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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를 욕되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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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7:04 조회 15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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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일보 25745호(2003년 9월 30일자)에 '시론'으로 실려 있습니다.


용비어천가를 욕되게 하지 말라

  
   
김대중 정권 시절 모 국회의원의 ‘연어론’이 호사가들의 안줏거리로 회자되더니, 최근 신임 해양부장관의 아부발언이 또 한번 장안의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국정을 이끈다는 자들의 천박함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현실은 비극이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이토록 ‘철없는’ 고관들의 언행을 툭하면 ‘용비어천가’로 몰아붙이는 데 이골이 나 있다.


그들의 행태가 어째서 용비어천가일 수 있는가. 되어먹지 못한 인사들의 언사를 꼬집는 데나 써먹을 만큼 용비어천가가 그렇게 만만한 언술은 아니다. 이미 ‘연어론’과 ‘오페라 소신론’에 친숙해진 요즈음의 지식인들로서는 놀랄 일이겠지만, 용비어천가는 당대 지식인들이 최고 통치자에게 제시한 국정의 강령이었다. 지금의 대통령도 머리맡에 두고 밥 먹듯이 읽어야 할 정치의 이상적 텍스트다. 제대로 된 독법(讀法)이라면 이성계 일가에 대한 묘사를 ‘아부’로 읽어낼 수는 없다.


용비어천가의 핵심은 이른바 ‘물망장(勿忘章)’(110~124장)과 ‘졸장(卒章)’(125장)이다. 이성계 일가에 대한 아부성 발언으로 오해될 만한 부분은 물망장과 졸장의 의미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주거를 호화롭게 하지 말 것, 좋은 음식을 탐하지 말 것, 형벌을 마음대로 하지 말 것, 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말 것, 아부하는 간신들을 멀리 할 것, 백성들의 언로를 막지 말 것,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어 나라의 근본을 다질 것, 바른말 하는 신하를 중시할 것, 학자들을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할 것,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할 것” 등등.


이 중에 요즈음의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제대로 해온 게 단 하나라도 있는지 꼽아볼 일이다. 그래서 역대 최고의 정치학 교과서가 아부의 교과서로 잘못 알려져 있는 현실이 개탄스러운 것이다. 용비어천가를 만든 주체는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자 경륜을 갖춘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이 제왕에 대하여 내뱉은 ‘쓴소리’가 바로 용비어천가다. 세종대왕은 명군이자 성군이었기에 그런 쓴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적어도 아부와 직언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를 갖춘 군주였다. 만약 용비어천가가 왕의 가계를 둘러싸고 읊어진 앞부분의 내용만으로 이루어졌다면, 절대로 ‘가납(嘉納)’되지 못했을 것이다.


신임장관이 아부성 발언에 이어 대통령에게 올바른 주문이나 ‘쓴소리’를 한마디만 덧붙였더라도, 적어도 술자리의 안줏거리 신세만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용비어천가는 이 시대에 무엇을 시사하는가.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요체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이다.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면 정치로서는 합격 이상이다. 백성들의 편안함은 백성들 스스로 느낄 뿐, 말로 설명할 사안이 아니다. 아무리 말로 합리화하려 해도 백성들이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면 잘못된 정치다. 그 옛날 황제가 누군지도 모르는 백성들이 배를 두드리며 ‘격양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던 요임금을 보라.


용비어천가를 지은 지식인들은 결코 소리(小利)의 달콤함에 빠져 아부나 농하는 곡학아세의 무리가 아니었다. ‘임금이 하늘인 시대’에도 그들은 국태민안의 요체가 ‘경천근민(敬天勤民)’, 즉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해야 하는 일임을 알았고, 그 점을 왕에게 강조했다. 그로부터 수백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가까스로 간택되어 통치그룹에 끼어든 그 어느 인사인들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민심은 천심이고, ‘경천근민’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통치행위의 알파요 오메가다. 이제부터라도 이 시대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함부로 용비어천가를 폄하하지 말아야 한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200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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