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기 [87] 오스트리아 제2신(4) : 잘차흐Salzach 강변에 꽃핀 영욕의 역사, 잘츠부르크Salzbur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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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2-30 01:06 조회 1,680회 댓글 0건본문
오스트리아 제2신(4) : 잘차흐Salzach 강변에 꽃핀 영
욕의 역사, 잘츠부르크Salzburg
(4)
27일 11시쯤 호엔붸르펜 성 도착. 텐넨산맥Tennengebirge과 하겐산맥Hagengebirge으로 둘러싸인 퐁가우Pongau 지역을 제압하는 것이 이 성의 형국이다. 113m의 암벽 위, 붸르펜 시가지의 북쪽 끝 경치 좋은 곳에 솟아 있다.
11세기 중엽 이후까지는 문헌에 언급되지 않는다는 호엔붸르펜성. 대주교 겝하르트(1060-1088)가 시작했으나, 그에 의해 완공되지는 않았다. 성은 1077년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되나 그 시기에 겝하르트는 황제 하인리히 4세의 박해로부터 도피 중이었기 때문. 긴 도피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1086년 이후 2년 남짓 더 살다가 1088년 여름 붸르펜성에서 죽은 겝하르트. 따라서 대략 12세기 초반부터는 겝하르트에 의해 임명된 성의 관리인들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비텔스 가문 출신의 대주교 콘라트 1세(1177-1200)에 의해 큰 규모로 중수되었고, 갖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른 호엔붸르펜성. 겉모습은 비록 투박했으나 내부 구조나 제도는 어느 성채 못지않게 짜임새가 있었다. 올라가면서 성벽 틈으로 내다보이는 회색의 텐넨 연봉들. 성의 모습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본격적인 투어를 시작하기 전 우리는 40분 동안 송골매, 올빼미, 독수리 등의 사냥 묘기를 관람했다. 그 옛날부터 이 성 주변에서 성행했다는 매사냥. 그것을 상품으로 만들어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들의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입장권에 표시된 매 관련 관광 상품은 두 가지였다. 매사냥 박물관Falknereimuseum, 매 사냥 시범 등이 그것. 세계 각지의 매들이 모두 모여 있는 매 사육장. 중국·몽골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은 물론 세계 각지의 매 사냥 관련 자료들이 망라되어 있는 박물관. 그러나 예전부터 매사냥이라면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던 우리나라의 자료들은 서운하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성에는 필그림, 잘차흐, 마돈나, 공작 꼬리 등을 비롯한 대략 9개의 타워들이 있었다. 모두 바깥을 내다 볼 수 있도록 만든 구조. 성 밖의 수려한 산들이나 민가들, 들판과 강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의 이점을 살리는 동시에 효과적인 성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든 듯.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시계의 정밀한 내부구조와 연결되어 정확도를 자랑하는 ‘큰 종탑Great Bell Tower’이었다. 일반 성당이나 교회의 그것과 같은 듯 했다.
성벽 틈 곳곳엔 밖을 향한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고, 총·석궁 등 각종 무기들을 전시해놓은 방도 여럿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성을 만든 자들의 의도가 ‘자기 보호’에 있었을 텐데, 몇 문의 대포, 몇 자루의 총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믿은 그들의 단견이 우스울 뿐이었다. 정작 1525년의 농민전쟁 때 격분한 농민들에 의해 대화재를 입은 뒤 16세기 중반 이후 요한 야콥Johann Jacob 대주교의 시대에 와서야 재 복구된 것을 생각하면, 언제나 적은 안에 있는 법. 밖으로 향한 대포로 안에 있는 적을 어떻게 쏠 수 있으리.
가장 충격적인 장소는 성내 감옥과 각종 고문도구들. 끔찍했다. 지하 9m 깊이의 감옥도 그러려니와 고문 받는 모습과 고통의 신음소리를 재현해놓은 방의 사실성은 소름이 돋을 정도. 지금은 인권과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선진국에도 그런 어두운 시절이 있었음을 비로소 목격하게 되었다. 중세의 고문도구들에 관해 많이 들어오긴 했으나, 실제로 목격한 것은 처음. 치 떨리게 하는 그 살벌한 모습들이란!
예수고상과 성모상을 모셔놓은 성당도, 가구들을 잘 갖춘 대주교의 거실도 보았다. 깊은 우물도 부엌도 있었다. 이젠 희미해진 벽화들도 그 시대의 영화와 꿈을 보여주고 있었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성채. 지금까지 수백 년을 잘 견뎌왔으니 앞으로 천년인들 못 견딜까. 이곳에 묻어있는 대주교의 세속적 욕망이 새삼 무서웠다. 당시의 대주교인들 어찌 양심과 양식에서 우리만 못했으리. 우리보다 교리도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더 잘 꿰고 있었을 것이다. 옳고 그름이 뭔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속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신의 뜻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우리 같은 범부들도 깨닫고 있는 삶의 덧없음을 깨치지 못했다니! 그렇다면 우리와 우리 주변에 명멸하는, 그 많은 성직자들에게도 그럴 개연성이 ‘다소간’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호엔붸르펜성에서도 모순과 역리의 ‘마지막 흔적’을 찾지 못했다. 모순과 역리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까.
***
아름다운 잘츠부르크. 그러나 옛 시가지는 거대한 바벨탑이었다. 아니 바벨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세트장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미래 지향의 ‘반면교사(反面敎師)’들을 발견했다. 어떻게 살아야 꼬인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종교와 세속의 경계는 무엇인가. 종교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이 착종(錯綜)된 현실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 해답을 잘츠부르크는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장중한 레퀴엠과 함께.
<계속>
**사진 위는 숙소에서 바라본 호엔베르펜성의 모습, 아래는 성 종탑에서 바라본 붸르펜 시가지와 잘차흐강
2005-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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