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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 [164] 에피소드 6 : 부다페스트 부인과 병원을 헤맨 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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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04 14:38 조회 92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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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다페스트 부인과 병원을 헤맨 백규



 여행 두 달 여에 1만 km 가까운 거리를 운전했다. 그 때문인가.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부터 엉덩이가 약간씩 짓무르기 시작했다. 준비해간 연고도 발라 보고, 운전 자세를 바꾸어도 보았으나 좋아지지 않았다. 운전을 안 할 수도 없고, 운전을 하지 않는다 한들 차에 누워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문제가 커지기 시작한 건 프라하. 

 ‘차마 말할 수 없는 부분’에서 야릇한 불쾌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 부분에 통증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 터라 일순 당황했다. 더구나 이곳은 ‘이역만리’ 타국, 그것도 우리가 ‘업신여겨 마지않았던(?)’ 동유럽 아닌가.

 몇 년 전 미국에서, 아내의 몸이 불편하여 병원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힘겹게 병원을 찾아 진찰을 받은 후 처방전으로 약국에서 약을 사보니, 고작 항생제 두어 알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병원진료를 받기도, 약을 사기도 까다롭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우리였다. 우리나라야 골목마다 병원이요 약국이니 찾아가기 쉽고, 원하기만 하면 주사를 꾹꾹 놓아주니 그 얼마나 ‘의료천국(?)’인가. 의약분업의 제도가 정착되어 약간 불편하긴 하지만, 새삼 ‘고국’의 의사들이 그리워졌다.^^


             ***


 프라하에서 좀더 일찍 병원에 갔더라면 좋았을 걸. 우리는 ‘어떻게 적당히 해보려는’ 못된 본능이 작동하여 약을 써보기로 했다. 그러나 약 이름을 알 수가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사에게 그곳을 함부로 까 보일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외과 개업의인 막내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전화선으로 들려오는 그 녀석의 걱정이 오히려 불안했다. 

 복잡한 약 이름을 적은 종이쪽을 들고 간신히 약국을 찾았다. ‘혹 의사의 처방전을 요구하면 어떻게 하나’ 불안해하면서. 다행히 그 약은 처방전 없이도 판다고 했다. 그러나 별무효과였다. 그저 열심히 약을 바르고 좌욕이나 하면서 버텨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악화일로! 폴란드와 슬로바키아를 거치면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폴란드의 인터넷 까페에 들러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미국인 부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부다페스트의 전문병원을 좀 찾아달라는 내용으로.

 그들은 헝가리에 살고 있었다. 처음으로 보내는 이메일에 언급하기 무안한 병명까지 적었으니, 우리가 다급하긴 했던 모양이다. 하루가 지나 미국인 부부의 답신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 병 전문의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어가 통하여 외국인들이 잘 찾는 병원이라면서 주소와 병원 이름을 보내왔다.

 부다페스트의 인포센터에 도착한 것이 오후 2시쯤이었다. 관광정보나 호텔정보는 뒷전이었다. 무엇보다 미국인 부부가 알려준 병원을 물었다. 그러나 부다페스트가 좀 넓은가. 그들은 한 이십여 분 간 이곳저곳 헤매더니 겨우 찾아 알려준다.

 시가지 외곽 먼 곳이었다. 정신이 아득했다. 지도를 보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도 끔찍한데, 또 길을 찾아 나서란 말인가. 해당분야 전문의가 있는지도 모르고, 진료신청이 가능하다는 3시 전에 도착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복잡한 도심을 뚫고 그곳에 가본들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병원을 소개 받아 헤맬 가능성이 훨씬 컸다.

 한술 더 뜨는 것은 인포센터의 직원이었다. 우리에게 사회보장 카드가 있느냐고 그는 물었다. 없다고 하니 진료비가 엄청 비쌀 거라고 겁(?)을 주는 게 아닌가.

 그러나 부다페스트만 믿고 달려온 우리였다. 여기서 좌절할 순 없었다. 그래서 다시 그들의 도움을 청했다. ‘우린 한국에서 중요한 사명(?)을 띠고 온 관광객, 지금 급한데 이러이러한 분야의 전문병원을 이 근처에서 좀 찾아줄 수 없느냐?’고. 

 그들의 판단이 어떻게 내려졌는지, 센터 안의 고참까지 나서서 이곳저곳에 다이얼을 돌리고 알 수 없는 헝가리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 후 그들은 병원명과 주소, 지하철 타고 가는 법까지 자세히 적어주었다.

 그곳에 도착하니 3시 직전이었다. 대기실엔 여자들만 득실거렸다. 헝가리에서 그 병은 여자들에게만 생기나? 약간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사무원은 영어를 한 마디도 몰랐고, 딱히 물어볼 데도 없었다. 손짓 발짓으로 가서 앉아 기다리라는 의사만 겨우 전달받을 수 있었다. 한 구석에 앉아 하염없이 그녀가 불러주기만 기다릴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은 흐르고, 여자들은 자꾸만 밀려들어오고, 사무원은 우리를 본체만체했다. 불안했다. 한 시간 가량 기다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마침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하나가 들어왔다.

 가서 물었다. ‘도대체 이곳이 무얼 하는 곳인데 이렇게 여자 환자들만 득실거리나? 우리는 한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사무원은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해놓고 감감 무소식이다.’ 라고 했더니, 그는 대뜸 ‘이곳이 부인과 병원’이란다. 아뿔싸! 그러면 그렇지. 여자들만 그득한 게 어쩐지 좀 이상하드라 했지.

 그 의사에게 사정을 말했다. 그러자 그 병원 구내의 다른 건물을 알려주었다. 진료 신청 시간이 지났을지 모르니 그곳으로 전화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이스한 그는 쾌히 휴대전화로 그곳에 연락해주고 메모까지 해주었다.

 뒤통수에 따갑게 꽂히는 헝가리 여자들의 눈초리를 느끼면서 황황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우리에게 사회보장 카드를 요구한다. 진료비 때문이라고 판단한 나는 ‘현찰로 지불할 테니 걱정 말고 진료나 받게 해달라’고 크게 소리쳐 말했다. 그들은 내 패스포트의 넘버를 적고나서 신경외과병동으로 가라고 했다.

 환자들 십여 명이 대기 중인 신경외과 앞 복도. 시간이 흘러도 대기환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간호사인 듯한 사람들은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딴 일 보기에 바빴으나, 사람들은 참을성 있게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간혹 대기 환자 이외의 사람들이 찾아와 먼저 진료를 받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어떤 이들은 기다리다가 지친 끝에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항의를 하는 듯도 했다. 아, 이 후진국, 혹시 급행료가 필요한 것 아닐까? 다급했던 우리의 괜한 생각이었다. 

 오후 5시가 넘자 사방은 깜깜해지고, 내 이름은 호명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숙소를 잡아야 하고, 부다페스트 정보도 얻어야 했다. 그런데, 이토록 헛되이 시간이나 보내게 하다니. 성질 급하기야 헝가리 사람들 못지않은 나였다. 하는 수 없이 꽉 닫힌 진료실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곳엔 이미 다른 환자 한 사람이 의사들에게 항의를 하고 있었다.

 샤프하게 생긴 젊은 의사 둘이었다. 그들은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하나는 췹Chief, 다른 하나는 보조쯤 되어 보였다. 나는 항의와 호소를 반쯤 섞어 사정을 말했다. 그 덕인가. ‘실력을 알 수 없는’ 헝가리의 젊은 닥터들에게 나는 엉덩이를 ‘까 보일’ 수 있었다. ‘몹시 아팠겠다’고 위로해주는 그들의 말에 우선은 마음이 좀 놓였다.

 내 상태를 관찰한 그들은 잠시 숙의하더니 처방을 내주었다. 그런 다음 30분 넘게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컴퓨터와 프린터는 모두 구형이었다. 게다가 반 페이지쯤 작성하다가 지워버리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그러니 그토록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그 뿐인가. 헝가리에선 이제 막 휴대폰 시대가 열린 듯, 사람들 모두 휴대폰을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휴대폰은 진료 중에도 수시로 걸려왔다. 환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화에 대고 할 말 다 하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어쨌든 처방이 내려졌다. 우리나라의 일부 의사들처럼 주사 한 대 ‘꽝’ 놓아주고 한 주먹의 약을 처방해줄 것으로 기대한 나였다. 어쩌면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방전은 의외로 간단했다. 먹는 약 달랑 한 가지였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주책도 없이 주사는 안 놓아 주느냐 물었다. 그러자 그 의사는 주사가 왜 필요하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이 약을 일주일 동안 먹어보고 안 나으면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진료비는 어디서 내는지 물었다. 그러자 ‘진료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으나, 어쨌든 진료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케이스란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더 묻지는 않았으나, 감격스러웠다. 처음 들어온 헝가리에서 대접받은 느낌이었다. 잠시 전까지 ‘후진국’ 어쩌고 하며 불평을 늘어놓던 우리였다.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약국의 약도까지 자세히 그려주면서 빨리 낫기를 바란다는 말까지 덧붙이는 그들이었다. 컴퓨터는 구형이고, 아직 도트프린터를 사용하고는 있었으나 이 젊은 의사들은 바로 헝가리의 밝은 미래였다. 의사 두 명이 환자를 차례로 관찰한 다음 함께 의논하여 내리는 처방 또한 충분히 신뢰할 만 했다. 

 숙소에 돌아와 약을 먹고 나자 그날 밤으로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약간은 무뚝뚝하고 성질 급해 보이는 헝가리인들. 시내에서도 과속을 일삼고, 횡단보도에서도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모습이 한국인들과 흡사한 헝가리인들이었다. 그러나 언뜻언뜻 내비치는 이들의 속내는 무척이나 정겨웠다. 기대하지도 않은 무료진료 한 번에 ‘녹아서’ 하는 말은 아니다. 전혀 몰랐던 헝가리, 그 중에서도 부다페스트의 한 복판. 이 복잡한 거리에서 우리는 작지만 큰 공감의 영역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일주일이 어쩌면 매우 유익하고 즐거운 기간이 될 것만 같은 기대를 갖게 한 ‘병원 해프닝’이었다.


<계속>  


**사진 위는 부다페스트의  암불란스병원의 젊은 의사, 아래는 병원에서 받은 진단서와 처방전


2005-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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