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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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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36 조회 13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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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죽음

 

TV 속의 궁예가 죽은 지 여러 날이 지났다. 어두웠던 시절, 이 땅의 지배자들이 걸었을지도 모르는 극한의 길을 걷다가 그는 갔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생각할수록 찜찜하기만 하다. 아쉬운 점은 드라마의 제작자들이 '보리이삭을 훔쳐 먹다가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맞아 죽은' 궁예의 그 죽음을, 천하를 호령하던 제왕에게 걸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비장한 죽음'으로 개칠해놓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아무리 제왕이라 해도 권좌에서 떨려나면 민초들과 다를 게 없으며, 어느 시절이나 배고픔과 추위에 떨어온 것이 민초들의 삶 아니던가? 무엇 때문에 부자연스런 죽음까지 만들어 그에게 헌상해야 했을까? 물론 드라마 속의 궁예는 '만들어진' 존재다. 그래서 어떤 이는 사극을 팩션(faction)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교묘하게 결합한 조어(造語)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집필자나 제작자는 역사에 대한 왜곡의 논란으로부터 면책의 특권을 지닐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지금 사람의 눈으로 해석된 과거 사실들의 기록이 역사라면, 그리고 집필자 혹은 제작자가 캐릭터에 대한 지적 소유권을 완벽하게 주장할 수 없다면, 궁예에게 그런 거짓 죽음을 선사한 사람들이 대중적 비판으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시청자들 대다수가 사극을 역사공부의 교재로 삼고 있다는 점을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제작자들은 좀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궁예가 보리이삭을 훔쳐먹다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기록은 승자에 의해 쓰여진 것이기에 신빙할 수 없다는 입장이 궁예의 마지막을 비장미로 개칠한 어리석음을 합리화하지는 못한다. 물론 극의 초반부터 너무 강하게 궁예의 모습을 부각시킨 극의 진행상 그런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 부담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한 번 생각해보라. 예나 지금이나 역사 진행의 주축은 민초들이다. 그럼에도 민초들의 모습은 사극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숱한 전쟁에서 도륙당하는 것도 민초요, 몇 안되는 지배자들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는 것도 민초들이지만, 극 속에서는 그냥 편하게 생략해도 이야기 진행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하찮은(?) 존재들이다. 궁예의 종말이 다가오면서, 이 바닥 민초들 가운데 하나인 나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발 폭력을 휘두르던 지배자가 비참한 몰골로 민초들의 손에 응징당하는 모습이 가감없이 보여지기를 말이다. 유사이래 소수 지배자들의 도구로 말없이 복무해온 이 땅의 민초들이 궁예의 죽음을 통해 모처럼 카타르시스를 맛볼 수 있길 바랐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무망한 일이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조이며 공고하게 둘러쳐진 지배계층의 문화와 미학을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다시금 쓰디쓰게 반추하고 말았다.


200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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