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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많아 탈도 많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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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7:02 조회 14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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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文生活" 통권 제 68호(사단법인 韓國語文會, 2003.7.)에 기고한 글입니다.


말이 많아 탈도 많은 세상

 

몇 해 전의 일이다. 자료 관계로 헤매다가 ㄱ대학 ㄱ교수와 전화접촉을 하게 되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부탁하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료문제라면 걱정 말라고 시원스레 약속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기분이 좋았고, 나도 남들에게 그런 식으로 친절을 베풀어야겠다는 생각 또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좀처럼 소식은 오지 않았다. 이 날 저 날 기다리다가 몇 개월만에 '조심스럽게' 다시 연락을 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한 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을 뿐 아니라, 궁색한 변명까지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야 지인(知人)들로부터 그의 말이나 약속은 믿을 게 못된다는 충고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나로부터 걸려온 장거리 전화의 반가움 때문에 앞 뒤 생각지 않고 쾌락(快諾)했을 것이다. 그러나 곰곰 생각한 다음 그 자료를 내게 양도할 경우 '큰 손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지키지 못할 말과 약속은 그것을 주고받은 사람들을 모두 우습게 만든다. 그가 처음부터 말에 좀더 신중했더라면, 나도 그다지 서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는 내게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이처럼 최근 들어 말과 관련하여 염증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신의를 담지 않은 말 뿐만 아니라 거친 말이나 말 실수가 범람하는 세태가 우리 모두를 짜증나게 한다.


말이 거칠면 세상이 험악해지는 법. 바야흐로 말 때문에 세상은 각박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이 처음부터 거칠게 나오는 건 아니다. 대수롭지 않게 던졌어도 상황에 따라서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말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말의 중요성이 사람들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이른바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다. 정치인들 사이에 거친 말들이 오고가는 것은 그간 일상화 되다시피 했으므로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국정을 책임 진 사람들이 수시로 저지르는 말 실수나 때에 따라 달라지는 말들은 당혹스러울 정도다.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말이나 말 실수로 인해 빚어지는 정책의 혼선이 이익집단들 사이의 갈등을 불러 일으키기 일쑤다. 그런데, 유독 참여정부에 들어와서 말로 인한 논란이 심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말이 많기 때문이다.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기 마련이다. 먼저 자신의 말을 실천할 수 있느냐의 여부를 따져보아야 하고, 그게 안 되면 적어도 그 말의 여파 정도는 미리 고려해야 하는 것이 국정을 맡은 자들의 기본이다. 이것저것 따질 여유 없이 다급하게 내뱉는 말들에 실수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닌가. 그러지 않아도 세상 인심은 여유롭지 못하다. "열 마디 가운데 아홉 마디가 맞아도 신기하다고 칭찬하지 않으면서 한 마디 말이 맞지 않으면 원망의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니 군자는 차라리 입을 다물지언정 떠들지 않아야 하고 서툰 체 할지언정 재주 있는 체 하지 않아야 한다"는 {채근담(菜根譚)}의 경구(警句)는 우리나라의 상황에 적절한 가르침이다. 가뜩이나 혼란스럽고 인색한 세상살이에 정권 담당자들의 다변(多辯)과 실언(失言)까지 가세해서는 안될 일이다.


누구든 말 실수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의 말이 실수임을 깨닫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함으로 인하여 말 실수가 거듭되는 것은 큰 문제다. 설사 자신의 말이 실수임을 깨닫는다 해도 그것을 자꾸만 덮으려 한다면, 그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그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질(質) 나쁜 '거짓'과 '위선(僞善)'이기 때문이다. 말 실수를 거듭하는 사람은 대개 경박한 성품의 소유자인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말 실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자꾸만 자신의 실수를 감싸려 하고 장황하게 변명하려 한다. 처음에 실수를 인정하고 반성한다면 문제는 그것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처음의 실수를 변명하거나 합리화 하다보면 그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마련이다. 얼마 안가 자신의 짤막한 혀로 막아낼 수 없는 단계에 이르고, 결국은 파탄의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가족, 친지, 친구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평원(平原)의 필부(匹夫)일지라도 말 실수로 인한 파탄의 결과는 비극적인데, 하물며 수천만의 생령(生靈)들을 책임져야 하는 공인(公人)인 경우야 더 말해서 무엇하리.


孔子는 "글로는 말을 다 표현할 수 없고, 말로는 사람의 의사를 다 표현할 수 없다"({역(易)-계사상(繫辭上)})고 했다. 말과 글은 사람의 생각을 드러내는 수단이지만 그 한계 또한 뚜렷하므로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도 선문 수행의 첫 과제가 묵언(默言)이다. '침묵이 금'이라는 격언은 말을 통해 말하는 자의 진심이 왜곡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래서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는 잠언(箴言)의 진의야말로 지혜로운 자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말이 부덕하거나 부정적인 것은 물론 아니다. 말이라는 도구를 빼놓고 공동체를 유지하거나 인간의 지혜를 전승하는 일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언제나 경박함이나 허세, 거짓으로 흐를 수 있는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 만큼 말에서 경박함이나 거짓을 불식(拂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말하는 자의 덕이다. 덕을 바탕으로 하는 말만이 실행으로 옮겨질 수 있다. 난무하는 말들 가운데 덕을 실었거나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덕을 함양하는 일, 실천으로 옮기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말은 튀어나오는 즉시 허공으로 흩어지고 만다. 덕과 실천의 무게를 지닌 말만이 오래도록 살아남는 법이다. "말을 삼가서 덕을 기른다"({근사록(近思錄)})거나 "묵묵(默默)한 가운데 이룰 뿐 겉으로 말하지 않아도 백성이 믿는 것은 오직 그 덕행에 있다"({주역})는 등 경구들 속의 '말'은 이를 지적한 내용이다. 조심스럽고 무게 있는 말이 나 자신과 나라를 구하는 요체임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요즈음이다.

조규익(숭실대 교수/국문학)


200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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