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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학들의 학문적 사망선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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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26 조회 18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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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학들의 학문적 사망선고 2


학회 이야기


며칠전 필자가 관여하는 어떤 학회의 정기학술발표회가 있었다. 모 유명 대학에 마련된 150여석 규모의 회의장에서였다. 4명의 발표자에 4명의 지정토론자, 회장과 4명의 실무이사, 강제로(?) 차출하시피한 보조요원(대학원생) 4명 등 17명을 제외한 순수 참석자가 5~6명 내외였다. 그 인원이나마 채우기 위해 예정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시작해야 했다. 토론시간에는 그 인원마저 베잠방이에 방귀 새나가듯 다 빠지고 10여명 남짓한 인원만이 썰렁하게 넓은 회의장에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 학회만의 사정이 아니다. 어느 해 모 대학에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으리으리한 회의장에 내외국인 발표자들 10여명을 모셨는데, 시간이 다 되도록 객석에는 대여섯명의 청중만 앉아 있더라나? 다급한 주최자가 시작 시간을 연장하면서 밖에 나가 학생들에게 통사정을 하여 겨우 10여명을 채울 수 있었다 한다. 그 순간 주최자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이런 일을 여러 번 경험한 바 있는 나로서는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몇몇 분야, 몇몇 학회만 제외하고 한국의 학회는 빈사상태이거나 없다고 할만큼 한심하다. 특히 인문학 쪽의 학회들은 아예 거론할 여지조차 없다. 학술발표장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근래 들어 투고되는 논문의 양이나 질이 너무 떨어져 과연 옛날의 수준을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푸념을 누구에게선가 들은 바 있다.

왜 그럴까? 과연 이런 현상을 단순히 사회 변화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기술만 중시하고 당장 돈 되는 것만 중시하는 ‘부박(浮薄)한 현실’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이유도 크다. 그러나, 비록 소수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비교적 알차게 운영되는 학회들이 있는 현실은 또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한 번 생각해보자. 필자 나름대로는 공부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몇몇 대학들의 학과들(필자와 같은 전공)을 면밀히 주시해왔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대략 10여년전과 지금을 비교할 때 필자가 전공하는 학과가 있는 대학들의 서열에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물론 필자 나름의 판단이지만, A∙B∙C∙D대학 해당학과의 부상은 인상적일 정도다. A∙B대학의 해당학과는 그 당시에도 상위에 랭크되어 있었고, C∙D대학의 해당학과들은 중상(中上) 쯤에 랭크되어 있었다.

그러나 A∙B대학의 해당학과는 현재 완벽하게 최상위로 부상되었고, 후자들 역시 그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 상대적으로 당시 최상위 혹은 그에 가깝다고 자평(自評)하던 대학(들)의 해당학과는 이들의 훨씬 뒤쪽으로 밀려나 있다. 그런데 부상한 대학들의 공통점은 많은 인재들을 키워냈다는 점이다. 오히려 선생보다 훌륭한 글을 쓰는 등 학문적 업적이 출중한 제제다사들의 즐비한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불쾌함 없이 그 사실을 널리 자랑하고, 제자들 또한 그런 점을 내색하지 않고 선생을 극진하게 공경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흡사 해저탐사에 비쳐지는 어군(魚群)같다는 생각이 든다. 피라믿 형태로 이루어진 대열의 첨단에 큰 고기가 서고, 그 뒤로 크기에 따라 넓게 퍼져 대형(隊形)을 형성하는 어군 말이다. 그 가운데는 무녀리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낙오자 하나 없이 제 갈 길들을 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런데 그런 대학의 해당학과들에서는 어떻게 그런 인재들을 많이 기를 수 있었을까? 특별히 그 대학 해당학과의 교수들이 다른 대학의 해당학과 교수들보다 우수했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관찰해온 나는 그 비밀을 학회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대학 해당학과의 상당수 교수들은 학회 활동에 열심이었고, 학술발표에 열심히 참여했다는 점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우선 학회에 열심히 참여하다보면 임원으로 활동하게될 가능성이 크고, 학회 일을 보다보면 자신들의 학교에서 학회를 열 기회가 많아질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발표자나 토론자, 하다못해 청중 동원이라도 자신의 학교에서 해야 할 경우가 많다. 자연히 제자들은 타의로라도 학회 활동의 중심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뿐인가? 교수들 자신이 청중석에 앉아 발표자나 토론자의 말을 경청하게 되는데, 많은 제자들 또한 그 모습을 보면서 어찌 그곳에 참여하여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과정이 되풀이 되면서 학회 활동은 그들 공부의 큰 부분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학회처럼 공부에 도움되는 것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연구실이나 학교 울타리에 갇혀 공부한답시고 해 보아야 여러 곳에서 모인 재사들의 연구결과를 듣는 것만 하겠는가? 학자 개인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란 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런 개개인들이 모여들어 발표하는 학회의 발표장은 엄청난 넓이와 깊이를 함께 하는 학습의 현장일 수 있다. 아무리 대단한 학자라 할지라도 모든 학자들이 생각하고 궁리하는 그 모든 영역을 포괄할 수는 없다. 지금 생각하면 필자가 사숙(私淑)하던 대학자들은 대부분 학회에 열심히 참여하셨다. 한결같이 구부정한 모습으로 발표회장의 청중석에 앉아 열심히 메모하시던 그 분들의 모습을 필자는 잊을 수 없다. 사실, 그 분들이 그 순간만큼은 당신들이 대학자라는 의식을 전혀 갖지 않고 일개 학동으로 돌아가 발표자들의 연구결과나 경향 등을 듣고 배웠으리라 본다. 이 점이 바로 내가 관심을 갖는 문제의 핵심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어떤가? 일단 대학에, 그것도 ‘이름있는’ 대학에 적을 둔 후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면 학회에 나가는 일을 자존심과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혹 그런 학회에서 ‘특별히 모신다면’ 한 번 쯤 나가 ‘무게 있는’ 말씀을 해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고 자발적으로 나가 청중석에 앉아 ‘새까만’ 후학들의 ‘설 익은’ 발표를 듣는 일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자존심과 체면이 걸린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런 분들이 왕성하게 뻗어나가는 신진들의 새로운 학문경향을 확인하거나 배우기는 애당초부터 글러버린 일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제자들을 학회에 참석하도록 독려하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자신보다 훨씬 타당하고 세련된 학설들이 난무하는 학회의 현장에 제자들을 내보냄으로써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는 일을 자초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속 보이는 일이라서 제자들로 하여금 그런 곳에 나가지 말 것을 대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한 마디 권장할 염(念) 또한 애시당초 없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피학습자들로서는 배우는 현장을 우선은 싫어하기 마련이다. 필요한 줄은 알지만, 귀찮고 따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수의 채근 없이 학생들 스스로 그런 곳에 가기를 바라는 것은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 격이다. 더구나 교수가 그런 곳을 기피한다는 사실을 눈치 빠른 학생들이 어찌 모르겠는가? 교수들이 학회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는 대학의 해당 학과가 서서히 망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반대로 학회에 열심히 참여하는 대학의 해당학과가 흥할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교수의 학회 참여는 연구활동인 동시에 또 다른 모습의 교육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인문학 분야 학회의 발표장이 썰렁한 것은 해당 전공의 교수들이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수들이 참여하면 자연스럽게 후학들이나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인문학 분야 학회들의 몰락은 인문학 자체의 몰락을 가속화 시키고 있으며, 그 책임의 상당부분을 교수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대학들이 망하지 않으려면 대학을 진정한 학문의 생산처로 만들어야 한다. 진정한 학문은 진정한 학자들을 대우하고 키워낼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하는 데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제부터라도 도구적 인간의 육성은 길거리에 나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학원에 맡겨야 한다. 학회를 육성하고 학생들을 학문의 바다에 풍덩 빠뜨려야 한다. 그러려면 교수들의 학회활동을 장려해야 하고 자존심이나 체면 때문에 학회활동을 등한히 하는 교수들에게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 학회활동을 장려하는 방법에 무엇이 있을까? 우선 교육부나 대학당국은 학회를 인재의 풀(pool)로 생각해야 한다. 대학에서 인재가 필요할 경우 괜히 뒷구멍으로 연줄에 따라 채용하려 하지 말고, 우선 학회에 자문하라. 또한 해당 학과의 교수나 직원을 해당 학회의 학술발표 현장으로 내보내어 점 찍어둔 인재의 면면을 스크린하라. 그런 분위기만 이루어진다면 지금 한국의 학회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고질병들은 일거에 고칠 수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 아무리 강심장이라 한들 학회에 참여를 안할 수 있으며, 아무리 어리석다 한들 제자들을 학회에 안 내보낼 것인가?

한국의 학계가 공멸을 자초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학회의 활성화에 나서야 한다.


200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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