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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 [67] 스위스 제4신(3) : 리기쿨름Rigikulm, 재생을 위한 제의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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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2-30 00:30 조회 1,87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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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제4신(3) : 리기쿨름Rigikulm, 재생을 위한 제의

                       의 현장




 크루즈에서 돌아온 4시 반쯤 리기Rigi 전망대를 향해 루체른을 떠났다. 호반 도시들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서행. 출발로부터 한 시간쯤 후 가까운 붸기스Weggis에 당도했다. 운 좋게도 우리는 마을 초입의 스위스 가정에서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아름답고 넓은 침실과 주방, 꽃들이 피어있는 작은 정원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매력은 창문만 열면 하얀 알프스의 설봉들과 마을 앞 호수가 보인다는 것. 처음으로 스위스 주택의 맛과 멋을 경험하는 셈이었다.

 호숫가를 산책한 다음 저녁식사를 했다. 하루를 정리한 우리는 다음날의 쾌청한 날씨를 기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어딜 가나 들려오는 청랑(晴朗)하고 즐거운 ‘소 방울 소리’를 자장가로 삼아서. 스위스에서 가장 정겨운 소 방울 소리. 양들의 목엔 조막만한 방울이, 큰 소의 목엔 사발만한 방울이 매달려 움직일 적마다 ‘딸랑’ 혹은 ‘떨렁’거린다. 큰 규모의 목장은 아예 24시간 ‘소 방울의 오케스트라’가 열리는 셈이다. 스위스를 떠날 때쯤 사발만한 소 방울 한 개를 꼭 사겠노라 아내는 노래를 부른다. 아침에 일어나서야 집 뒤 켠에 작은 목장이 있음을 알았다. 


             ***


 15일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여니 안개가 자욱했다. 우리가 자는 동안 쉬지 않고 안개를 피워 올린 호수. 알프스 중턱까지 그득한 안개로 천지는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안개는 공중에서 구름으로 바뀌었다. 구름은 안개보다 훨씬 무거워 보였다. 음산한 날씨. 아, 리기쿨름Rigikulm에 올라 ‘발밑의 세상’을 내려다보려던 우리의 꿈은 안개가 부서지듯 무산되는 것인가. 불안했다. 그러나 그냥 포기할 순 없었다.

 아침식사를 대충 마치고 케이블카가 떠난다는 지점으로 차를 몰아 올라갔다. 그러나 실수로 그곳을 그냥 지나친 모양. 수직의 산에 만든 꼬불꼬불 산길은 아무리 올라가도 끝이 없었다. 산길을 가면서 거미들처럼 용케도 절벽에 둥지를 틀고 사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과연 행복할 것인가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았다. 부질없는 짓이다.

 가끔씩 곁눈질로 안개 가득한 천길 낭떠러지를 확인하면서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안개는 스멀스멀 나무숲 사이로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의 몸까지 휘감을 태세였다. 이 지역의 안개는 참으로 집요했다. 어제도 오후 3시나 되어서야 안개가 걷히고 해가 보였다.

 고도 때문에 고막이 구겨지는 느낌을 받은 곳으로부터 십여 분이나 더 올랐을까. 더 이상 차가 갈 수 없다는 표지가 나왔다. 간신히 주차한 다음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갈 길이 바쁜 나그네가 걸어 오를 수 있는 코스가 아니었다. 길이 매우 가파르고 험했다. 다시 차를 몰고 내려가며 더듬더듬 케이블카 출발점을 찾았다. 주차장의 빈 곳이 없을 만큼 관광객들로 득실거렸다. 이 안개 속에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보겠다고 몰려든 것일까. 의아해 하면서도 우리는 케이블카에 올랐다. 

 호숫가 마을 붸기스에서 해발 1453m의 리기칼트바트 역까지만 운행하는 케이블카. 비행기로 이륙하는 느낌이었다. 숲 속의 안개를 뿌리치고 올라갈수록 발밑은 깊고 넓은 운해(雲海)로 바뀌어갔다. 호수에 넘실대는 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홍수 때 방주를 타고 산 위로 도망치던 느낌도 이랬을까. 


             ***


 리기칼트바트 역에 도착하자 햇살이 강하게 내려 쪼였다. 음산한 아랫동네와 햇빛 찬란한 윗동네. 우린 한동안 넋을 잃고 운해를 내려다보았다. 아랫동네에 있을 때 우리는 햇빛 찬란한 윗동네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이제 비로소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짙은 운해에 갇힌 아랫동네를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 하나의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지상과 천상. 장관이었다. 세상에 꽉 찬 구름들이 부글부글 끓으며 천태만상을 빚어내고 있었다. 바로 우리의 발밑에서. 구름 덮인 아랫동네는 바로 내가 살다가 도망쳐 온 ‘발밑세상’이었다. 

 리기칼트바트 역에 도착한 산악열차를 타고 정상에 있는 리기쿨름 역으로 향했다. 10분 만에 슈타펠회헤 역, 슈타펠 역 등을 거쳐 리기쿨름 역까지 도달. 해발 1453m에서 1800m까지 단숨에 오른 것이다. 정상엔 하늘을 찌를 듯한 탑이 세워져 있고, 호텔과 레스토랑도 있었다.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노천 까페에 앉아 구름 덮인 아랫동네를 굽어보고 있었다. 

 햇볕 받아 따스한 이곳은 선계였고, 리기쿨름에서 신기한 표정으로 아랫동네들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은 신선들이었다. 구름 덮인 아랫동네. 우리가 돌아가야 할 현실세계를 내려다보면서 우리는 마음속의 찌꺼기들이 갑자기 정화됨을 느꼈다. 선계에서 속진(俗塵)을 정화시킨 우리. 그래서 리기쿨름은 제의(祭儀)를 행한 제단이었다.

 우리는 늘 제의의 현장에서 재생을 경험한다. 제의의 시공(時空)은 현실의 인간을 정화시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든다. 옛날의 선각자들은 왜 높은 곳만 골라 제단을 만들었는가. 단군 할아버지는 왜 높은 산만 골라 제단을 만들었는가. 교회들의 첨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엘리아데가 발견하여 보고한 ‘우주목(宇宙木)’이란 바로 신과 인간이 교감할 수 있는 교두보 아니던가. 그렇다면 오늘 이 리기쿨름 역시 단순한 놀이의 장소가 아니라 바로 신과 인간이 교감할 수 있는 교두보 혹은 우주산, 우주나무라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인간의 마음속에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내는 제의의 현장. 재생을 위한 정화의 시공임이 분명하다. 

 리기쿨름에서 구름 덮인 인간세계를 내려다보며 과연 나는 얼마나 정화되었는가. 나의 정체를 확인하고 찾았는가. 

 <계속>


**사진 위는 리기전망대 잔디밭의 사람들, 아래는 전망대 아래쪽에 가득찬 구름


200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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