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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부끄러운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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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7:09 조회 19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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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일보 2004년 1월 6일자에 시론으로 실려 있습니다.


 [시론] 실미도, 부끄러운 자화상

"인간에 대한 권력의 차가움 … 가슴으로 봐야하는 영화"
   
   
영화 ‘실미도’ 때문에 우리 사회가 들끓고 있다. 30여년 전에 끊겼던 역사의 필름이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간의 세월은 자의건 타의건 우리 모두가 함께해온 은폐의 역사, 공범의 역사, 아니 모진 자학(自虐)의 역사였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생의 뇌리에 각인된 ‘무장괴한들의 난동·자폭사건’은 지금 중늙은이로 변신한 필자의 눈앞에서 비로소 그 허울을 벗는다. 그동안 이 땅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어온 비리의 역사, 거짓의 역사가 바야흐로 몸체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그것은 공포의 과거였고, 모습만 바꾸어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부조리의 실체다. 힘의 심각한 불균형에서 오는 좌절은 오늘날까지 기층민중의 전유물이었다. 지금이 대중시대라지만, 대중의 탈을 쓴 권력이 엄존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역사학자 카(E.H.Carr)의 말대로 ‘현재의 눈으로 과거 사실을 해석한 것이 역사’라면 ‘실미도’는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한편의 좋은 역사 서술이다. 그 영화, 실미도가 아니었다면 사유물화되었던 권력이 그토록 은폐하려 했던 그 진실을 누군들 알아낼 수 있었으랴.

‘무장 괴한들의 난동·자폭사건’이 있던 1971년부터 우리의 역사는 사실상 정지되어 있었다.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변해가던 국제조류 앞에 권력은 지향점을 상실했으며, 그 와중에서 무엇보다 선행되었어야 할 인간의 기본권은 철저히 말살되었다. 그런 이유로 실미도에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나 권력에 대한 개인의 좌절만을 읽어낸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대접이 아니다.

실미도가 깨우치고자 한 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권력의 철저한 ‘무관심과 차가움’이다. 거기에서 권력에 대한 맹목적 충성이 나오고, 그것은 우리 내면의 적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한 공포의 근원이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말대로 이데올로기의 경쟁에 의해 역사가 발전한다고 믿은 것은 구시대의 관념이었다.

그러나 영화 속에 암시되는 이데올로기는 이야기를 위한 소품일 뿐이다. 그래서 역사 기록보다 더 사실적인 ‘실미도’는 영화이면서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음습한 권력의 그늘 아래 수없이 저질러진 탄압과 굴종. 그간 우리는 권력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폭력과 ‘말도 안 되는’ 희생들에 슬그머니 눈감을 줄 알았고, 그럴듯한 감상으로 미화하는 방법까지 배웠다.

그러나 졸렬한 인간의 욕망이나 잔꾀로 역사의 힘을 누를 수는 없는 법. ‘녹슨 캐비닛’ 속에 처박아 둔 빛바랜 서류철에서 진실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건 바로 그 역사의 힘이었다. 아니, 그 역사에 생명의 부싯돌을 그어댄 예술의 힘이었다. 힘있는 예술을 이루어낸 거장들은 대중의 ‘소망’을 간파하고 집적(集積)하여 예술로 형상화시킬 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하여 절묘한 미학으로 저항하는 존재들이며, 과거의 실미도를 탈역사화시켜 오늘의 우리 앞에 내놓은 장인들이기도 하다. 그것은 실미도의 표현 문법이자 또한 우리가 오늘날의 현실에 적용시켜야 할 독법(讀法)인 것이다.

거대한 권력에 대한 개인의 무력함을 그려내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무력하게만 보이던 대중의 가슴에 자각의 불을 댕긴 데 이 영화의 의미가 있다. 냉전을 넘어서는 대중 자각의 서사 미학, 그 한복판에 ‘실미도’가 있다. 그래서 ‘실미도’는 잃어버린 우리의 자화상이다. ‘가슴으로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자부한 배우 안성기(최재현 준위 역)의 말은 그래서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2004-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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