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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떠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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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30 조회 13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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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떠나기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쓰레기들을 버리는가. 자고 일어나면 집안 곳곳은 물론 마을의 공터마다 쓰레기로 넘쳐난다. 급기야 쓰레기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수도권에 1천만이 넘는 인구가 모여 살면서 이 쓰레기의 문제는 심각하다. 김포 어디엔가 서울시민의 쓰레기장이 있다고 하는데, 그곳 주민들이 툭하면 쓰레기차가 들어오는 것을 금하는 모양이다. 그 때마다 언론에서는 집단이기주의니 뭐니하면서 비판을 해대지만, 생각해보라. 조상 대대로 살아오는 내 고향 땅이 타 지역 인간들의 쓰레기나 모아두는 곳으로 전락해버렸다면, 그 누가 유쾌하겠는가. 그러니 섣부르게 입싼 말들을 해댈 일도 아니다.

우리 몸도 필요없는 물건들을 쉬임없이 밀어낸다. 대소변은 말할 것도 없고 깨끗한 옷을 적시는 땀이나 가끔씩 뿜어대는 방귀 역시 우리 몸이 방출하는 쓰레기들이다. 물론 그 쓰레기가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거름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도 적당한 양일 때 가능한 말이다. 요즈음 우리의 강과 바다, 공기나 지하수를 오염시키는 주범이 바로 이 배설물들임을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하다. 오랜 세월 쓰레기를 방출하다보면 난지도와 같은 인공섬이 생겨 난방용 가스도 만들어내고 온갖 나무도 키워내기는 하더라만.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리의 자연이나 생활환경이 오염되었을까를 생각해보라. 그러니 쓰레기로 인한 삶의 괴로움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는 버리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어느 경우에는 정작 버려야 할 것은 한사코 쥐려하고 버리지 않아도 좋을 것은 선선히 놓아버리는 광경 또한 목도하기 어렵지 않다. 다 버림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는 경우도, 애써 잡으려다가 많은 것을 놓쳐버리는 모습 또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잡을 것인가. 한 인간이 꾸려나가는 삶의 가치를 결정하는 척도가 바로 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우리는 보잘 것 없는 명성이나 부, 권력을 한사코 부여잡으려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에 수반되는 ‘욕됨’은 ‘영화로움’을 뛰어넘기 마련이다. 부와 권력을 헌 신짝처럼, 아니 쓰레기처럼 내팽개친 옛날의 은사들이 요즈음까지 존경받는 것을 보라. 한 가닥 명예와 부, 권력을 쫓아 부나비마냥 얼찐대다가 오늘날까지 역사의 더러운 페이지를 장식하는 그 옛날 치욕의 군상들을 보라.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움켜쥐어야 하는지는 명백해지지 않는가. 우리는 흔히 쓸모 없는 것, 값 없는 것 버리길 좋아하고 비싸고 귀한 것 움켜쥐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무엇이 값나가는 것이며 무엇이 쓸모없는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유한한 존재, 인간이 운명적으로 갇혀버린 한계다.

인간은 쉴 새 없이 ‘떠나는’ 존재다. 태어나는 순간 그 안락하던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야 했고, 유치원에 초등학교에 중학교에 고등학교에 대학교에 가면서, 외지로 유학을 가면서 어머니의 자궁처럼 편안하던 집을 떠나야 했다. 결혼하면서 부모 형제를 떠나야 했고, 아이들을 기르면서 옛날의 자기처럼 아이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아야 했으며, 늙으신 부모의 죽음을 지켜보고 떠나보내는 주체가 되어야 했다. 그 사이에 ‘100년도 못 사는 인생’이라지만, 8∙90 살기는 어디 수월하던가? 그러길래 옛날 어른들은 “무덤에 가기 전엔 몸을 백년 보존하기 어렵고, 무덤에 가고 나면 무덤을 백년 보존하기 어렵다(未歸三尺土 難保百年身/旣歸三尺土 難保百年墳)”고 한 것이다. 석자 깊이의 무덤에 묻히면 그 뿐인 인생, 무엇을 바라서 그리도 아웅다웅 욕심들을 부리는가. 버리면 마음이 편해지고, 마음이 편해지면 세상이 모두 내 집안 같은 것을. 그러길래 부처는 ‘무소유(無所有)’의 즐거움을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깨우치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잡을 것인가. 하루살이같이 허무한 인생살이에 붙잡아 둘 것은 그래도 친구들의 정겨움과 후배들의 존경이다. 친구와 후배들로부터 호감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자신의 자그마한 이익을 취하기 위해 ‘해서는 안될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가끔은 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지갑을 먼저 내어놓는 여유와 호기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후배와 후학을 위해서라면 슬그머니 자신의 자리를 비켜줄줄도 알아야 한다. 후학이나 후배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자그마한 이익을 취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추악하고 가련하다. 도리에 맞지도 않은 욕심을 내려다가 실패한 뒤, 후배들을 원망하는 모습 또한 말할 수 없이 추하다.

‘말 없이’ 떠나는 자에게서 철학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후배들이 힘써 잡아도 미소 속에 조용히 뿌리치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어른의 모습을 보고 싶다. 자신이 몸 담았다하여 그곳이 바로 자신의 소유는 아니다. 후배들이 자유롭게 그들만의 시대정신으로 새롭게 고쳐나가야 할 그들만의 보금자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역시 그곳은 잠시 의탁한 장소일 뿐이다. 내가 몸 담았던 곳이니 내게 연고권이 있다거나 내 사람을 들어 앉혀야 한다는 주장은 참으로 쓰레기같은 욕망의 노출일 뿐이다. 더구나 내가 네게 잘 해 주었으니 너도 내게 똑 같은 방식으로 보답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치졸한 일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의 높고 낮음은 떠날 때와 이익을 만났을 때 알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미련 없이 떠나는 것과 이익을 흔쾌히 포기하는 것이 아무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엔 훌륭한 사람이 드문 법이다. 머리 속에 든 것이 많다고, 호주머니에 든 것이 많다고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미련 없이’, 버릴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사람이다. 내가 버리면 후배가 그것을 주워 소중하게 가꾸다가 그 또한 때가 되면 버려야 한다. 그것을 그의 후배가 또 받아서 소중하게 가꾸어갈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세상은 점점 나아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버려야 한다. 생활 쓰레기를 마음대로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얻기 힘든 것을 버림으로써 더 귀한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가치 없는 생활 쓰레기는 가급적 버리지 말고 재활용을 거듭하다가 최후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버릴 일이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가치있는 것들은 쓸모 없어지기 전에 버릴 일이다. 누군가가 주워서 소중히 간직할 수 있을 때 버릴 일이다.

근래 나를 슬프게 하는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났다. ‘버리고 떠나기’, 평범하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이 진리를 그 분은 왜 생각지 않는 것일까. 일생 가꾸어온 당신의 멋진 풍모를 왜 마지막 한 순간에 볼품 없이 일그러뜨리시는지, 오호 통재라.

우리는 때가 되면 ‘버리고 떠날 ’일이다.
<2002. 8. 19.>


200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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