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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 지켜보는 것도 政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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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7:09 조회 23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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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일보(2004. 2. 25. 수)에 시론으로 실린 글입니다.


이른바 ‘차떼기’로 상징되는 부패의 회오리가 훑고 지나간 자리엔 처참한 잔해(殘骸)들만 나뒹군다. 짧은 기간 많은 것을 쌓았다고 자만해온 우리의 자화상이다.

            “변화의 회오리 막을 수 없어”

농경사회 이후 산업화와 정보화 사회를 거쳐 고도 정보화사회에 진입했다고 믿은 것은 우리의 큰 착각이었다. 먹물 묻은 붓이 키보드로 바뀌었을 뿐, 우리의 내면은 구한말(舊韓末)이나 식민시대의 질곡(桎梏)으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세계사의 진운(進運)으로부터 크게 비껴나 있는 우리의 모습이야말로 진보해야 할 역사의 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문제는 지도층이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데 있다. 머리와 손발이 따로 노는 셈이랄까. 손발은 시대의 흐름을 쫓으려 하나 머리는 자꾸만 뒤쪽을 향하려는 이 모순이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

옛날의 현자(賢者)들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어낸 존재들이었다. 음(陰)의 세력이나 소인들이 득세하여 양(陽)의 세력을 누르는 시기에 그들은 미련 없이 물러날 줄 알았다. 물러나 양이 강해지는 시기를 기다리며 끊임없이 반성하고 준비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적어도 소인배의 세력에 부화뇌동하지는 않았다. 역사란 주춤거리면서도 진보한다는 진리를 믿는다면 음의 세력이나 소인배들의 준동, 또한 필요악이라는 깨달음이야말로 이 시점에서 절실하다. 잘못된 모습을 보며 그런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만 얻을 수 있다면, ‘시행착오’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현자라면 시대를 이끄는 ‘정당한 기운’이 제 자리에 앉을 때 비로소 ‘때와 함께 호응하여’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명철보신(明哲保身)’이란 명분은 단순히 자기 한 몸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 구호가 아니다. 뛰어난 개인이라 해도 지금 우리 사회를 덮친 변화의 회오리를 막을 수는 없다.

지금 야당 대표들과 나이 든 정치인들의 거취문제가 논쟁의 핵으로 부상되었다. ‘나이가 많다’거나 ‘구질서의 수혜자’’부패 인사’라는 점 등이 그들이 물러나야 할 이유로 제시되는 듯 하다. 굳이 말하자면 전자(前者)는 생물학적 이유이고, 나머지는 기득권에 관련된 사회학적 이유일 것이다. 젊은 세대와 여성 등 과거의 비주류가 주류의 반열에 올라선 이상 정치판 자체가 변한 것은 분명하다. 얄팍하긴 하지만 표를 의식하는 정당들이 좀더 젊어 보이기 위해 분칠하는 것도 시대의 한 흐름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경천동지할 식견과 경륜을 가졌다 한들 먹혀들 수 없다.

            “도와주는 자세, 인내심 필요

 이런 시기에 ‘고려장’ 운운하며 서운함을 토로한댔자 모양새만 나빠질 뿐이다. 내가 빠지면 공동체가 잘 못 될지도 모른다고 지레 걱정하면서 퇴임에 조건을 달면 물러나는 모양새만 나빠진다. 물러나서도 ‘어디 니들 잘하나 두고 보자’고 이를 갈거나, ‘젊은 놈들이?’라고 비아냥대는 것은 자승자박의 독약일 뿐이다. 도와주는 자세로 물러나는 자만이 공동체를 위한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자기희생을 통한 국가의 미래에 대한 기여, 그것이 바로 미래에 싹을 틔울 밀알의 지혜다. 진흙탕 물이든 ‘2급수’든 지금의 흐름이 도도하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 흐름을 막을 제방은 어디에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진정한 대세라면 흐르면서 자정(自淨)될 것이고, 장마철 한 때의 홍수라면 금방 말라버려 밑바닥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지금은 인내심을 갖고 그 추이를 기다려야 할 때다.


200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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