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기 [68] 여행단상(3) : 아,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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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2-30 00:33 조회 1,798회 댓글 0건본문
*이 글은 10월 11일 밤 베른의 한 호텔방에서 썼습니다만, 그간 잊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올립니다.
여행단상(3) : 아,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여!
오늘, 스위스 베른 ‘뮌스터 교회’의 통로 벽 한 구석에서 한글 낙서를 보았다. 관광지의 한글낙서들. 유럽에 온 이래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래서 몇 자 적는다.
***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일이다.
학생감옥을 구경하기 위해 들어갔다. 그곳엔 수감되어 있던 학생들의 낙서와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예술이었다. 그것이 진정 관광대상이었고, 그곳의 재산이기도 했다. 휘갈겨 쓴 글씨들과 제멋대로의 그림들에는 학생들의 패기와 울분, 낭만과 치기(稚氣)가 듬뿍 배어있었다. 개인의 신상문제에서 사회·정치적인 문제, 사상 등 그들의 관심사항 아닌 것이 없었다. 그릴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은 듯 했고, 그림의 재료 또한 무궁무진했다.
거기서 우리는 ‘비극적인’ 씁쓸함을 맛보아야 했다. 그 사이에서 한글 낙서들을 다수 발견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일본글자도 중국글자도 영어도 없었다. 오직 한글만이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뿐인가. 한 층 위로 올라가자 벽엔 다음과 같은 경고문들이 붙어 있었다.
Please do not write on the wall
Bitte nicht auf die wande schreiben
감시카메라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낚서를 하면 처벌됩니다!!!
*두 번 째 독일어 문장의 다섯 번째 단어 ‘a'에는 움라우트 표기가 되어 있음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드디어 우리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구나. 세상에! 독일에서까지 우리의 국력을 인정해주다니. 저들이 우리 한글의 우수성까지 드디어 깨달았구나. 비록 ‘낙서’를 ‘낚서’로 잘못 쓰긴 했으나, 그게 무슨 상관이랴.
우리는 그 경고문 앞에서 한동안 망연자실해 있었다. 그 경고문 속엔 그렇게 많이들 다녀간다는 일본사람들의 글자도, 바로 우리 앞에서 이곳을 휩쓸 듯이 떼거지로 빠져나간 중국인들의 글자도 없었다. 하이델베르크이니 독일어 경고문이야 당연하고, 세계 공용어인 영어 경고문이 붙은 것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독일어와 영어를 빼곤 한국어만 남는다. 그렇다면 한글이나 한국어가 이곳 독일에서 제 2의 세계 공용어로 격상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한국인들만 툭하면 그곳에 낙서를 한다는 사실. 그곳의 당국자들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특별히 한국어 경고문을 써 붙인 것이었다.
부끄러웠다. 얼마 있으면 돌아올 한글날. 세종대왕께도 면목이 없었다. 우리들의 못 말리는 낙서벽(落書癖). 제대로 된 기록들은 남기지도 못하는 우리들. 그러면서도 어딜 가나 그릴 데 못 그릴 데 분간도 못하고 ‘개발새발’ 낙서들을 휘갈겨댄다. 당당하게 제 이름 석자를 걸고 말이다. 그래 그곳에 왔다 간 것이 그리도 자랑스럽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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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가지 상념들이 떠올랐다. 우리가 얼마나 낙서를 좋아하는 민족인가. 심지어는 가만히 있는 산 위의 바윗돌들에까지 쫓아다니며 낙서를 하는 민족 아닌가. 북쪽 산하의 모습들이 화면을 타고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우리 민족의 낙서벽은 북쪽 사람들이라고 예외가 아님이 드러났다. 경치만 좀 좋았다 하면 거대한 바위 위에 무슨 놈의 낙서들은 그리도 많이 휘갈겨 대는지, 통탄스러웠다.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 만세!’ 매일 방송이나 신문들을 통해서 밥 먹듯, 아니 숨쉬듯 내세우는 문구 아닌가. 구역질나도록 유치찬란한 어구들을 고결한 자연 속에 대문짝만한 글자로 파놓을 건 무언가. 금강산의 그 아름다운 바위에 새긴 낙서들. 그것 역시 못 말리는 ‘낙서벽의 소산’ 아니고 무엇이랴.
글자나 글은 꼭 써야 할 곳에 써야 한다. 써서는 안 될 곳에 쓰면, 아무리 고결하고 심오한 문구라 해도 그건 낙서에 불과하다. 우리의 조상들은 함부로 낙서를 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답사를 다니다 보면 명승지의 바위에 간혹 시구(詩句)들이 새겨져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건 그 경치에 합당한 문구,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문구들이다. 쓰는 사람 자신의 헛된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매한 후손들이 이 경치를 보고 떠올려 주었으면 하는 생각, 그것을 기록하려 한 것이다. ‘경애하는 민족의 태양’ 운운하는 유치찬란한 수준의 낙서가 아니란 말이다.
우리의 대통령들을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 사람들은 임기가 끝날 무렵이면 자기가 만들었거나 자기에 관한 기록들을 모조리 파기해 왔다. 뒤가 구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좋든 싫든 대통령의 통치기록은 한 나라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니 소중하게 남겨두어야 한다. 그런 것들은 파기하면서 각처에 개발 새발 남겨둔 친필 휘호들은 자랑스레 남겨두려 한다. 그럴 경우 그것들 역시 ‘낙서’의 수준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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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나도 기록을 좋아한다. 어딜 가도 항상 ‘기록하는 일’ 때문에 몸과 마음이 고달프다. 허무함 때문이다. 여행의 감동은 하루 이틀 만에 슬금슬금 기억의 창고로부터 빠져 달아나기 마련. 아름다운 기억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엔 여행 중의 괴로움이나 힘겨웠던 기억들만 괴물처럼 남는다. 나는 그게 싫다.
도망치는 여행의 추억들을 붙잡아매는 방법들 중의 하나가 기록이다. 사진도 있지만, 기록이 없는 사진 역시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잠시의 여행이라면 그림만 보고도 기억해낼 수 있겠지만, 길고 복잡한 여행에서 단편적인 정지화면만으로 추억을 되살릴 순 없다. 그래서 나는 한사코 기록하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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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내가 한사코 기록하려는 일 또한 부질없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척도를 갖고 있다. 모든 행위들 역시 그로부터 나온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닐 터. 그렇다면 내가 휘갈겨 대는 모든 글들. 책이나 논문, 단상들 모두가 한갓 낙서벽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여행 중에 지니고 다니며 해결해야할 또 하나의 화두(話頭).
‘나는 누구인가, 내가 쓰는 글들은 과연 낙서인가 아닌가?’
2005. 10.
스위스 베른의 호텔방에서
백규
**사진 위는 하이델베르크 학생감옥 내부에서 구경한 한국인 낙서들 중의 하나(*이 사진에는 쓴 사람의 실명이 들어 있는 관계로 혹 명예훼손의 우려가 있어 삭제합니다.), 아래는 하이델베르크의 학생감옥-낙서를 금지하는 한글 경고문
200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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