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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콘돌리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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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31 조회 14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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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콘돌리자여!


어제 밤이 크리스마스 이브이어서였는가, 아프리카 어느 오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수녀들의 이야기가 TV를 통하여 방영되고 있었다. 장면 하나하나, 이야기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들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언뜻 지나간 장면 하나는 지금도 내 가슴에 찡하니 남아있다. 바로 수녀들이 기거하는 가건물 벽에 걸린 사진이었다. 바로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의 아프리카 버전인 셈이었다. 하얀 얼굴, 파란 눈, 우뚝한 코의 마리아와 예수가 아니었다. 번질번질 까만 피부의 어머니와 그녀의 품에 안긴 까만 아기가 세상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왜 오늘날까지 우리가 까닭없이 백인우월주의의 그늘에서 주눅들어 살아야 하는지, 덩달아 우리보다 색깔이 더 짙은 사람들을 까닭 없이 멸시해야 했는지 바로 그 이유가 그 사진 속에 응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한 번도 황색의 피부와 직모(곧은 머리털)를 갖춘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를 본 적이 없었다. 마리아와 예수, 아니 예수님의 아버지와 예수님의 후손들은 언제나 백인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백인은 외경의 대상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선(善)의 상징으로 우리의 마음에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살아오는 과정에서 어떻게 해적질을 했고, 인류의 보편가치에 대하여 어떤 만행을 저질렀건 그들은 2000년의 세월 동안 외견상 고상한 문화와 전통, 그리고 힘을 길러왔다. 지금 바야흐로 그 힘을 가지고 인종시장의 최우월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의 생존이념인 자유민주주의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우리를 구해준 것은 백인으로 상징되는 미국이라고 믿고 있다. 정작 그런 위기를 만든 장본인이 그들인 줄은 모르고. 그러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백인들은 구세주 예수와 구한주(救韓主) 미국인의 이미지가 겹쳐 '감히 대항해볼 수 없는‘ 외경의 대상으로 굳어진 것이다.

세월이 좋아져 우리가 돈도 제법 갖게 되고 촌티 또한 제법 벗게 되자 미국을 비롯한 백인 지배 국가들도 우리를 뜯어낼만한 대상으로 생각했는가, 교역에서의 상호주의 아니 더 나아가 막대한 이윤추구의 대상이 되어줄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순진한 정책 담당자들과 국민들은 협상의 테이블에서 주판알을 튀기는 저쪽의 프로들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세상에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이럴 수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신을 못 차리고 지금껏 그 백인들을 구세주 바라보듯 하고 있다. 백인으로 그려진 성모마리아와 예수의 사진 때문이다. 유색인종에 대한 우리의 까닭없는 차별 또한 여기서 연원된다고 볼 수는 없을까? 왜 우리의 성당이나 교회에는 황색의 성모마리아와 예수를 모실 수 없는가?

이와 관련하여 꽤 오래 전 미국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인기 가수 마이클 잭슨이란 녀석이 몹쓸 약으로 자신의 피부색을 탈색시키려고 했던 일이다. 그 약이 별로 신통치 않았었는지, 결국 그의 얼굴은 별 볼 일 없게 되어버렸다고 하며, 사진을 보아도 그런 것 같다. 그런 약을 쓰면 그 까맣던 얼굴이 마돈나처럼 하얘질 줄 알았던 것일까? 거기까지는 아니라 해도 조금이나마 탈색된다면, 누우런 얼굴의 우리들처럼 까만 흑인들에 대하여 상대적 우월감이나마 가질 수 있다고 보았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열등감이다. 그런 열등감은 우리나라에서 화장품 회사들의 돈벌이에 적절히 이용되고 있다. 방송과 각종 활자매체에 등장하는 화장품 광고문의 핵심 화두가 바로 ’미백(美白)‘이다. ’아름다움과 백색‘이란 말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백색‘이란 말일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전자보다는 후자의 의도로 만들어 쓴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그 미백이란 말이야말로 참으로 황인종의 색깔 열등감을 교묘하게 건드린 용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얼빠진 이 땅의 여인들은 그 진위를 확인할 생각도 아니하고 온통 ’미백‘의 주제를 담고 있는 화장품 광고의 카피만을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얼굴이 ’미백‘하기만 하면 그 옛날 클레오파트라나 양귀비가 누리던 영화와 행복을 독차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지, 월급봉투의 두께를 헤아릴 여유조차 없이 덤벼든다.

우스개 비슷한 이야기를 하나만 더 끼워넣기로 하자. 우리나라가 근래 들어 이렇게 어려워진 이유 중의 하나로 ‘백색 지향의 미용’ 풍조를 드는 사람이 있다. 모두 희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여자나 남자나 다 똑같다는 것이다. 특히 신입사원을 뽑을 때, 능력 보다 얼굴을 선호하는 이 땅의 천박한 기업문화는 우리나라가 전통적으로 가꾸어 오던 적극적이고 활달한 기상을 송두리째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억척스럽게 삶의 현장에 나가 발로 뛰어야 하는 입장에서 도대체 언제 미백을 추구할 수 있단 말인가?

미국의 대학에 가서 놀란 일들 가운데 하나는 여학생들의 얼굴에서 요란한 화장끼를 찾아볼 수 없고 옷차림 또한 지저분에 가까울 정도로 검소하다는 점이다. 읽고 써야할 과제들이 산더미 같은데 얼굴에 화장품이나 쳐바를 시간이 도대체 있단 말인가? 비록 화장끼는 없고, 머리 또한 대충 빗어넘긴 표정들이지만, 책을 한 아름씩 안고 다니는 그들의 모습이 내 눈에 아름답게만 비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학기중의 한국 대학들에 한 번 와보시라. 여학생들의 그 고운 얼굴이 화장품으로 더껭이진 모습들을 한 번 보면 오늘날 이 땅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정신에 공부는 제대로 할 것이며, 혹시 피부에 태양이 와 닿을까 스포츠인들 제대로 할 것인가. 얼굴이 탈까봐 운동도 못하고 살이 붙을까 밥도 제대로 못 먹어 수척하고 가냘픈 몸매에 화장품이나 쳐 바르느라 언제 공부인들 옳게 할 것인가? 공부는 고사하고 결혼을 한다한들 튼튼한 2세는 어떻게 만들 것이며, 2세를 만든다 한들 과연 자신과 다른 강인한 인간으로 만들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런 점은 남자도 마찬가지다. 먼 친척 형이 한 사람 있다. 공직에 있으면서 체격도 좋고 얼굴도 미남이고, 미백 관리를 잘 해서인지 피부 또한 허연하다. 그러나 고심참담 모든 정성을 쏟고 있음에도 머리털은 상당히 빠져 머리 속이 부분부분 드러나기 직전이다. 말하자면 이 형의 일상 가운데 반은 업무요, 나머지 반은 용모를 가꾸고 유지하는 일이다. 아니 어쩌면 후자에 대부분의 신경을 쓰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더운 여름에는 아예 바깥 출입을 못하고, 불가피하게 외출할 경우라도 긴 팔 옷에 선크림 등 중무장을 해야할 정도다. 그러니 스포츠를 즐긴다는 것은 꿈에도 바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잘 먹어서 그런가 배가 자꾸만 나오고, 성인병을 유발시키는 각종 지수들이 나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만약 그 상태가 이대로 진행된다면 아마 그 형은 결국 크나큰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처방은 단 하나, ‘미백’주의로 대표되는 소극적 몸 가꾸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그 몸으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다. 피부야 좀 타면 어떠리, 운동을 해야한다. 머리털이 거추장스러우면 잘라버릴 일이다. 그 분은 그래야 주어진 수명이나마 누릴 수 있다. 피부가 탈까봐 바깥 출입도 삼가고, 머리털이 어떻게 될까봐 걸음도 살살 걸으니 시시각각 쌓이는 뱃살은 어떻게 뺄 것이며, 혈관 벽의 지방질은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 이 땅의 남녀 모두가 오늘날의 여대생들이나 그 친척 형과 같다면, 쾌재를 부를 것은 화장품 회사들이고 무너지는 것은 이 나라의 미래다.

자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볼까.

세계를 제 손 안에서 주무른다는 오만함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눈 꼴 사나운 일들만 뺀다면 미국은 참으로 위대한 국가다. 그 점을 나는 1년간의 미국 체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1년 동안 백인우월주의나 그로 인한 인종차별을 거의 느껴보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곳이 많은 인종들의 집합소인 캘리포니아 남부지역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양한 색깔의 인종들이 미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 제도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내게는 ‘거대한 용광로’ 처럼 생각되었다. 제멋대로 생긴 온갖 광물들과 고철들을 단일한 성질의 쇳물로 녹여내는 용광로, 그 용광로의 뜨겁고 강한 이미지가 내 마음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 때는 우리나라에서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던 인종차별이 사회문제로 속속 드러나던, 바로 그 시기였다. 지금도 그 문제는 전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지만.

사실, 인종에 대하여 우리만큼 차별의식을 갖고 있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혹자는 단일민족의 유구한 전통에 그 원인을 돌리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세계화’를 부르짖는 시점에도 그런 편견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하기야 이 통탄할만큼 좁아터진 나라 안에서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사람들이 서로 저 잘났다고 까부는 모습들을 보면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니, 우리와 피부색이 다르고 말조차 다른 외국인들, 특히 우리보다 못나 보이는 외국인들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일쯤이야 불문가지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심정적으로 맘에 안 드는 인종이나 특정 지역의 사람들에 대하여 까닭없는 적개심을 배우면서 살아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흑인에 대한 편견이다. 우리도 유색인종이면서 좀더 색깔이 짙다는 것 때문에 늘 ‘깜둥이’라는 비칭으로 그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몸에 밴 인종차별의식은 어디에 가도 바뀔 수 없다. 나는 미국에 있는 동안 ‘재미 한인이민문학’을 집중적으로 조사, 연구했다. 자연스럽게 한인들이 미국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을 살펴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1992년 LA지역의 흑인폭동 사건을 간과할 수 없었다. 그 사건을 조사하여 분석한 대여섯 권의 책을 보게 되었는데, 그 책들의 공통된 지적사항은 바로 ‘흑인과 한인들’의 갈등이었다. 상식적으로 흑인들은 백인들을 테러와 응징의 주된 대상으로 삼았어야 할 것 같은데, 사실은 한인들이 그 주된 대상이었다. 흑인들에 대하여 갖고 있던 한인들의 인종적 편견을 그 사건의 촉발 요인으로 분석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인과법칙의 정확성이야말로 지역과 시대를 초월한다는 이 무서운 현실을 나는 그곳에서 확인했던 것이다. 그 책들의 논리에 의거하여 유추하자면, 어려서부터 흑인들을 ‘깜둥이’로 비하하던 우리가 이 인종의 용광로에 와서도 융해되지 않은 채 겉돌다가 그 뜨거운 불맛을 보게 되었다는 것 아닌가?

나는 그곳에서 여러 명의 흑인들을 만났지만, 잊지 못할 한 사람이 있다. 자신을 토미라고 소개한 동네 테니스장의 환경 관리인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새벽같이 그곳에 나가 벽치기를 즐겼다. 그 때마다 그는 구불텅한 그곳 아름드리 소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있다가 나를 맞곤 했다. 그는 참으로 부드럽고 예의 바르며 친절했다. 나이 탓인가 느릿느릿 말하는 그의 영어가 참으로 호감이 가는 것이었다. 그는 테니스장이나 청소하고 관리하는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백인들에 대하여 비판이라도 한 마디 할 법 하련만, 그는 누구를 원망하는 적이 없었다. 언젠가 우리 가족이 샌프란시스코를 다녀오고 나서 나는 그를 만났다. 나는 그가 당연히 샌프란시스코를 가보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자신은 이곳에 태어난지 아직 바깥 여행을 해보지 못했노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도 가볼 곳이 너무 많다며 장황하게 설명하려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이유없이 부끄러워짐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토미를 비롯한 몇 사람과의 간헐적인 만남을 통하여 내가 갖고 있던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을 일소할 수 있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부시는, 가장 먼저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라는 젊은 여성을 자신의 안보보좌관으로 지명했다. 말하자면 콘돌리자가 부시 정권 하에서 미국의 군사와 외교를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놀랍도다. 검은 피부에 미혼인 그녀의 나이 마흔여섯. 나는 마흔다섯이니 내 또래가 아닌가. 그녀의 이력을 보자. 그 매력적인 이름 콘돌리자는 ‘부드럽게(condoleezza)'에서 따왔을 만큼 음악선생이었던 아버지의 촉망이 대단했던 듯 하다. 15세에 콜로라도의 덴버대학에 입학하여 음악공부를 시작했으나 국제정치 분야로 전공을 바꾸어 19세에 학부를 졸업하고 스물여섯에 소련 및 동유럽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매들린 올브라이트의 부친인 조짚 코벨교수로부터 집중 지도를 받았고, 미 국무부에서 인턴으로 근무한 그녀는 81년부터 스탠퍼드대학교수로 자리를 잡았고, 레이건 행정부시절부터 국방부 자문역을 수행했으며, 87년에는 소련과의 핵무기 감축협상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89년부터 부시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소련 및 동유럽 담당 책임자로 일했으며 부시 전 대통령과 고르바쵸프 소련 대통령과의 전략무기 감축협상에 실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현재 스탠퍼드대학의 행정담당 부총장으로 있으면서 최근 선거 기간 중에는 부시 후보의 외교 안보분야 가정교사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인재를 알아보고 키울 줄 아는 미국사회에서 나올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콘돌리자다. 우리가 그렇게도 멸시해 마지 않는 흑인에, 여자에, 더군다나 40대! 우리나라 같으면 어땠을까? 탐욕과 자기 기만의 함정에 빠져 경세제민의 자격을 갖춘 젊은 인재들을 아예 밟아버리길 다반사로 하는 이 땅의 50대, 60대, 70대들이 과연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라야 조직이야 어떻게 망가지든 내 욕심만 채우고, 내 가족 내 자식만 배불리 지내면 된다고 믿는 이 땅의 거룩한 파워집단 노인들이여! 그대들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왔으며 살고 있는가?

콘돌리자여, 당신과 비슷한 나이의 나는 이 좁은 나라에서 몇몇 꾸물대는 소인배들과 함께 악다구니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또 하나의 소인이요. 갈증 속에 죽어가는 사막의 여행자가 어딘가에 있을 오아시스를 꿈꾸듯, 이 참담한 현실 속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와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의 갈증을 달래고 있는 중이외다. 미국 대학 열람실의 차가운 정밀(靜謐) 속에서 매섭게 책장을 노려보던 검은 피부의 여학생을 나는 잊지 못하오. 그녀의 옆 모습과 오늘 파안대소를 하고 있는 당신의 앞 모습을 연결시킬 경우, 그게 분명 당신 집단이 가꾸어가는 미래의 모습이라고 보아도 되겠소? 비록 미백은 아니지만, 굴곡진 얼굴에 뚫린 매서운 눈매로부터 세상을 경영하고자 하는 의지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듯 하니, 부럽고 무서울 뿐이오. 세상을 경영하는 공부를 해오지 못한 나로서는 당신의 기사를 읽으며 이 자괴스러움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망지소조하고 있다오. 당신과 함께 백악관 전략기획담당 고문으로 발탁된 43세의 여인 캐런 휴즈(Karen Hughes), 백악관 법률고문으로 발탁된 45세의 라틴계 사나이 알베르토 곤살레스(Alberto R Gonzales) 등은 미국이 야심적으로 드러낸 ‘꿈의 트리오’라고나 해야할지요? 당신이야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미국의 국익을 위해 뛰겠지요? 나도 내가 하는 분야에서 내 나라의 국익을 위해 노력해볼 생각이오. 당신과 같은 또래로서 당신과 같은 젊은 의지를 불태우면서 말이오. 내 주변의 늙은이들이 어떤 탐욕을 부린다 해도, 난 적어도 그런 건 배우지 않을 작정이요. “떠날 때는 말없이”, 떠남의 미학을 나는 내 몸으로 보여줄 것이오. 아마 당신도 현실의 벽을 많이 느끼겠지요? 아무리 그곳이 미국이라 할지라도 푼수같은 노인들이야 왜 없겠소? 그럴 땐 언론을 통해서라도 기술적으로 투정좀 부려 보시오. 그럴 때마다 내가 위로의 메일 정도는 보내드리겠소. 혹 시간이 나신다면 답장을 주시구려. 그래도 합리주의로 뭉쳐진 그곳이니 이곳 늙은이들의 몰상식만이야 하겠소?

어쨌든 건투를 비오. 콘돌리자여!


200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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