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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 [99] 여행단상(6) : 덮어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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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2-30 01:21 조회 1,77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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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단상(6) : 덮어쓰기




 컴퓨터를 글쓰기에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80년대 후반. 내겐 웃지 못할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가장 괴로웠던 일 하나가 ‘덮어쓰기’다. 요즈음은 젖만 떨어지면 컴퓨터를 갖고 노는 게 아이들의 일이니 문서작성 정도야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아는 시절.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할 리 없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에 걸쳐 논문 한 편을 쓰다 보면 논문 쓰는 장소도 다를 수 있고, 저장 영역 또한 다를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연구실과 집에서 같은 논문을 동시에 진행할 때가 있다. 학회지의 마감에 쫓길 때, 자료들이 집과 학교에 분산되어 있을 때는 어쩔 수가 없다. 지금이야 이메일이 활성화되어 있으니, 작업하던 것을 이메일에 올려놓으면 어디서든 빼내 붙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엔 공책 장 반 쯤 되는 크기의 플로피디스크나 손바닥 크기의 하드디스켓으로 퍼나를 수밖엔 없었다.

 밤 11시가 넘어 들어가 책상에 앉으면 12시가 훌쩍 넘기 마련. 새벽 1시나 2시쯤 되면 졸음이 눈꺼풀을 내리눌러 제대로 작업이 될 리가 없다. 기껏 한 두 페이지가 고작. 그래도 그게 어디냐? 대충 저장해갖고, 다음날 일찍 연구실에 나간다. 우선 힘겹게 작업한 것을 컴퓨터에 옮길 생각으로 디스켓을 넣고 키를 두드리면 ‘덮어쓰시겠습니까?’란 물음이 나오고, 비몽사몽 당연히 ‘Yes'를 누른다. 강의가 끝난 다음 작업을 하려고 파일을 꺼내면 10페이지가 넘어 있어야 할 논문은 달랑 두 페이지 뿐. 정신이 번쩍 들면서 가슴을 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어처구니없는 우행(愚行)을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며칠 간 방황할 뿐이었다. 

 이런 경우 말고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으나, ‘덮어쓰기’의 실수로 고통 받은 경험이 적지 않다. 논문 한 편을 날리고 나면 참으로 허무하다. 다시 기억을 되살리거나 새로 써서 더 좋은 논문이 나온다 해도 허무하고 아깝기는 마찬가지다. 흡사 뱃속에서 잘 자라고 있던 아이가 유산되거나 사산되는 느낌. 그만큼 끔찍한 경험들이다. 


             ***


 여행하면서 ‘덮어쓰기’의 괴로운 추억을 떠올리는 때가 종종 있다. 유럽 여행을 시작한지 오늘로 두 달이 지난다.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사실 ‘엄청난 곳들’을 다녔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그림들이며, 건물들, 도시들. 모두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감동들이 하루 이틀 사이에 사라진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그 이전의 것들은 찍어놓은 사진 혹은 써 놓은 글들을 통해서나 기억해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매일 새것들을 보고 새 도시에 간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새로 만나는 것들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갈수록 성당들은 크고 화려해지며, 자연은 더 아름다워지며, 음식은 더 맛있어지며... 그런데 새로운 견문이나 새로운 감동이 이전의 것들을 덮어버리는 것이었다. 전에 본 것들보다 지금 보는 것들이 반드시 더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새로운 감동을 주며 최고의 것으로 마음에 자리를 잡는다. 그 감동이 마음에 저장되어 있던 이전의 것들을 지워버리면서 새로이 저장된 것이다. 이른바 ‘덮어쓰기’를 통해서. 

 그래서 순간순간 찍은 사진들을 보관해놓지 않는다면, 기행문을 그때그때 써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현재의 경험만을 기억하게 될지 모른다. 어쩌면 나중엔 내가 왜 여행을 왔는지, 어느 경로를 통해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 까맣게 모를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허무한가. 여행의 발자취나 감동을 반드시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엔 한계가 있고, 보아야 할 것, 들어야 할 것들은 많다.

 옛 말에도 있지 않은가. “무딘 붓끝이 총명보다 낫다”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열심히 찍고 기록한다. 덮어쓰기의 어리석음과 허무함을 막으려고. 


<계속>


**사진 위는 9월 7일 감동적으로 만난 베르사이유의 모습, 아래는  10월 31일에 만난 바하우 계곡 크렘스의 글록켄슈필Glockenspiel이란 건물


200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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