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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 [116] 체코 제2신(3) : 피비린내로부터 승화된 문화와 예술의 자부심, 프라하의 향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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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03 14:18 조회 55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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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제2신(3) : 피비린내로부터 승화된 문화와 예술의 

                     자부심, 프라하의 향기(3)



 다리를 지나 구시가 광장Old Town Square, Staromestske namesti으로 들어가는 길.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되고 부유한 거리가 이곳이다. 최소한 9세기부터 열린 것으로 추정되는 국제 시장 구역. 아랍 상인 이브라힘 이븐 야곱Ibrahim Ibn Jakob은 10세기 경 바로 여기에서 활약한 사람이었다. 구시가지 주요 도로를 따라 즐비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건물들. 대강 헤아려도 70개가 넘었다. 그 건물들이 세워질 당시 구시가는 메지라디Mezihrady 즉 ‘성들 사이의 구역’으로 불렸다고. 다시 말하면 프라하 성과 오늘날의 ‘구시가 광장’에 번성하던 국제 시장 사이의 구역이란 말이었다.

 드디어 만난 구시가 광장. 드넓은 그곳에서 우리는 체코, 혹은 프라하 역사의 핵심에 서 있는 인물 얀 후스Jan Hus와 만났다. 광장의 중심, 1680년 이래 마리아의 탑이 서 있던 자리였다. 그 자리에 아르누보 건축가 살로운L. Saloun이 1915년 얀 후스의 동상을 세웠다. 마리아 대신 얀 후스가 이곳에 들어선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보헤미아 출신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프라하의 어딜 가도 그의 그림자는 어른거렸다. 그가 서 있는 구시가 광장은 프라하의 중심이자 체코의 중심. 타락의 길을 걷던 구교와 이에 대항하던 양심적 사제들과 학자들. 그리고 구교에 주된 바탕을 두고 있던 지배세력과 체코 민족세력 간의 갈등. 모두오늘날의 체코를 있게 한 격변의 요인들이었다. 

 우리는 얀 후스의 행적을 좀더 소상히 알기 위해 베들레헴 교회Bethlehem Chapel를 찾았다. 원래는 구교의 교회였겠으나, 지금은 개신교회. 1, 2층 모두 얀 후스의 뮤지엄으로 꾸며져 있었다. 체코 종교개혁 운동의 초석을 놓은 곳이 바로 이 교회다. 그 개혁의 방향은 1348년 카를 황제가 세운 카를대학교와 연계되어 있었고, 얀 후스는 1409년 이후 이 대학의 교수였다.

 원래 이 교회는 대중의 가장 큰 집합장소로 쓰였다고. 많을 땐 3천명까지도. 이 교회에서 대중들에게 설교를 하던 후스. 그는 설교를 통해 밀리에Milie, 마테이Matej,  영국의 종교개혁가 위클리프John Wyclif 등의 견해를 따랐다. 화형 당하는 후스의 모습을 그린 그림 등이 예배당의 북쪽 벽을, 성경에 나오는 장면을 그린 그림 등이 남쪽 벽을, 그리고 성가들이 서쪽 벽에 가득 했고. 동쪽엔 후스, 마틴Martin, 스타섹Stasek 등의 위업을 설명한 석판이 세워져 있었으며, 가운데 부분엔 후스가 설교하던 강단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면죄부를 판매하던 당시의 썩은 교회. 이에 반기를 들고 나선 종교개혁가들. 체코 종교개혁의 중심에 그가 서 있었다. 끝까지 타협하지 않은 채, 불타 죽은 후스. 죽으면서도 “우리 주 예수님! 당신을 위하여 이처럼 잔인한 죽음을 아무런 불평 없이 감당하오니,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내려주소서”라고 간구한 후스. 그의 죽음은 종교개혁 뿐 아니라 체코 민족주의에 결정적인 활력을 불어 넣었다. 


<계속>


**사진 위는 베들레헴 교회의 야경, 아래는 베들레헴교회 내부 그림-화형 당하는 얀 후스


200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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