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기 [40] 독일 제8신(4) : 네카 강과 무릉도원, 철학자의 길과 이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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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2-24 14:20 조회 1,893회 댓글 0건본문
독일 제8신(4) 네카 강과 무릉도원, 철학자의 길과 이상향
9월 29일. 나는 철학자의 거리를 걷고 싶었다. 그러나 이날 하이델베르크는 궂은비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가. 호텔에 돌아와 자면서도 그 생각뿐이었다. 언제 다시 하이델베르크에 올 수 있단 말인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존재의 의미와 나의 정체성’을 질기게 추구했을 철학자들이 걸었을지도 모르는 그 길을 나도 걷고 싶었다. 아니 느끼고 싶었다. 그게 아마도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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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 하이델베르크를 떠나는 날. 나를 놀리듯 날씨는 너무나 화창했다. 도저히 그냥 떠날 순 없었다. 그래서 다시 구시가지로 향했다. 옛날 다리 알테브뤼케Alte Brucke를 건넜다. 쌍탑의 다리 문 옆에 거울을 들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원숭이. 반가운 표정이다.
다리를 건너자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란 표지가 나온다. 구 시가지의 도로들처럼 돌로 포장된 가파르고 좁은 길. 옛날 다리 쪽 초입의 길은 흡사 좁은 굴 모양이다. 올라갈수록 고성은 손에 잡힐 듯 또렷해지고, 구시가지 또한 정겨워진다. 무성한 나무숲, 각종 들꽃, 담쟁이 덩굴도 자라고 있다. 누군가 심어놓은 장미는 빨갛게 피어있고, 이름 모를 하얀 꽃은 지천으로 널려 있다. 익어가는 산딸기도 몇 알 보이고, 소담스런 열매를 맺은 땅꽈리도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밤나무의 밤도 영글어 떨어지고 있구나. 과일 나무 곁에만 가면 과일을 따내고 줍는 우리네처럼 그들도 열심히 밤들을 따거나 줍고 있었다. 곁에서는 강아지만한 청설모(다람쥐?) 한 마리가 근심스레 그들을 쳐다보고 있다. 아마도, 겨울 양식을 약탈해가는 사람들이 야속했으리라. 비탈에는 염소들 몇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다.
길을 따라가니 작은 정원이 나왔다. 빨강·노랑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곳에 요셉 폰 아이헨도프Joseph von Eichendorff(1788-1857)의 얼굴과 약력이 새겨진 작은 돌비가 서 있었다.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공부한 로맨티시즘의 시인 아이헨도프. 네카 강변의 낭만을 읊은 법학 전공의 시인 빅토 폰 쉐펠과 함께 철학자의 길에 족적을 남긴 아이헨도프. 하이델베르크 시민들은 그들을 철학자의 길에서 떠올리고 싶었을 것이다.
작은 정원의 윗길. 1620년 마테우스 마리안(1593-1650)은 이 길에서 하이델베르크 고지도를 그렸다. 나도 거기에선 하이델베르크 시가지를 그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쉽지 않은 일을 디지털 카메라가 대신했지만. 철학자의 길이 끝나는 곳. 알테브뤼케 앞의 강변에 하이델베르크 시가지도가 세워져 있다. 산 쪽에는 고지도가, 강 쪽에는 요즘의 지도가 그려져 있고, 건물과 거리 이름들도 적혀져 있다. 어쩌면 그 고지도는 마테우스 마리안의 작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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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을 걸으며 그 옛날 하이델베르크의 교수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 길을 칼 야스퍼스도, 칼 만하임도, 헤겔도, 가다머도 걸었을 것이다. 어쩜 대학 재건의 기치를 내건 야스퍼스가 가장 애용한 길이었을지도 모르지. 물론 ‘철학자의 길’이라 하여 철학자들만 걸으란 법은 없을 것이다. 문외한인 나도 걷고 있지 않은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결국 ‘나를 찾는 학문’ 아닌가. 나 자신의 정체성도 확인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찌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아름다운 하이델베르크의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자기 정체성에 대해 많은 회의와 모색을 반복했을 것이다. 그것이 자라나 학문적 체계를 갖추었을 것이고. 그럴 수 있었던 그들이 부럽다. 마음껏 글을 읽고 사색하고 책을 쓰고, 뛰어난 학생들을 만나 담론을 공유하고... 틈틈이 이 길에 올라 아름다운 시가지를 내려다 보고...
왜 이 길이 ‘철학자의 길’로 명명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알아보고 싶지도 않다. 누구는 관광의 수단으로 개발한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상관은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걸었고, 그 길에 ‘철학자의 길’로 명명한 그들의 마음을 배우고 싶다. 철학자의 길을 걸으며 하이델베르크의 낭만적 열정을 느꼈으니, 이곳 공부는 이쯤 해 두어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다음 행선지 슈파이어Speyer로 떠난다.
<계속>
**사진 위는 철학자의 길 가든에 세워진 요셉 폰 아이헨도르프의 시비, 아래는 철학자의 길에서 건너다 본 시가지-고성과 예수회교회
2005-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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