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만난 두 죽음 > 에세이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에세이

최근 만난 두 죽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7:03 조회 151회 댓글 0건

본문


최근 만난 두 죽음

 

하나

이쯤 해서 사생관(死生觀)을 바꾸어야만 하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란 속담처럼 사람이란 되도록 이승에서 오래 사는 게 ‘장땡’이란 생각을 나는 얼마전까지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생각에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 답게 살아 가는 것이야말로 ‘산다는 것’의 본질이라고들 말한다.  적어도 ‘목숨이 붙어 있는 상태’는 뛰어넘는 삶,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삶을 뜻하는 게 아닐까.

카드빚에 몰리다 못해 자신도 죽고 자식도 죽이는 세태를 보며, 자신의 과오를 이승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몸을 던진 현대의 정회장을 보며 삶을 지속시키는 힘은 무엇이며 삶을 포기하도록 하는 힘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카드를 여러 개 갖고 이리저리 막다가 도저히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단계에서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죽음의 길을 택했다 한다. 카드빚 막기에 힘겨워 하던 일을 가장 가까운 남편도 몰랐다니, 참으로 안타깝지 않은가.

그녀는 아마도 남편을 포함한 주변의 눈을 많이 의식했을 것이다. 결코 내리지 말았어야 할 결론이지만, 자존심의 손상이야말로 죽음을 뛰어넘을만큼 비극적인 것으로 그녀는 받아들였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아이들을 죽인 그녀의 죄는 무슨 말로도 용서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투철한 자존심 때문에 필연코 누구에겐가는 짐이 될 자식들까지도 남겨놓을 수 없었으리라.

막판에 몰린 자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정회장도 마찬가지다. 비록 고비고비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될지라도, 별과 같은 재벌의 자리에서 빈털터리로 추락한 참상을 보이게 될지라도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 꼬인 문제들의 해결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어야 했다.

그들은 갔다. 그들 나름의 자존심을 세우며 ‘목숨이란 이토록 하챦은 것이야!’라는 충격적 메시지를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아놓고 그들은 갔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자신의 존엄과 품위를 지켰는가?


큰어머니를 고향의 땅에 묻고 돌아왔다. 치매에 갇혀 주변 사람들을 괴롭힌 3년 반의 투병생활이 당신에겐들 행복이었으랴? 큰어머니의 비극적 종말이야말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너무나 원색적으로 되새기게 한 사건이었다.

요즈음 ‘뇌사(腦死)’란 말이 유행이다. 대뇌를 포함하는 뇌간(腦幹)의 기능은 죽어 있으나 인공호흡장치에 의해 심장이 아직 뛰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지금도 웬만한 규모의 병원에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뇌사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본인이야 무슨 의식이 있을까. 그러나 회생의 가능성 속에 한 가닥 실오리 같은 희망을 걸고 있는 가족들의 마음을 누군들 알 수 있으리.

문제는 뇌에 있다. 미세하게 설계된 컴퓨터의 경우 회로 하나만 잘못 되어도 엉뚱하게 작동하거나 아예 작동을 못하게 된다. 뇌 또한 그렇다. 뇌가 손상을 입을 경우 기억력, 이해력, 판단력에 장애를 받을 것은 당연하다. 이 증상이 진행되면 모든 정신기능이 4세 이하로 떨어지게 된다고 한다.

고희가 넘도록 단아하시며 음식솜씨 또한 출중하시던 큰어머니다. 뇌에 손상을 입으신 지 얼마 후 모처럼 만난 조카에게 ‘저 아저씨가 누구냐’고 물으시며 어색하게 웃음짓던 큰 어머니. 치매가 망가뜨린 세상의 질서를 현실로 확인하곤 나는 망연자실했다. 그로부터 3년 6개월간 큰어머니는 큰어머니나 어머니, 할머니로서의 정체성(identity)을 잃어버린 채 4살 이하 어린이의 또 다른 가면으로 살아 오셨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나 품위를 어떻게 운위한단 말인가. 미세한 부속품 하나의 고장으로 그간 누려오던 모든 것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이여.

앞의 두 사람은 어쨌든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다. 그러나 치매에 휘감긴 큰어머니는 그런 능력 자체를 상실해 버렸다. 그러니 살아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고, 죽으려 하나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것 아닌가. 하늘이 부여한 다른 부속품들의 유효기간까지는 꼼짝없이 살아야 하는 것이 치매환자의 운명인 것을.

그래서 오늘 큰어머니의 죽음이 더욱 서럽다.

    한 땀 한 땀 바느질 이어가듯
    한 세월 어둠 속을 더듬어 나왔지.

    자갈논 열 마지기 곡식 낟알 흘릴세라
    10남매 보듬은 손 갈퀴되어
    삶의 한 복판 긁고 또 긁었지.

    동지섣달 언 땅 가슴으로 녹여가듯
    장맛비로 물렁한 땅
    그 깊은 속을
    한 줌 한 줌 파내렸지.

    오욕의 땅에 사슬 묶인
    치매 4년의 슬픔
    누우런 삼베 수의로 묶인
    한 덩이 육신
    열마지기 자갈논 위로
    백로 되어 나르다.

    2003. 8. 23.


2003-08-2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白圭書屋:::
대표자 : 조규익 | Tel : 010-4320-8442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 E-mail : kicho@ssu.ac.kr

Copyright ©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