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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 곰보 스크린, 그리고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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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25 조회 18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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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 곰보 스크린, 그리고 가족


울긋불긋 헝겊쪽 나풀대던 성황당, 그리고 검푸른 솔숲 너머 십리 거리에 판자로 얽어엮은 두어 동의 학교건물. 내 유년시절의 고통과 꿈들이 아스라한 추억으로 내 마음 속에 아롱져 있는 공간이다. 산 기슭을 울퉁불퉁 깎아 만든 운동장의 한쪽 면에 구멍 숭숭 뚫린 광목천을 내어걸고, 릴 소리 요란한 영사기를 갖다 놓으면 환상 속의 서사체험은 시작된다. 예닐곱 무렵부터 누구의 시혜였는지 우리는 1년에 한 번, 추석을 전후하여 학교의 마당에서 상영되곤 하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형이나 누나의 동행이 없으면 마당가의 변소깐에도 못 가던 나였으나 영화가 오는 날이면 그 오싹하던 성황당과 솔숲 10리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김희갑과 김지미, 문오장, 허장강 등의 일거수 일투족을 침 흘리며 훑어내리곤 했다. 참으로 신기했다. 필름과 스크린이 낡아서 화면 가득 구멍 투성이요, 가끔 필름이 끊어지거나 자가발전기가 꺼져 관객들은 한숨을 쉬며 한참동안을 기다려야 할 정도였으나 그저 좋을 뿐이었다. 내가 밤마실을 갔다가 조금만 늦어도 불호령이시던 어머니께서도 영화만은 무조건 오케이이셨다. 어머니는 가마니를 짜시며 늦도록 기다리시다가 내가 돌아온 뒤 들려드리던 가슴 뛰는 영화 이야기에 재미를 붙이셨고, 관심 없는 척 하시던 아버지께서도 은근히 내 구변을 사랑하셨다. 이렇게 추석 전후 우리 가족은 우리 고장을 찾아온 영상예술의 전령사들 덕분에 화기로운 몇날을 보낼 수 있었다. 구멍 뚫린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서사구조는 내 미래의 삶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뻔한 해피엔딩과 권선징악, 그를 통해 영웅으로 등극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내 가슴을 공명심으로 가득 채우곤 했다. 그곳에서 한 번 상영된 영화는 다음 영화가 들어올 때까지 우리 꼬마 관객들의 입에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심지어 우리들 사이에서는 많은 내용들이 덧붙어 새로운 이야기들이 태어나기도 했다. 덩달아 우리네 가족들의 마음도 풍성해질 수 있었다.

최근 헐리웃 인근 도시에서 꿈처럼 주어진 미국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주말마다 센츄리시티 몰의 안락한 극장 AMC에 갈 궁리만 했다. 한 해 한 두 번 기십리 밤길을 걸어 운동장으로 향하던 그 옛날의 내 모습이나 AMC의 프로를 뒤지며 끈질기게 전화를 해대는 아이들의 모습이 닮았다 생각은 하면서도 푸대만한 봉지에 팝콘을 가득 담고 양동이만한 종이컵에 콜라를 가득 담아 든 채 안락의자의 편안함을 탐하는 즐거움이 그 옛날 자갈마당 위의 불편함보다 크게 낫다고 생각되지 않은 것은 왜 였을까? 아이들은 배우의 연기를 평하고 화면의 질과 스토리의 짜임을 비평한다. 그러나 뻔한 해피엔딩의 멜로 드라마에 길들여진 나는 그들과 아주 먼 거리에 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콧등 시큰한 이야기는 그저 교묘하게 설정된 복선과 기발하게 짜여진 이야기의 밀도에 있는 것이 아님을, 나는 짧지 않은 내 인생살이에서 느꼈고 그 지혜는 이미 내 유년시절의 엉성하던 우리 영화에서 터득한 바 있다!

때 맞추어 시드니 올림픽에 중추절이 닥쳐온다. 이런 때 우리의 때깔 고운 영화를 통하여 어긋나 있는 가족간의 주파수나 맞추어볼 일이다.

 * 이 글은 영화마을 제 7권 9호(2000/9/1)의 권두 칼럼으로 실린 글입니다.
<2002. 7. 20.>


200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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