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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 [39] 독일 제8신(3) : 하이델베르크 고성, 누구를 위한 요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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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2-24 14:19 조회 1,74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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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8신(3) : 하이델베르크 고성, 누구를 위한 요새인가.



 구시가지에 흩어져 있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캠퍼스. 아름다움과 진지함, 그리고 미래에 대한 통찰이 번뜩이는 곳이었다. 구 시가지를 굽어보는 산중턱의 성채. 부분적으로 훼손된 흔적은 보였으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예술품 그 자체였다. 우리는 돌 포장길을 걸어서 경사진 그곳에 올랐다. 여러 겹의 문을 통과하고 나자 비로소 드러나는 고성의 속살. 그곳엔 옐츠성이나 코헴의 고성과 또 다른 하이델베르그 성만의 특성이 있었다. 누대에 걸친 왕실 문화의 전통과 전화(戰禍)의 흔적 또한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1225년의 문서에 이 성의 기록은 비로소 나타난다. 그러니 이 성은 13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었을 테고. 14세기 말(1392)부터 산마을의 주민들이 당시의 하이델베르크 신시가지(지금의 구시가지)로 이주하면서 중심가 그라벤가쎄Grabengasse로부터 비스마르크 광장에 이르기까지 도심이 확대되었단다. 그러니 15세기쯤엔 신시가지를 뺀 현재 하이델베르크의 규모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


 축성(築城) 이래 무수한 시련을 겪었으나, 크게는 서너 번의 참화를 겪은 산성. 윗부분이 파괴된 1537·1764년의 벼락, 1688-89년 팔츠공국 왕위계승 전쟁 중 프랑스군의 약탈, 1693년 ‘태양왕’ 루이 14세의 하이델베르크 재점령 등. 특히 루이 14세의 군대는 이 성을 철저히 파괴했다. 지금 문화국가의 허울을 쓰고 있는 그들도 한때는 문화재의 약탈과 파괴를 일삼은 자들이었다. 강화도에 상륙하여 빼앗아간 외규장각 도서들을 아직도 돌려주지 않고 있는 그들이다. 루브르에 가득한 유물들 대부분이 약탈문화재라는 것은 만인공지의 사실이다. 문화재는 집단 공동의 역사가 기록된 텍스트이다. 그러니 문화재를 약탈하거나 파괴하는 일이야말로 반문명적 야만의 극치다. 그런 자들에게 조만간 신의 저주가 있으리라!

 1697년부터 시민들은 고성의 재건에 팔을 걷어 붙였고, 선제후 카알 테오도어·카알 프리드리히 왕 등에 의해 하이델베르크는 복원되기 시작. 특히 프리드리히 왕은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재건하는 공을 세웠다. 프랑스로부터 도망쳐 온 샤를 그랍 폰 그랑빌에 의해 고성의 보존·소장품의 확충이 1810년부터 추진되었고,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신성동맹(神聖同盟)이 1815년 바로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그 뿐인가. 저명한 학자들이 몰려들었고, 그 가운데 야스퍼스 등은 대학의 재개를 위해 발 벗고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오랜 세월 ‘개인적·국가적·국제적’인 역량이 투입되어 고성과 대학을 포함하는 하이델베르크의 재건이나 복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 19세기 후반 이 성을 ‘완전히’ 복원하자는 논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논의는 실행되지 못했다. 말하자면 파괴된 부분은 파괴된 대로 멀쩡한 부분은 멀쩡한 대로 남게 된 것이다. 물론 ‘보존’에도 엄청나게 힘은 들겠지만. 바로 그거다. 옛 문화재를 복원한답시고, 옛 문화재들에 시멘트 떡칠을 해온 우리들의 ‘우행(愚行)’이 이 순간 떠오르는 건 무엇 때문인가. 


             ***


 고성 안 뜰에 섰다. 풍상에 마모되긴 했으나, 정교한 구조물과 조각품들은 붉은 색으로 살아 있었다. 중앙의 하인리히 궁, 왼쪽의 거울 연회관, 종탑 등. 그 시절의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장식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고딕 건물(주로 서쪽과 남쪽 건물), 인물장식이 그득한 르네상스 건물(주로 북쪽과 동쪽) 등 다양한 양식 또한 흥미롭다. 아마 오랜 기간 파괴와 복원이 반복되었다는 증거이리라. 

 르네상스 시대의 유물과 로만틱 시대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는 루프레히트 궁. 그 안에 전시된 유물도 유물이지만, 이 건물 입구 처마 부분의 쌍둥이 천사, 그들의 사연이 애잔하다. 우리에겐 무영탑에 얽힌 사랑의 설화가 있지만, 그들에겐 애틋한 ‘부정(父情)의 설화’가 있다. 매일같이 건축현장에 나와 아버지의 작업을 바라보던 쌍둥이 아들들. 그만 작업용 발판에서 떨어져 죽었고. 두 아들의 무덤에 매일 흰 장미를 꽂으며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아버지. 천사로 바뀐 두 아들을 꿈에서 만나고 쌍둥이 무덤에 꽂았던 흰 장미가 다시 피어난 모습을 확인한 뒤 힘을 내어 공사를 완성했다는 사연이다. 그래서인가, 장미 화환을 든 쌍둥이 천사들의 다른 손에는 건축사 아버지가 쓰던 ‘컴퍼스’가 들려 있다. 쌍둥이의 천진스런 표정이 가슴을 짠하게 한다.


             ***


 우리는 따로 돈을 내고, 고성 전속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성의 내부를 돌아보았다. 놀라웠다. 화려한 지배문화의 극치였다. 머리통만한 자물쇠로 채워놓은 방들. 안내인의 부리부리한 눈동자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귀한 물건들뿐이니. 어쨌든 이전에 들른 옐츠 성이나 코헴 성 등에서 보던 문화적 기품이 한 층 더 고양되는 느낌. 과연 나만 그런가. 

 단순·소박한 루프레히트 궁, 가장 화려한 오트 하인리히 궁, 성주의 방패 문장이 찬란한 거울 연회관, 루프레히트 궁의 낡은 예배당과, 그것에 연결된 성탑을 허물고 중수한 프리드리히 궁, 넓은 전망대 등. 모두가 그것들이 이루어진 시대의 미학과 꿈을 담고 있는 건물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잊을 수 없는 것은 지하실 ‘와인 저장고’의 대형 포도주통이다. 놀라운 건 시대가 지날수록 포도주통의 용량이 커졌다는 사실. 선제후 요한 카시미어는 12만 5천 리터, 칼 루트비히는 19만 5천 리터. 그러다가 1751년 칼 테오도어에 이르러 22만 1726리터로 늘었다. 길이 8.5m, 높이 7m의 참나무 술통. 그 위에서 춤을 출 수 있도록 했다. 앉은 자리에서 지하실의 술통으로부터 와인을 퍼 올릴 수 있는 장치까지 고안한 그들. 술통 맞은 편 벽에는 술고래를 상징하는 난장이 ‘페어케오’의 상이 부착되어 있고, 술통의 바로크식 목판에는 칼 테오도어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그 옆의 포도 분쇄용 대형 맷돌은 지금이라도 소리를 내며 구를 듯하고. 


             ***


 사슴이 뛰어놀았을 방목장과 궁정의 정원을 거닐었다. 전쟁과 평화, 음모와 사술이 교차하며 역사는 바뀌어 왔을 테고. 그 사이에 희생되었을 수많은 꿈과 목숨들. 전쟁과 평화의 차이는 무엇이며, 개인의 욕망과 대의명분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고성의 발밑에서 수만 년을 말없이 흘러내리는 네카강은 보았을 것이다. 콘라트·루트비히·루프레히트·루돌프·프리드리히 등등... 수많은 지배자들은 이름이라도 남아 있으나 대부분의 민초들은 어땠는가. 예컨대 1623년의 전쟁을 상기해보자. 왕으로 선출된 프리드리히 5세가 황제의 군대와 싸워 패배한 이 전쟁에서 하이델베르크 시민 75%가 죽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과연, 당시 지배자들이 꿈꾸던 이상향, 이루고자 한 낙원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


 전쟁과 평화의 이분법적 구도. 그 속에서 보는 고성은 분명 서사적 대상이다. 수많은 영웅들의 좌절과 영광이 교차하는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서사적 구도를 살짝 외면한다면, 고성은 다만 아름다운 하나의 서정적 피사체일 뿐이다. 그걸 느껴보고자 우린 다시 네카강으로 내려왔다.

 고성으로부터 네카슈타이나흐Neckarsteinach까지 두어 시간에 걸쳐 오르내리는 수백 톤의 크루즈 선. 비 뿌리는 날씨, 강바람이 차가왔다. 가난한 나그네의 얇은 외투 깃으로 네카강의 한기가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천천히 상류 쪽으로 올라가자, 울창한 숲 사이에 숨은 민가들이 주황색의 작은 점· 큰 점으로 아련히 나타난다. 아름다운 골짜기마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아름다운 마을들. 저 속에 깃든 사람들은 무슨 일들을 하며 무얼 먹고 사는가. 누가 들으면 ‘할 일 없는 녀석’이라고 욕깨나 먹을, 어리석은 질문이리라. 

 갑자기 떠오른 ‘도원경(桃源境)’의 설화. 강에서 낚시질 하던 어느 어부. 물에 떠내려 오는 복숭아꽃 이파리를 따라 올라가다가 작은 돌구멍을 만났다. 그곳을 통과하자 선경이 나왔다. 돌아온 뒤 다시 그곳을 가고자 했으나 찾지 못했다. 옛날이야기지만 그럴 듯하다. 나 또한 그 어부가 아닌가. 이 도원경을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경치 좋은 강가 숲에는 삐죽삐죽 옛 성이 솟아있고, 그림 같은 마을들은 점점이 흩어져 있다. 그 속에서야 필부필부(匹夫匹婦)·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겠지만. 지금 강가의 유람선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그 자체가 신선의 세계 아닌가.

 미학적 거리! 바로 그거다. 우리네 고달픈 현실도 제3자가 얼마쯤의 거리를 두고 보면 우리의 느낌과는 달리 생각될 수도 있을 터. 그래서 여행의 체험이 갖는 ‘객관성’이란 대부분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시각과 청각을 통해 현장학습을 한다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이미지로 남게 마련. 보는 자의 마음에 그려진 이미지와 객관성은 하등의 상관도 없는 법. 그래서 여행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행위일 뿐이다. 여행으로 얻은 ‘자기만의 이미지’를 남들에게 강요해선 안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


 강 위에서 바라본 고성. 서사적 대상이 서정적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의 어색함을 비로소 느꼈다. 세상사란 늘 그런 것. 형제·부부라도 내 문제 아니면 언제든지 객관화 시킬 수 있는 게 인간 아니던가. 고성! 역사의 굽이굽이 갈등과 투쟁 속에서 수많은 목숨들을 짓밟아온 향락과 살육의 현장. 그러나 유람선 갑판 위에서 바라본 그 성은 그냥 시와 노래의 소재요 대상일 뿐이다. 모순 덩어리, 하이델베르크 고성이여!

 <계속>


**사진 위는 하이델베르크 네카강 크루즈 선상에서 바라 본 고성의 모습,  아래는 고성의 와인저장고에 있는 세계 최대의 술통 모습 


2005-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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