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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와 일부교수의 시대착오적 발상을 비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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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20 조회 12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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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와 일부교수의 시대착오적 발상을 비판함


중앙일보의 "서울대 '특정대 임용제한제' 정면 반발" 기사와 김모교수의 "대학개혁, 급할수록 천천히"라는 기사를 접하고 우려를 금할 수 없어 몇 자 적는다. 두 기사의 논조가 어쩌면 그리도 흡사하며,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어쩌면 그리도 노골적인지 참으로 흥미롭다는 생각까지 든다. 개혁의 당위성을 거부하려는 서울대의 입장을 호의적으로 다루고 있는 기사와 함께 그것과 나란히 실려 있는 그 대학교수의 주장을 보면서 우선적으로 필자는 언론계를 수중에 넣고 움직여온 서울대의 힘과 그 대학의 시대착오적 일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점은 여기서 거론하려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니 일단 덮어두기로 하자.

두 기사의 공통되는 부분이 교수임용에 관한 문제이므로, 이 자리에서는 이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우리의 교육정책부서나 당국자들의 현실감각에 대하여 한번도 만족해본 적이 없다. 당연한 귀결로 그들의 머리에서 나온 정책 또한 '격화소양' 일변도였고, 그에 따라 이 땅의 교육이 악화일로를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늦긴 했으나 다행히 개혁성향의 장관이 등장했고, 비로소 대학개혁의 문제도 가닥이 잡혀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말의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개혁의지는 이제 갓 천명된 상태이고, 이제부터 온갖 종류의 역풍이 불어닥칠 것이라는 우려는 서울대의 반개혁적 움직임으로부터 가시화되고 있다.

개혁은 왜 해야하는가? 대학다운 대학을 만들자는 데 있다. 문제 투성이의 대학을 제대로 바로잡자는 것이 대학개혁의 본질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태가 괜찮다고 보는 사람들에게는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기존의 대학질서를 흔들어보려는 企圖 이상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현재 대학들의 상황이 대학의 본질적 기능인 학문의 질적 신장이나 효율적인 인재양성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본다면, 그야말로 '소가 웃다가 코뚜레가 부러질' 일이다. 대학이 대학다우려면 학문발전과 인재양성이라는 두 기능을 잘 수행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두 기능의 주체는 물론 교수집단이다. 교수집단의 구성이 학문의 발전에 적합한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런 기반 위에서 매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이 잘못 되어 있다면 대학의 기능은 발휘될 수 없다. 엄청나게 많은, 대학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가 교수임용이다. 대학교수 신규임용시 특정대학(*특정대학이 어느 대학 혹은 대학들을 지칭하는지는 뻔하지만, 편의상 그냥 언론의 표현을 따르기로 한다.)출신자들의 수를 법으로 제한하겠다는 교육부의 의지는 이 문제가 우리나라 대학들의 고질이었음을 웅변으로 입증한다. 물론 대학과 학계의 자율이 아닌, 법의 힘에 의존하려 하는 교육부의 처사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의 구조와 관행에 관해서 알고 있는 국민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점 또한 이해하고 있다. 오죽하면 그런 생각을 다 해냈겠는가 하고 말이다. 사실상 그동안 특정대학 출신들이 자기들 대학은 물론 우리나라 모든 대학들의 대부분의 교수직을 독점하다시피 해왔고, 그 가운데 서울대는 대표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아 얼마전부터는 특정대학 이외의 대학들도 자기 출신들을 길러 자기대학의 교수로 임용하는 풍조 까지 번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특정 대학에서 배운 학생이 자라서 그 대학교수가 되고, 그는 수많은 은사와 선후배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자신들의 후배들을 또 길러내며, 그 후배는 자라서 또 그 대학의 교수가 되는 단순재생산을 반복해 온 것이다. 그 뿐인가. 전국의 어느 대학에나 이들 대학의 단단한 인맥이 포진하고 있어 교수임용에 관여하는 영향력이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교수임용시 적용되는 '출신학교 점수'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들리는 말에 의하면 특정대학 출신에게 부여하는 점수가 여타대학 출신들에 비해 높다고 한다. 그러니 특정대학 출신이 아닌 교수지원자들의 경우 아무리 학문적 업적이 탁월해도, 그들에게는 학문적 업적이나 성과에 대한 실질적이면서도 객관적인 평가의 기회마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셈이다. 어느 대학에 교수자리가 생길 경우, 특정대학 이외의 대학에서 지원하려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지원할만한 후보자가 특정대학에 있는지부터 살피는 것이 관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만약 그들이 지원만 하면 학문적 업적이나 능력에 관계없이 '우선적으로' 선발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 현실이니 결과적으로 자기들은 들러리의 역할밖에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비참한 생각 때문이었다. 더욱이 특정대학들 자체의 경우도, 정년퇴임 등으로 자리가 생길 경우 채워 넣을 사람들의 서열이 그 대학 학과 자체 내에 이미 정해져 있다하니 아무리 학문적 업적이 출중해도 여타 대학 출신들로서 그곳에 서류를 들이미는 '코미디'를 감행할 강심장들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대학교수, 특히 특정대학교수는 특정대학출신들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것이야말로 학문세계에 대한 전근대적인 편견의 소산이다. 쉽게 말하면 "서울대도 못나온 놈이 서울대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랴?"는 발상이다. 특정대학 출신의 교수들은 여타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고 자격 또한 충분하지만, 여타대학 출신들이 특정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논리인 것이다. 그런 논리라면, 특정대학 출신들은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는 언제까지든 최고의 업적을 내야 하고 앞서 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이 과연 그러한가? 일생에 단 한 번인 대학입시에서 특정대학 특정과에 들어갔다고 그 분야에서 과연 언제나 두각을 나타낼 수가 있는가? 그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의 반수 이상의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한 흥미나 자부심을 갖지 못한다는 조사결과를 접한 경우가 있는데, 그럴 경우 그들의 학문적 성취 역시 그들의 입학성적과 비례할 것인가? 등등 제기될 수 있는 문제들은 많다. 더욱이 그동안 시행해온 대학입학선발고사가 잘못 되었다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떠들어 왔으며, 당장 특정대학 자신들도 21세기에 들어가면 기존의 시험제도를 백지화시키겠다고 공언하지 않았는가. 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을 통하여 누구나 입학당시에는 발휘되지 못했던(사실은 발휘되거나 평가될만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만) 능력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고, 그에 따라 성실한 태도로 노력할 경우(대학의 명성이 주는 프레미엄에 안주할 가능성이 높은)일부 특정대학 출신들에 비해 쳐질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지금 필자는 잠시동안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다. 그 나름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미국의 대학들이 최강의 국제적인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학문적 보편성에 대한 철저한 신봉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들이 추구하는 과정상의 객관타당성에 그 가장 큰 요인이 있다고 본다. 필자가 이곳에 와 있으면서 만나는 교수들을 통하여 놀랄만한 경험을 하고 있다. 그들은 다양성, 학문적 성취욕, 화려한 업적 등을 자신들의 현실적인 존립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한국에서 교직에 종사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미국에서 직 간접적으로 만나는 많은 수의 '권위있는' 교수들이 '한국처럼' 으레껏 그 대학 출신들일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나, 공개된 그들의 이력을 통해서 열명에 한두명을 제외하곤 모두 타대학 출신들임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매년 발표되곤 하는 객관적 서열로 따져 자신의 대학보다 쳐지는 학교 출신들도 상당수 있을 뿐 아니라, 미주 이외의 지역 출신들도 상당수 있었다. 대학교육의 후진국 백성인 필자의 눈에는 경이로운 사실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바로 이 점이 미국 대학의 경쟁력을 만들어내는 원천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출신학교가 아니라 학문적 능력으로 교수의 자질을 평가해야 한다는 원칙만이 우리의 대학교육을 살리고, 우리나라를 살리는 길이다. 그렇다고 학문적 업적이 있는데도 특정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한다면, 학문적 능력이 뛰어남에도 특정학교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임용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제 있는 발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임용비율을 정하기 위한 법을 만드는 것이 자칫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에 문제점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택한 방법이라면, 그 시한을 길게 잡아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런 법은 막혀 있는 대학인들을 계몽하거나 지나치게 왜곡된 대학교수 시장을 바로잡기 위해서 잠시 필요할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김모교수는 그의 시론에서 대학의 본질이 '자유성'에 있다는 선현의 말을 인용하였고, 그에 기대어 교수임용을 어떻게 하든 대학에 맡기라는 식의 말을 하였다. 그리고 불란서와 일본, 대만 등의 예를 들고 있다. 그러나 그 경우의 '자유성'이란 '보편성'과 '객관타당성'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선현들의 말을 따다가 자신의 논리를 합리화시키는 데도 正道가 있는 법이다. 어떤 행위이든 보편성과 객관타당성을 갖추지 못했으면, 그 자유성은 제한을 받거나 제재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필자는 과문한 탓으로 불란서와 일본, 대만의 대학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대학들이(물론 우리나라 대학들보다는 낫겠지만) 과연 세계적으로 어느 수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는 미국 대학들의 예는 왜 빼놓으셨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김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서울대학이 불란서와 일본, 대만 등의 해당 대학들을 모델로 삼고 있다는 얘기인지, 앞으로 모델로 삼겠다는 얘기인지도 알 수가 없다. 만약 지금까지 그렇게 잘 해 왔다면, 한국 최고의 인재들을 뽑아다가 그에 걸맞는 교육을 성공적으로 시켜 왔는지에 대한 자체 평가도 덧붙였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교육당국자들이 모델로 삼으려고 노력하는 미국의 예는 왜 들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오히려 경쟁력이나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따지자면 이들 나라의 대학들보다 미국의 그것들이 앞선다고 생각되는데도 말이다. 10% 미만에 불과한 미국 유수대학들의 자기대학 출신 비율과 95%를 넘는 한국 특정대학의 그것을 비교해보라. 아무리 특정대학인들의 눈에 여타대학들이 대학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너무 하지 않는가? 서울대 폐지론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힘을 얻어가고 있다는 사실과, 서울대만 개혁되면 한국의 교육개혁은 완성된다는 세간의 중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울대 당국과 교수들은 곰곰 되새겨주길 바란다.

예로부터 개혁에는 늘 보수반동 세력이나 역풍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개혁 자체에도 문제점들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점들을 보완해가면서라도 개혁의 기조는 유지되어야 한다. 모처럼 일고 있는 개혁에 그 개혁의 대상자들은 자성하는 태도로 순응해야 할 것이며, 그 외의 사람들도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 필자가 1998년 미국에 있을 때, 대학교수 임용 쿼터제 도입을 둘러싸고 벌이던 국내의 논쟁을 접하면서 쓴 글이다. 그 때에 비해 상황이 얼마간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보아 그 글을 수정하지 아니한 채 이곳에 전재한다. 뜻 있는 분들은 이 글에 대한 견해를 표해주시기 바란다.


200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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