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기 [48] 독일 제13신(1) : 지성의 도시 튀빙겐에서 횔덜린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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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2-24 14:34 조회 1,862회 댓글 0건본문
독일 제13신(1) : 지성의 도시 튀빙겐에서 횔덜린을 만나다
10월 5일 수요일, 날씨 흐림. 뷜Buhl의 호텔 게르마니아를 떠나, 봐일하이머Weilheimer의 패밀리아 샤바나(Familie Schabna)에 숙소를 얻음. 짐을 푼 다음, 집 앞 정류장(뵐하임켈튼그랍)에서 19번 버스를 타고 튀빙겐 네카브뤼케에서 하차.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시내 지도를 한 장 더 얻은 뒤 관광에 나섬.
10월 6일 목요일, 날씨 흐림. 어제 미처 보지 못한 횔덜린의 탑 내부와 튀빙겐대학 박물관을 관람.
플라타너스 길, 횔덜린 뮤지엄, 부르제(튀빙겐 대학 캠퍼스), 네카 노천탕, 슈티프트 교회, 고성 가는 길, 호엔 튀빙겐 성, 마르크트 광장의 넵튠 분수와 시청건물, 야곱교회, 빌헬름 슈티프트 신학원, 학생감옥, 홀츠 마르크트 광장과 성 조지 분수, 튀빙겐대학의 옛 본부인 알테 아울라 등등, 이틀 동안 돌아본 튀빙겐 코스. 충분치는 않으나 튀빙겐에의 갈증을 대략 해소시킬 수는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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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형! 나는 지금 튀빙겐에 있소. 한 번도 밟아본 적은 없지만, 내가 하이델베르크와 튀빙겐을 좋아하는 줄을 형은 알고 있을 것이오. 이 도시들의 분위기. 막연하나마 내가 꿈꾸어온 이상이 아닐지.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곳들을 선망할 것이오. 물론 그 속에도 현실적인 문제들이야 없지 않겠지요.
대학인들이 꿈꾸는 파라다이스를 형도 잘 알지 않소? 그런 점에서 나는 지독한 이상주의자이면서 현실에서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하는 모순적 존재일 수밖에 없소. 어느 경우는 분열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갈 때가 있소. 우리의 현실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함을 잘 알면서도, 왜 나는 자꾸만 이상을 추구하려 하는지 내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오. 한때는 나도 ‘이상주의자’라는 렛텔을 혐오한 적이 있었소. 현실에 발붙이고 잘 살아가는 사람을 이상주의자라니!
그런데 살면서 생각하니 그게 아니었소. 많은 사람들이 득실대는 넓은 세상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오. 그들이 갖고 있거나 누리고 있는 것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우리에게 없는 것들이었소. 불공평한 세상. 어떤 이들에겐 당연한 현실이 다른 이들에겐 꿈과 같은 것들도 있을 수 있지 않겠소? 그런 점에서 나는 이상주의자이면서 현실주의자요.
어쨌든 형의 짐작대로 나는 이곳들을 들렀소. 독일 서남부의 여정. ‘하이델베르크-슈파이어-바덴바덴-칼브-헤렌버그-튀빙겐’은 우리가 ‘흑림지대’라 부르는 슈바르쯔발트Schwarzwald와 일부는 겹치고, 일부는 그것과 나란히 달리는 코스였소. 정말로 아름다운 노정이었소. 자연과 인공의 적절한 배합, 아니 자연과 맞추어 살아가려는 이곳 사람들의 생각이 두드러지는 코스였다고 보면 될 것이오. 강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도록 놔두는 것.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삶의 질을 높이려는 것.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최상의 길일 것이오.
이 지역들의 아름다움. 그 경탄은 곧 이어 넘어가게 될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코스에 이르면 아마 정점으로 치닫겠지요. 사람들의 경험담에 바탕을 둔다면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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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형! 짧은 시간, 튀빙겐에서 확인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인문주의적 대학정신이오. 결국 대학을 중심으로 이 도시들이 수백 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문주의 덕분일 것이오. ‘인문’이란 별것 아니지요. 바로 ‘사람 중심’이란 겁니다. 천년이 넘는 도시의 기반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이들의 모습. 그건 그 속에 깃든 정신을 중시하기 때문이란 사실을 깨달았소.
어째서 집을 한 번 지으면, 성을 한 번 쌓으면, 도로를 한 번 포장하면 수백 년을 지탱할 수 있을까요? 그게 단순히 기술의 힘이라고 보시는지요? 관공서를 짓든 주택을 짓든 십수 년 만에 와장창 깨버리기를 자랑스레 반복하는 우리의 천박함. 그 문화에 절어온 나로서는 참으로 신기하기만 한 일이었소. 5천년의 역사를 늘 자랑하는 우리. 그런데 남은 게 없소. 사실 전쟁도 우리만 겪은 게 아니지요. 다니면서 보니 이들도 전쟁의 참화는 무수히 겪었습디다. 이들과 우리의 차이라면 고비마다 일치단결하여 문화와 정신의 파괴만은 막아보려는 의지와 실천이었소.
파괴와 재건, 그런 과정 속에 빛나는 건 바로 인문주의적 지성의 힘이었소. 그 속에 담긴 철학이었소. 만약 이들이 우리처럼 망치와 장도리만 들고 설쳤다면, 그들 역시 지금의 우리와 같은 어리석음을 아마도 수백, 수천 년간 반복하고 있을 것이오. 사실 우리가 그들보다 못난 건 하나도 없소. 다만, 그들과 달리 우리는 인문주의적 지성의 힘을 상실했다는 것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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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시오. 사설이 너무 길어진 것 같소. 나는 구시가와 신시가를 가로지르는 네카 강변의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길을 걸으면서 많은 상념들을 떠올렸소. ‘이 길을 어쩌면 헤르만헤세도 천재시인 횔덜린도 대철학자 헤겔도 걸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오. 이곳에 오기 전에 들른 칼브. 그곳 출신의 문호 헤르만헤세는 이곳에 지금도 남아 있는 헤켄하우어 서점의 점원으로 일했었지요.
네카강은 참으로 신비합디다. 독일의 강물은 대체로 흐려요. 어제 오늘도 상류 쪽에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흙탕물이 그득 흐르고 있었어요. 물은 흐리지만 하이델베르크를 아름답게 한 것도 바로 네카강이었어요. 그런데 그 강이 튀빙겐에 와서도 그와 비슷한 문화를 이룩했거든요. 라인강, 모젤강, 네카강, 도나우강 등. 강을 따라가면서 형성된 문화는 어쩌면 독일의 힘을 상징하는지도 모르겠소. 흙탕물 네카강에는 어제도 오늘도 튀빙겐 대학생들이 젓는 작은 배(슈토퍼칸)들이 관광객을 태우고 오르내린단 말이오. 변함없이.
네카브뤼케를 건너 횔덜린트룸Holderlintrum을 찾았소. 지금은 횔덜린트룸 즉 횔덜린의 탑이라 불리고 있지만, 13세기 이래 이 도시의 남·북 경계선이자 성채의 한 부분으로 세워진 탑이오. 네카브뤼케로부터 약 150m쯤 강을 따라 올라가면 이 탑이 있지요. 1770년생인 횔덜린이 37세 나던 1807년부터 그가 죽던 1843년까지 이곳에 살았으니 장장 36년 동안을 이곳에서 지낸 것이지요. 정신착란증으로 고생하면서 말이오.
3유로씩 입장료를 내고 탑에 들어가니 2층과 3층의 여러 방에 그의 육필원고들과 출판 자료들,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소. 성우들이 낭송한 그의 시들을 직접 들을 수 있도록 녹음테이프도 준비되어 있고요. 창밖으로 네카 강을 바라보며 시심을 다독였을 횔덜린. 흘러가는 물을 내려다보며, 정신착란증에 괴로워하던 그의 고독이 손에 잡힐 듯 했소. 절대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몹시 서운하긴 했지만. 흡사 정신착란으로 울부짖는 횔덜린을 골방에 쳐 박아 두고 나오는 기분이었소.
<계속>
**사진 위는 튀빙겐 시내 플라타너스 길, 옆으로는 네카강이 흐르고 강변에는 횔덜린투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밀집해 있음. 아래는 횔덜린투름(정신착란에 걸린 천재시인 횔덜린이 36년간 살았음. 네카강변에 있고 현재는 횔덜린 뮤지엄으로 사용되고 있음
200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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