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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기 [1] 유럽문화 답사에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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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12-24 13:13 조회 66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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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문화의 답사에 나서며

 

 

 

조선 후기의 걸출한 실학자 담헌 홍대용은 연행 길에 나서면서 다음과 같이 큰 소리를 쳤다.

 

 

대저 작은 일을 즐기고 큰일을 모르는 자는 가슴 속에 품은 호준(豪俊)한 뜻이 작기 때문이오, 좁은 곳을 평안히 여겨 너른 곳을 생각지 않는 자는 원대한 도량이 없기 때문이라. 이런 까닭에 장주(莊周) 말하기를 여름 버러지와는 족히 더불어 얼음을 이르지 못하고 우곡(迂曲)한 선비와는 족히 더불어 큰 도를 의론치 못하리라고 했으니, 우리나라가 비록 예악문물이 소중화(小中華)로 일컬어지긴 하나 백리에 달하는 들판이 없고 천리를 흐르는 강이 없으니 땅덩어리의 비좁음과 산천의 막힘이 중국의 한 고을에도 못 당하거늘, 사람들이 그 가운데서 눈을 부릅뜨고 구구한 영리를 도모하고 팔을 흔들어대며 소소한 득실을 다투어 천하에 큰 땅이 있는 줄 모르니 어찌 가련치 아니하리오.”(<<을병연행록>>에서)

 

 

내 비록 못 났으나, 호랑이의 위세를 빌어 으스대던 옛날의 어떤 여우마냥 담헌 선생의 경지에 마냥 의탁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보라, 지금은 세계화의 시대. 천하는 이미 지구촌으로 축소되었다. 외국 나가길 어릴 적 이웃집에 마실 가듯 하는 세상이다. 이웃 사람이 하루 이틀 안 보인다 싶으면 중국이요 미국이며 호주에 가 있는 요즈음이다. 옛날 통일신라 시절 최치원이 중국 유학에 나선 것이 12살 때 일이었다. 그러니 요즘 젖 떨어진 아이들 조기유학떠난다고 비아냥거릴 일만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의 시계(視界)는 세계를 포괄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미국에서 공부하던 유길준 선생은 유럽을 순력(巡歷)하며 얻은 견문을 전 24편의 <<서유견문(西遊見聞)>>으로 펴낸 바 있다.

스물아홉의 유길준이 미국에서 유럽으로 떠난 해가 1885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 다 늦은 21세기 초입에 유럽 기행을 떠난다하여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아직 엄마 품을 떠날 나이도 아닌 애기들이 손을 흔들며 비행기에 오르는 마당에, 오십을 바라보는 중늙은이가 느지막이 서유(西遊)’좀 하는 게 무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나는 최근 문사 정은제의 글에 거친 서평을 한 꼭지 써준 일이 있다. 그 앞부분에 가로되,

 

 

사실 개인의 행복이나 가치야말로 틀에 박혀 획일화된 세상의 규범 속에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나의 개성에 있음을 깨닫지 못한 채 죽어 가는 우리들! 그 얼마나 불행한 존재들인가. 인간의 자아는 다양한 세계이며 작은 우주, 아니 가능성의 카오스 그 자체임을 헤르만 헤세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에서 큰 목소리로 외친다. , 분명 헤세 이 양반은 잃어버린 그의 자아를 제대로 찾은 것이렷다? 대체 그는 어떤 방법으로 찾았을까. 확실한 건 모른다. 허나 그의 생애가 본격 전환되기 시작한 것은 독신생활과 방랑으로부터였다. 가족을 떠나 동방을 여행하면서 삶의 진실에 눈을 떴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말하자면 잃어버렸다고 생각되는자아를 찾기 위해 방랑과 일탈을 선택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의 범생이들은 그저 어른들이 만들어준 규범의 틀을 지키는 일에 충실할 뿐이다. 진정한 자아가 무언지 찾아볼 엄두도 못낸 채 살아가는 것(=죽어가는 것)을 상도(常道)로 여긴다. 그런 점에서 명상을 통해 잃어버린 나를 찾은 크리슈나무르티는 또 얼마나 정적(靜的)이고 동양적인가? 헤세가 움직임과 일탈을 통해 진정한 자아와 동양적인 것을 찾아냈다면, 크리슈나무르티는 지극히 동양적인 방법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 보여주었다. 이들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과 정()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 된다. 그래서 둘은 원래 상극이지만 상생으로 통합을 이루는 것이다.

사색이나 명상 없이 떠돌아다니기만 하는 것은 여행이 아니라 방황이다. 또한 가부좌만 틀고 앉아 있다하여 사색이나 명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여행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것들을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색을 통해 가능하고, 독서와 사색을 통해 형성된 관념의 구체화는 여행을 통해 가능하다. 그래서 명상과 여행은 잃어버린/잊어버린자아의 발견을 가능케 하는 행위들이다.”

 

 

그렇다. 나도 자아를 찾기 위해오래간만에 주어진 틈을 이용하기로 한다. 그간 잊고 있던 를 남의 나라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떠날 명분은 충분하다. 그래서 유럽에 백번을 갔다 온들 자아를 찾지 못한다면내겐 의미 없는 일이다. 소매치기, 들치기, 좀도둑 등 불쾌한 추억을 반추하는 몇몇 유럽여행의 선배들이 은근히 겁을 주기도 하더라만, 내 주안점은 현재의 불쾌한 유럽이 아니다. 그 땅에 가서 현재에 살아 숨쉬는 과거의 영화와 애환을 느끼려는 것이다. ‘잘난 선조들이 이루어 놓은 땅에 못난 후손들이 득시글거리는중국도 이미 대여섯 번의 여행을 통해 느낀 바 있다. 유럽에 소매치기들이 득실거린다 한들 그곳의 인종들이 어찌 그들뿐이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물론 그 땅에 가보아도 해답을 찾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 땅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것. 혹시 알겠는가? 가보지 않은 그곳엔 있을지. 그래서 가는 것이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파야하는 것이 한국문학이고 고전문학이며 시가문학이다. 아무리 곰곰 생각해도 과거에 이루어진 고전문학작품들이 양적으로 더 늘어나거나 질적으로 더 세련될 일은 없다. 그러니 그것을 다루는 내 안목만이라도 좀더 날카롭게 벼려두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현명한 일이다. 이것저것 견문을 넓히다보면, 우리의 옛 문학이나 문화에 대한 여유와 아량이 생겨날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유럽에 간다. 전혀 다른 시공으로 입사(入社)하려는 지금, 경건하게 과거에 이루어진나 자신을 응시한다. 이른바 회광반조(廻光反照)’의 정신으로 지난날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찾아서 돌아올 것이다. 지금 ‘21세기 유럽이라는 시공을 통해 새로 태어나려는 것이 과연 내게 과욕(過慾)’일까?

 

 

 

2005. 8. 30.

 

숭실의 서재에서

창밖의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백규

 

200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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