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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19 조회 12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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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내가 존경하던 山谷선생은 늘 시간의 짧음을 한탄하시며 빈둥거리는 우리의 젊음을 꾸짖곤 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실감하지 못한다. 당연히 그 때의 우리도 그런 말씀을, 대책 없이 늙어버린 훈장의 잔소리 쯤으로 흘려듣곤 하였다. 당신께서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인생의 길이를 계산해 보이셨다. 여기서 인생의 길이란 물리적 시간 혹은 생물학적 수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동물과 구별되는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치를 창조하고, 비록 하잘 것 없다 해도 나름대로의 기념비를 세우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아주 짧은 시간의 길이를 뜻한다.

한 인간의 수명을 어림 잡아 70이라 하자. 20까지는 아직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채 부모에게 의지해 살아가는 기간이고, 60에서 70까지의 10년 역시 삶의 현장으로부터 은퇴하여 죽음을 준비하는 기간이니 70의 수명에서 30을 빼버리면 40년 정도가 독립적인 자기의식을 기반으로 가치 창조를 향해 뛸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반 정도는 잠 자는 시간이니 이것을 빼면 20년이 남는다. 그것 뿐이랴. 밥 먹는 시간, 변소 가는 시간, 남을 물고 헐뜯으며 쓸 데 없이 낭비하는 시간 등이 줄 잡아도 하루의 삼분지 일은 될 것이니 이것을 빼면 겨우 13년 정도 남게 된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가치 창조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 우리의 삶에서 精彩있는 시간이 우리의 일생 중 10년 남짓밖에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살고 있는 매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지 않은가. 벽시계의 초침은 종착역을 향해 숨막히게 째깍거리는데 아직도 눈앞의 캔버스에는 밑그림조차 그리지 못하고 있다. 무슨 기념비를 세울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도 못해 본 채 끝내버리는 것이 우리 張三李四들의 삶이라고 체념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러한 인생의 정채로운 순간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 그런 순간을 위하여 우리 삶의 밑그림을 어떻게 그려갈 것인가? 만약 대학에의 진입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면 이 문제는 더욱더 심각하게 우리의 앞에 닥칠 것이다. 대학에서 어떤 전공을 택한다는 것은 청춘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 전공을 택하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두메 산골, 거기서 삼십리를 걸어나간 곳이 면소재지였다. 그곳에 우리 지역의 유일한 대학생이 있었다. 그는 국문과 학생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 여름이 가깝도록 오버코트 비스름하게 생긴, 검고 두툼한 옷을 입고 다녔으며 대체로 깔끔하지 못한 몰골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늘 고개는 약간 삐뚜룸하게 숙인 채 자못 심각한 표정을 하고 다녔다. 그런데 그는 '겁나게' 유식하였다. 방학 때만 되면 그의 집에는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족보를 들고 와서 물어보기도 하고, 논을 사고파는 사람들은 계약서를 부탁하러 오기도 하였다. 어떤 아저씨는 땅을 팔아서라도 자식놈을 대처의 고등학교에 진학시켜야 할지 상담하러 오기도 하고 어떤 할머니는 곱게 기른 손주딸 생각을 하며 괜히 그의 주변에 얼찐거리기도 하였다. 어쨌든 나는 그를 좋아하였고, 그의 외모에 덮씌워진 그 분위기로부터 문학과 학문을 느끼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멋진 국어선생님을 만났고, 그 분으로부터 국어학과 국문학이 우리 삶의 한 복판에 있는 학문임을 배웠다. 우리의 우상이셨던 국어선생님께서는 과거-현재-미래를 하나로 꿰는 것은 물론, 고도로 精緻한 사고와 논리적 틀이 요구되는 학문이 바로 국문학과 국어학임을 늘 강조하셨다. 대학에 들어와 '文-史-哲'을 두루 갖춘 인간형 만이 동양적 지성인, 더 나아가 보편적 지성인의 전형임을 깨닫고 나는 더욱더 내 공부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요즈음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는 학생들을 國寶로 여긴다. 황금 만능, 실용적 기교 만능의 얄팍한 세태를 보라. 모두들 기를 쓰고 금방 돈 될 것만 눈들이 벌개져 찾아 다니는 이 삭막한 세상에서 그래도 '정신적인 것'을 탐구하겠노라, 문학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모형을 만들어보겠노라 국어국문학의 울타리에 들어오는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아끼고 북돋워야 할 국보들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지금 세계화의 물결에 휩싸여 있다. 대통령으로부터 금방 젖 떨어진 아이까지 입만 열었다 하면 '세계화'다. 그러나 과연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나 세계화의 참뜻을 깨닫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세계화란 보편적 가치의 추구에 그 근본을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아 정체성의 확립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분명히 깨달은 다음에 비로소 세계인으로의 도약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것을 망각하거나 빼어버린 공간에 남의 것을 채운다면 우리는 껍질과 알맹이가 다른 두겹의 인간으로서 고스란히 남이 될 뿐, 결코 보편적 세계인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간 우리의 세계화를 막아온 요인은 '우리의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한 점에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얼이 빠져 허둥대는 이 나라의 이른바 지도층 인사들을 대신하여 우리 민족을 온전하게 우리 민족으로 남을 수 있게 하는 최후의 보루가 바로 국어국문학을 배우는 젊은이들의 마음이다. 한국어て한국문학에 있어서는 우리가 세계 최고의 위치에 있다는 자부심, 세계 시장에 우리의 것을 펼쳐 보일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자신감으로 그들의 마음은 부풀어 있다. 국어국문학의 소양을 갖춘 후에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로 무장하겠다는, 그들의 야심이야말로 무궁무진한 경쟁력의 원천이다. 합당한 노력만 기울인다면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든 뻗어나갈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어느 공부인들 우리에게 중요치 않으랴. 그러나 한푼 더 버는 사람이나 덜 버는 사람이나 똑 같이 먹고 사는 세상이다. 문제는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있다. 어떠한 일에 가치의 비중을 둘 것인가. 민족의 정신적 영속성을 유지시켜 나가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는가. 보이지 않는 정신적 자산의 탐구를 통하여 함께 살아가는 민족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보다 더 거창한 일이 또 어디에 있는가. 다른 민족들과 어깨를 겨루며 지구촌을 누빌 때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게 하는 우리의 무기는 무엇인가. 핵무기인가 아니면 돈인가? 우리의 말과 글, 또 그것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정신적 자산이야말로 지구촌에서 우리로 하여금 자존심을 지키고 그들과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아닌가.

할 일은 많은데 젊음은 잠깐이다. 방황은 일찌감치 끝내는 것이 상책이다. 가치 있는 일에 우리의 젊음과 인생을 걸어보자.

지금 이 순간, 젊은 우리들의 나태함을 질타하시던 그 山谷선생의 나이에 도달하여 옛날의 나와 같은 학생들을 대면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란다.


200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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