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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 [60] 스위스 제1신(3) : 개혁과 자유의 시공(時空), 취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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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2-29 23:56 조회 1,69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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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제1신(3) : 개혁과 자유의 시공(時空), 취리히



 이들 대학에서 취리히의 학문적 자부심을 읽은 우리. 그 자부심의 또 다른 원천인 교회를 향했다.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츠빙글리, 그를 만나고 싶었다. 아니 그가 뿌린 씨앗이 스위스에 어떻게 뿌리내렸는지를 보고 싶었다.

 그로스뮌스터 교회. 카롤링 왕조 시절의 수도원에 기원을 둔 이 교회. 후기 중세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 수도원은 1523년 개혁교회에 흡수되고, 츠빙글리에 의해 이론 신학교로 전환되었다는 것. 말하자면 츠빙글리와 하인리히 볼링거의 종교개혁은 바로 이 교회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취리히 시가지의 중심에 우뚝 솟은 두 개의 첨탑은 그런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었다.

 멀리서 우리는 가톨릭 성당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니 종교개혁의 봉화가 오른, 신교 교회였던 것이다. 교회 앞은 뮌스터 광장, 광장으로 이르는 길에 츠빙글리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츠빙글리가쎄Zwingligasse라고. 내부 역시 단정했다. 스테인드글라스도 아름다웠다. 특이한 것은 아주 낡아서 분간하기 어려운 원색의 성모자상이 안치되어 있는 점이었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도 성모자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로스뮌스터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프라우뮌스터 교회. 원래 수도원이었으며 카롤링 왕조의 유적들도 많이 남아 있다는 이 교회.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었다. 특별히 마련된 공간에 샤갈Marc Chagall의 그림이 새겨진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다. 성서의 내용들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들이었다. 우리는 한 동안 넋을 잃은 채 거장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에 빠져들었다. 프라우뮌스터의 가치는 샤갈로 인해 훨씬 고양됨을 느끼면서 베드로 교회로 발길을 옮겼다. 

 역시 프로테스탄트인 베드로교회. 린덴호프Lindenhof의 로마시대 성채 근처에 있었다. 이 교회가 문헌에 언급되기는 857년의 일.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건물들은 전기 로마네스크 양식(800년),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1000년),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13세기), 후기 고딕 양식(1450년), 현대식 건물 등. 그러나 이 교회를 완성한 것은 취리히의 종교개혁가들이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첨탑에 큰 시계가 달려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문자판의 시계란다. 유럽의 그 많은 건물들을 일일이 재보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럴 듯했다. 아내는 ‘the largest face of the clock in Europe’이라는 소개문 속의 표현 때문에 많이 웃었다. 자다가도 웃길래 그 이유를 물으니 ‘큰 얼굴의 시계와 자신의 큰 얼굴’이 겹쳐 떠오르기 때문이란다. 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 

 

             ***


 로마시대부터 존재하던 삶의 공간 취리히. 7세기에 이르러 알레마니 공국의 지배를 받았고. 9세기 중반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왕이 프라우뮌스터를 수녀원으로 건립한 뒤부터 수녀원장은 재정에 관한 제반 권한을 장악했고. 그로부터 취리히의 수도원 지배 시대는 시작되었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제국의 자유도시가 된 취리히. 정치적·경제적으로 막강해진 시민계급은 1220년 다른 지역들에 비해 가장 이른 시기에 시청을 건립했고. 그 시점부터 귀족들을 중심으로 하는 상류층, 신흥상인들, 수공업자층 등으로 나뉘게 된 취리히의 신분계층. 1336년 새 헌법으로 길드 조합정부가 들어섬에 따라 이들 계층 간의 세력은 균형을 이루게 되었고, 1351년에 비로소 스위스의 연방과 동맹을 맺은 취리히. 1519년에는 그로스뮌스터 성당의 신부로 있으면서 자신의 교회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벌인 츠빙글리Huldrych Zwingli. 금융·경제의 중심지이자 종교개혁의 진원지인 취리히.

 취리히에서 경제와 종교를 풍요롭게 하는 바탕이 바로 ‘자유와 개혁을 통한 자기변신’임을 깨달은 우리. 취리히를 다시 찾으리라 다짐하면서 베른으로 달렸다. 

<계속>



**사진 위는 취리히-뮌스터다리 건너편에서 잡은 그로스뮌스터교회, 아래는 취리히-큰 얼굴 시계탑이 있는 성 베드로교회


200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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