말로 인간에게 문채(文采)를 더해주는 교양필수였다. 노래 한 가락 못 부르고, 춤 한 자락 못 추며, 악기 하나 못 다루는 인간을 어찌 교양인(즉 신사)이라 할 수 있으리. 그런 인간이 정치는 어떻게 할 것이며 대학의 선생노릇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공자님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서 노래도 춤도 악기도 배워보리라 늘 다짐을 해왔지만,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꽃 같은 청춘을 다 보내고 말았으니. 오호, 통재라! 오늘, 드디어 그 쓴 맛을 보는구나.

 대충 식사를 끝내고 잔치자리로 넘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춤판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내 앞에 앉은 어떤 할아버지. 걸음도 간신히 걷는 그 할아버지에게 젊은 여자 하나가 춤을 청했다. 엉거주춤 끌려 나간 그 할아버지. 그 빠른 음악에도 기막히게 춤을 잘 추었다. 부럽고도 신기했다. 잠시 후 예의 그 아줌마가 다가왔다. 다음 차례에 춤을 추자는 청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나. 처음엔 그냥 눈 딱 감고 막춤으로 응해볼까 했다. 그러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힘들게 해외에 나와 대한민국의 명예를 망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내겐 ‘다음 행선지에 빨리 가서 숙소를 구해야 한다’는 명분도 있지 않은가. 아쉬움에 멈칫거리면서도 끝내 나는 도망치듯 빠져나오고 말았다. 그 좋은 기회를 놓친 기분이란! 도망치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건넨 말.

 ‘이제 춤바람 날 나이는 넘긴 것 같으니, 서울 가거들랑 춤 한 자락 배워야 쓰것네!’ 


<계속>


**사진 위 아래 모두 베르펜Werfen-란트가스트호프Landgasthof 라이트사머호프Reitsamerhof에서 점심을 먹는 중 옆방에서 벌어진 생일잔치에 참여한 모습 

  

200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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