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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공화국의 슬픈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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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7:06 조회 16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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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숭실대학신문' 865호(2003년 11월 24일)의 '월요시평'에 실려 있습니다.


표절공화국의 슬픈 자화상


 최근 프로그램 표절 의혹 때문에 일본 후지TV로부터 국내의 일부 방송사들이 항의를 받은 일은 충격이다. 방송사들이 일단 부인하고 나섰다지만, 전부터 표절 관련 문제들이 많이 제기되어오던 터라 우리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방송문화 수준의 국제화를 논하는 마당에 일본 TV나 표절하는 우리의 현실이 부끄럽다.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진 서구의 문화를 모방하기에 여념이 없던 나라 아닌가. 영악한 모방자의 위치로부터 벗어나 가까스로 자립의 길에 들어선 것이 일본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나라나 열심히 베끼고 있다니?


일본으로부터 식민통치를 받던 시절, 우리는 일본을 통해 서구의 신문명을 도입했다. 우리가 일본이라는 중개상을 통해 신문명을 수입해온 ‘치욕의 역사’는 아무리 씻으려 해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이미 우리 문화 창조의 자립적 기반을 심각하게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과거를 지닌 나라의 문화 담당자들이라면, 치욕적인 유산을 청산하고자 노력해야 할 의무감 정도는 갖는 것이 타당하다.


문화 담당계층 가운데 첨병이라 할 수 있는 방송계 종사자들이 아직 제대로 된 수입상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여 ‘절도’나 하고 있는 현실에 말문이 막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더구나 그 ‘절도’의 대상이 일본이라니.

     "표절은 질 나쁜 절도"

표절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방송만의 문제 또한 아니다. 학계, 예술계, 산업계 등등, 현대의 우리는 표절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급력과 부가가치가 엄청나다는 측면에서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표절하는 일은 물건을 절도하는 것보다 더 악질적이다.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무대에서 남의 곡을 표절한 노래를 부르면서도 눈 한 번 깜짝 않고, 남의 아이디어를 도용하여 제작한 작품을 공모전에 내놓고도 당당하게 활보하는 곳이 우리나라다. 그러니, 별로 보는 이 없는 남의 전공서적 가운데서 뭉텅뭉텅 잘라다가 자신의 글로 바꾸어 놓거나 끼워 넣는 행위쯤이야 더더욱 무슨 거리낄 필요 있으랴.


‘운이 나빠’ 걸려도, 처벌은커녕 별스런 불이익조차 없다. 표절이 성행하는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공범의식’ 때문일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표절을 당한 사람도 선뜻 문제제기를 할 수 없다. 표절한 사람을 탓하기보다는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을 까발리는 ‘좀스러움’에 대하여 비웃음이나 당하기 십상인 세태 때문이다.

     "표절은 문화 창조의 걸림돌"

남이 고심하여 만든 정신적 산물에 덤으로 이름만 얹으려 한다거나 학위논문을 대필해주는 사업이 성행하는 것도 이런 바탕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 총칼 대신 문화를 무기로 ‘식민지’를 개척하는 시대다. 문화는 창조되는 것이다. 창조적인 문화 상품만이 국제시장에 오를 수 있고, 국제시장이야말로 우리의 문화영토로 개척해야할 싸움터다. 후진국이라 할지라도 복제품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창조적인 역량과 의지의 고갈 때문에 우리가 2만불 시대를 꿈꾸면서도 1만불 주변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현실은 분명 비극이다. 창조는 고통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 과정을 생략하려는 유혹에 지면 남의 것을 훔칠 수밖에 없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듯’ 한 번 훔치는 데 재미를 붙이면 단계적으로 더 큰 것들을 훔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창조적인 역량이나 의지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경전을 표절해서 화려한 문장을 꾸미는 일”을, 사람의 발전이나 성취를 방해하는 구습(舊習)들 가운데 하나로 꼽은 이이(李珥)의 혜안이야말로 못난 후손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울린 경종이었다. 언제쯤이나 되어야 우리는 ‘표절공화국’의 오명을 벗고, 세계 문화시장을 당당히 활보할 수 있을 것인가.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200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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