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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35 조회 13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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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기초학문분야 교수님들께
- 선비정신을 회복합시다!

 

대학교수 노릇하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는 막연하나마 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살아 있었다. 박봉에 힘 없는 존재이긴 하나 내 자식을 인간적으로 사회적으로 키워주는 고마운 분들이란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부모로서 자식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들면 어렵게 어렵게 '선생님'을 찾아뵙고 상담들을 할 줄도 알았다.

그러나 시절은 사정없이 바뀌었다. 선생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시련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자유주의-실용주의 바람과 정보통신의 끝 없는 발전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던 전통적 인간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선생들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점이 드러나게 되었고, 자연히 돈이나 권력으로 움직여볼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점 또한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자신의 아이들만은 공주나 왕자처럼 키우고 싶다는 욕구가 신세대 부모들로부터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욕구에 부응할 수 없는 것이 학교의 사정이다. 국민들의 수입이 전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의-식-주의 수준 또한 괄목할만큼 향상되었다. 그러나 이 땅의 지도층이나 국민들 대다수는 자신들의 안락함만 추구할 줄 알았지, 늘어난 수입만큼 교육에 투자하는 데 지나치게 인색했다. 뿐만 아니라 교육에 대한 투자를 바보스런 짓으로 여긴 정치인과 관료계층의 저열한 국가관이나 시대의식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그저 "애들 모아놓고 몽둥이질하며 주입식으로 가르쳐 과정만 끝내주면 그게 바로 교육이려니" 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들이 보릿고개 시절에 통과한 학교교육이 언제까지고 유효하리란 착각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을 틀어야 하고 겨울에도 땀을 흘릴 정도로 난방이 되어야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그 뿐이랴! 옛날의 안방보다도 더 깨끗한 화장실에서 변을 보는 아이들이고, 먹을 게 지천이어서 무얼 먹일까를 놓고 부모들이 고심하는 세대다. 물론 아직도 이 사회의 그늘에는 얼음 어는 냉방에서, 파리 날아다니는 여름의 골방에서, 하루 한 두끼 라면으로 시장끼를 달래는 소년 소녀 가장들도 있긴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먹고 사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그렇게 잘 먹고 잘 입는 아이들이 육칠십년대의 수용소같던 학교로부터 크게 바뀐 것 없는 학교에 모여 생활한다. 선생의 말이 먹혀들어갈 리 있는가?

개뿔도 베풀줄 모르는 인간들이 내 아이만은 왕자로 공주로 대접받길 바라는 군상이 오늘날의 학부모들인데, 그들의 입에서 어느 한 순간이라도 학교에 대하여 선생님들에 대하여 고운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부모들의 입에서 수시로 흘러나오는 그런 험담에 세뇌되는 것은 자신들이 왕자로 공주로 대접받길 원하는 자녀들일 뿐이다. 그 녀석들이 학교에서 마주치는 교사들은 이미 존경해야 할 선생님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모보다 사회적 지위나 급료 면에서 몇 수 아래인 생활인들일 뿐이다. 더구나 자칫 한 눈 팔면 성적 평가 등으로 내게 큰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이해관계의 상대방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곰같이 덩치들만 커버린 아이들이 좁고 불편한 교실 안에서 복작대며 크게 나아진 것 없는 선생들로부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아이들이요 부모들이다. 그런 아이들에게서 부모들에게서 오늘날의 선생들은 어떻게 존경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면에서 초중등학교 선생님들보다 대학교수가 낫다고? 천만에 말씀이다. 하긴 좋은 점이 분명 있긴 하다. '자식 대학만 들여놓으면 이제 교육은 끝'이라고 착각하는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무지가 이 시대 최대의 비극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무관심 덕분에 교수들은 그나마 잠시라도 마음 편케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른다. 자식이 초중등학교 시절에는 돈봉투나 선물들을 싸들고 뻔질나게 학교를 찾아다니던 극성 부모들을 대학에서는 만날 수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만약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자신의 자식들이 다니는 초중등학교에 대한 관심의 백분지일만큼만 대학에 쏟는다면, 대학당국이나 교수들은 아마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지금의 대학교육이 엉망이기 때문이다. 정책도 엉망, 시설도 엉망, 교수도 엉망, 교육내용도 엉망이다. 미래에 대한 비젼도 없다. 그저 어떻게 큰 건물 지어 외부로 그럴 듯 하게 자신들을 과장해 보이고, 어떻게 학생들에게 아부할까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나마 돈줄인 학생들이 떠나지 않아야 이 거대한 공룡집단을 유지하고 너와 나의 밥줄이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교수집단이 그런대로 괜찮게 보이겠지만, 기실 내면으로는 비참하기 그지 없다. 더구나 학생들에게 아부하여 그들이 등록금 싸들고 내 학교에 찾아오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이 바로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란 못된 슬로건이다. 도대체 대학교육의 수요자란 누구란 말인가? 판단력이 전혀 서 있지 못한 학생들이 수요자란 말인가? 참으로 웃기는 발상이다. 교육의 수요자란 국가와 사회, 그리고 학부모다. 이들이 공급자인 대학에 대하여 양질의 교육을 요구하면 대학은 학생들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잘 가르쳐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 갖는 진정한 의미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학생들은 우선적으로 쉬운 과목, 돈 될 듯한 과목만 원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대학당국은 개인의 미래,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며 학생들의 학문적 편식을 막아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학생들의 무사려한 충동에 편승하여 미친 년 장단에 춤추듯 한다면 이미 대학으로서의, 대학교수로서의 기본적 소임을 망각한 처사다. 대학당국은 학생님들(?)의 의향을 챙기기에 부심하고, 걸핏하면 교수들을 교육개혁의 걸림돌로 몰아세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니 곤혹스러운 것은 교수들 뿐이다. 약간이라도 깐깐하게 진행한다싶은 강의는 아예 학생들이 외면하니 폐강을 면하기 어렵다. 좀 야하거나 헐렁할 듯한 제목의 강의에만 몰리는 학생들 가운데 일부라도 끌어오기 위해서는 교수로서의 자존심이나 체통(?)을 아예 버려야 한다. 강의실에서는 코미디언이 되어야 하고, 학점을 마구 퍼주어야 한다. 그것 뿐이랴! 잦은 리포트나 출석체크 등은 교수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요인들로 첫 손가락에 꼽힌다.

학교 당국은 교수들이 외부로부터 되도록 많은 연구비를 따오기만 기대한다. 최근 이공계 교수들은 수억대 혹은 수십억대의 연구비들을 심심치 않게 따온다. 그러나 인문대를 필두로 한 기초학문 분야의 교수들은 기껏 기백만원대의 연구비를 따오기에도 힘이 벅차다. 그러니 이공계 교수 한 명의 연구비로부터 학교가 챙기는 이른바 오버헤드차지만 가지고도 인문대 교수들 여러 명의 연구비를 지급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교수들이지만, 이공계 교수들과 인문계 교수들의 차이란 하늘과 땅일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이들을 바라보는 관리자의 눈이나 잣대가 같을 리 없다. 알게 모르게 차별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국가나 대학이 기초학문 분야를 크게 배려해주는 것도 아니다. 이 나라의 교육정책 당국이나 대학 관리자들이 기초학문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을 리 없으니 애당초 그런 배려까지 기대할 필요조차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부연구비를 많이 따와서 관리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공계 교수들이라 하여 마냥 행복한 것 같지는 않다. 연구 결과가 어찌 마음 먹은대로 나와주는 것이며, 또 관리자들의 관심이나 사랑이 한결같을 수 있으리오? 그들의 관심 또한 돈의 액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 많이 따오는 사람은 많이 따오는 대로, 적게 따오는 사람은 적게 따오는 대로 기분 상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언제나 많이 따올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런 까닭에 대학교수들이 자존심을 세우기란 애시당초 글러먹은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이 시대에 교수, 특히 기초학문 분야의 교수가 되면서 돈에 목표를 두었다면, 그는 분명 길을 잘못 잡은 것이다. 대개 그런 사람들일수록 돈으로 환산되는 시장가치의 고하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며 그에 따른 컴플렉스를 심하게 느끼는 사람들이다.

최근 서울대로부터 흥미로운 사건 하나가 터져 나왔다. 대학본부측이 올해 `교직원수첩'을 제작, 배포하면서 지금까지 수첩에 기록돼온 대학과 학과 순서를 바꿔 놓은 데서 빚어진 사건인 듯하다. 즉 예년에는 당연히 인문대-사회대-자연대 순이었고, 이 점은 다른 대학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올해 들어 수록 순서를 대학이나 학과명의 '가나다' 순으로 바꾸어 놓은 모양이다. 이에 대하여 기초학문 분야의 교수들이 크게 반발하고 나서, 이미 제작과 배포가 끝난 수첩을 반납했다는 소식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대학당국이 학과 수록을 '가나다' 순으로 한 것이 어이없는 게 아니고, 그에 대한 해당 분야 교수들의 반발이 어이없다는 것이다. 학과명을 '가나다' 순으로 하면 어떻고, '다나가' 순으로 하면 어떠리?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가나다' 순에 따라 가정학과가 국문학과보다 앞에 나왔다 하여 특별히 가정학과를 우대하는 것도 아닐테고 국문학과를 홀대하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언제는 정책당국이나 학교당국으로부터 특별히 우대받고 살아 왔던가? 국립대학의 수첩이라면 국민의 혈세로 찍어낸 것일텐데, 수록 순서가 바뀌었다고 폐기해서야 쓰겠는가? 이게 바로 요즘 대학교수들의 수준이고, 그들이 갖고 있는 시대적 컴플렉스의 실상이다. 그런 것쯤이야 대범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아량과 여유가 오늘날의 대학교수들에게는 대체로 결여되어 있다. 선비의 표본이어야할 대학교수들이 선비정신을 버린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누구 탓인지 알 수는 없으되, 결국 그에 관한 욕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비록 지금 약간 배가 고프다 해도 냉수 마시고 이빨 쑤실 정도의 오기와 패기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세상이 잘못 되면 어디까지 가겠는가? 세상이 변했다 하여 사람들까지 불신할 수는 없다. 개중에는 잘못된 것을 광정(匡正)하려는 지사들도 있는 법이니 세상이 제 궤도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순리다. 겨울이 길면 봄이 더욱 찬란한 법이며, 밤이 길면 아침의 태양은 더욱 빛나는 법이다. 음이 성하면 양이 쇠하기 마련이고 양이 성하면 음이 쇠하기 마련이다. 세상 이치란 그처럼 항상 돌고 돌게 마련이다.

서울대학의 기초학문 분야의 교수님들이여! 수첩 하나에 성깔 곤두세울 정도로 한가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좀 참고 기다리사이다. 세상의 질서는 내 마음 하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오. 숱한 모리배들이 무슨 수작을 부린다 해도 내 마음 하나 바로 갖고 바로 쓰면 되는 것이오. 조만간 좋은 시절이 돌아오리다. 그 때까지 은인자중하시고 제발 선비정신까지 내팽개치지는 맙시다. 국민들이 두 눈에 불을 켜고 여러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잊지 마시오.
<2002. 9. 9.>


200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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