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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사회와 혈통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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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24 조회 16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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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사회와 혈통의식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얼마전까지 일부 대학이나 학과들에서는 교수를 채용할 때 전공의 일치를 가장 중요한 요건들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즉 '학부-석사-박사'의 전공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이나 국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그 뒤 고전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경우 그것이 감점사유가 될 정도라면, 학부에서 영문학이나 사학 혹은 공학을 공부한 사람이 대학원 석사-박사과정을 국문학과로 진학하여 아무리 좋은 논문들을 썼다한들 제대로 받아들여졌을 리가 없다. 學理的으로 그럴 듯한 이유가 있는지 그 배경을 소상히 알 수는 없으나, 시대착오적인 편견이나 행태의 하나였음에는 틀림없다. 이런 풍조는 현재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학부생 편입학의 현장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즉 대부분의 대학들에서 편입하려고 하는 학과와 일치하는 학과 출신자들에게는 큰 점수를 주고, 그 학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수가 낮아져서 전혀 관계없는 학과 출신자의 경우는 아예 점수를 받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사실 대학 진학시에 전공을 잘못 선택했거나 자신의 적성을 새롭게 발견했을 경우, 그에 맞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일은 자연스럽고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교육기관의 책무가 아닌가 한다. 더구나 개방화라는 시대정신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물론 편입학을 하려는 의도가 전공을 바꾸지 않더라도 자신이 속한 대학의 레벨을 높이려는 데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편입학의 제도가 소중한 것은 젊은이들이 한 순간의 오판으로 잘못 선택한 전공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오히려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편입학의 과정에서 전공은 묻지 않아야 한다. 복수 전공제도를 비롯하여 전공간의 벽을 허물려는 것이 현재의 추세라면 더욱더 그렇다. 이런 시기에 같은 전공에 덤으로 큰 점수를 부여하는 것은 대학사회의 왜곡된 기득권 수호주의와 연결되는 행태로서 시대정신에 역행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편입학 본래의 취지를 시대정신에 맞게 살리려면, 전공의 울타리를 없애야 한다. 대학 1, 2학년에서 공부한 전공과목들이라고 해보아야 무어 그리 엄청나겠는가. 얼마든지 3, 4학년에 만회하고도 남는 수준이라면, 전공의 일치 여부를 평가의 큰 부분으로 고려하는 현재의 관행은 즉시 타파되어야 한다.

그와 함께 놀랄만한 일은 우리 대학사회의 순수혈통주의, 특히 출신대학(학부)에 대한 집착이다. 특히 메이저급 대학들의 학과에서 교수 채용시에 적용한다는 결정적 조건들 중의 하나도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이른바 "KS마크"니, "SKY 출신들의 프리미엄"이니 하는 구시대의 망국적(?) 사고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이젠 여타 대학의 교수들마저 자기 울타리 내에서만이라도 자기 제자들의 자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메이저급 대학들의 관행을 본받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메이저급 대학들 간에도 실력보다 오직 "자기 학부-자기 대학원 출신"이라는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특정 선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승관계만이 해당학과 교수후보의 기본 자격요건으로 인식되는 경우 또한 없지 않다는데, 이런 점은 선진국 대학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학생들의 입장에서 전공을 바꾸기는 고사하고 학교를 바꾸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우리나라의 대학들이 전공간의 이동이나 학교간의 수평이동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폐쇄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적되어왔다. 대학들에게 학부제니 복수전공제 등을 강권하다시피 하는 것을 보면 교육정책당국이 이제서야 그 폐단을 인식하긴 한 듯 하다. 그러나 그 정도의 대책으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까? 자신이 공부하고 있는 분야의 탁월한 교수가 어느 대학에 있을 경우, 그 대학원으로 선뜻 옮기거나 진학할 수 없는 것은 순수 혈통만을 고수하려는 우리나라 교수시장의 경직성과 폐쇄성 때문이다. 공부를 마친 뒤 교수로 진출하려는 것을 포기한 경우라면 모를까 감히 그곳에 가서 자신의 학문적 야망을 실현할 엄두도 낼 수 없게 되어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교수사회와 국민들의 의식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교수사회의 구조나 의식의 변화는 대학개혁의 필수요건이다. 메이저급 대학이라 하여 모든 교수들이 우수한 것은 아니며, 세칭 일류대학이 아니라 해도 모든 교수들이 그들 대학보다 못한 것은 아닐텐데 대다수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알고있는 대학들의 서열에 따라 교수들의 자질 또한 그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판단해버린다. 학문적 차원에서 대학들 간의 교류나 이동을 원천적으로 막는, 주된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일부 메이저급 대학들을 제외하면, 한국의 대학들에서 긍지를 가지고 자신의 분야를 연구하거나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수의 비율이란 미미할 수밖에 없다. 세계 800위권에 속한다는 우리나라의 어떤 초 메이저급 대학은 자기 학교 출신 교수비율이 100%에 육박한다고 한다. 전 교육부 장관은 이 비율을 50%로 내리겠다고 했다가 그 대학교수들로부터 격렬한 저항을 받은 바 있다. "그 대학도 못 나온 사람들이 어떻게 그 대학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들의 저항 속에 잠재된 이유들 가운데 하나였다(논점이나 분량상 여기서 그 논리의 부당성을 논박할 여유는 없다.). 처음 그 장관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당시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장관께서 50%는 고사하고 80%로만 끌어내릴 수 있어도 이 나라 대학교육의 개혁은 그 순간에 완성의 길로 들어설 것이오." 이것이 당시에 남 몰래 중얼거린 내 말이었다.

대학교육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나라로 흔히 미국을 꼽는다. 미국에서 전공을 바꾸는 것, 학교를 바꾸어가며 교육을 받는 것은 일상적인 광경이다. 당연한 결과라고 보지만, 모교에서 교편을 잡는 교수들의 비율 또한 덩달아 미미할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학들에서 모교출신 교수채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학부나 석사과정을 마친 학생이 더 좋은 교수를 찾아 다른 대학의 상위 과정으로 진학하는 일은 다반사다. 학부과정 자체도 선택의 폭이 넓지만, 대학원 과정에서 새롭게 선택하는 전공의 폭 또한 아주 넓고 자유롭다. 그러한 이동 자체가 그들의 진로에 도움이 되면 되었지 절대로 우리나라의 교수시장에서처럼 불리한 조건은 아니라는 점이 내게는 경이로운 사실이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은 세계 최고로 치솟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커가고 있는 인재들이 많다. 학구의 과정에서 그들 스스로 교수와 학교를 선택하여 이동할 수 있는 기회와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다양하고 자유로운 선택들이 '정체된' 우리 학계에 도움은 될지언정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진실'을 그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우선 메이저급 대학의 고명하신 교수님들께 촉구하건대, 우리나라의 대학들도 이젠 그 째째하기 그지 없는, 통탄할만한 혈통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능력 없으면 제 자식이라도 도태시킬 수 있는 대국적 결단과 용기로 교수사회를 다양화∙고급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들이여, 그대들의 모교는 그대들의 사유물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 두시라. 그대들의 모교는 그대들을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로 길러준 것만으로 그 역할을 다 한 것이다. 졸업 후 그대들을 먹여살리는 일까지 모교가 떠맡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대들이 그대들의 모교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수록 그대들의 모교는 질적인 면에서 찌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두시라. 그저 먼 발치에서 모교가 잘 되도록 응원을 보내는 것만이 모교에 대한 최대의 서비스라는 점을 제발좀 깨달으시라.

그와 같은 새로운 풍조가 우리나라의 전 대학사회로 시급히 퍼져나갈 수 있도록 우리는 나서야 한다. 그 길만이 정체된 연구 분위기를 진작시킬 수 있고, 실종되어버린 대학개혁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2002. 6. 10.>


200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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