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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식민지 학자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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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41 조회 18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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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식민지 학자의 고뇌

 

하나


최근 일부 철학자들이 힘을 합쳐 '우리말 철학사전'을 펴낸 일이나, 상당수 물리학자들이 함께 모여 물리학 용어를 우리말로 만들고 있다는 소식은 우리 학계의 과거와 현재를 반성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신선한 도발'로 꼽힐만하다. 근대 학문이 시작된 지 1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학계는 아직 식민 시절의 의식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조만간 그럴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본질적인 의미의 '근대화'는 실험되거나 이루어진 적이 없었으며, 애당초 그런 일을 추진할만한 세력이나 의식마저 없었던 점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적어도 말이나 글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학계는 그 나름의 투철한 의식을 보여준 적이 없다. 과연 현재와 같은 정체성의 상실을 어설픈 세계화의 미망으로 덮어버릴 수 있을까? 표면상으로는 식민상황을 벗어났으되 정신적으로는 그 상황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현실이 그래서 안타까운 것이다.



전공분야를 사색하고 그 결과를 말과 글로 드러내는 것이 학자들의 1차적인 임무라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대부분 '생각-말-글'의 모순적 고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말은 생각을 표출하는 1차적 수단이고, 글은 생각과 말을 가시화시키는 하나의 기호다. 그리고 이러한 말이나 글은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 새로운 생각을 촉발시킨다.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말과 글로 표현하고, 이것이 새로운 생각의 재료로 쓰일 때 우리는 '생각-말-글'의 선순환적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내 생각을 남의 말이나 글로 표현하여 남들이 수용할 경우에도 또 다른 파급 효과를 기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을 다른 사람들이 만든 용어나 개념을 빌어 표현한 말과 글이 다시 우리에게 수용되어 새로운 생각의 재료로 쓰이는 경우라면 어떨까? 우리의 의식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으로 쉽게 변질될 수 있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쉽게 벗어날 수 없다.
대체로 조선조 말기 이후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왜곡된 역사를 살아왔다. 그 요인을 두 가지로 요약하면 '외래문물의 일방적 수입'과 '식민상황'이다. 양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이면서 인과관계로 연결되기도 한다. 지금 정치 사회적으로도 식민상황은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고, 우리의 내면 세계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것은 바로 전자의 이유 때문이다. 역사상 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수출해본 적이 없다. 그저 일방적인 수입국이었고, 지금도 그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 주된 수입상들이 바로 학자들이다. 이미 강대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외국 문물의 철저한 '자기화'에 있었다. 우리는 일본인들을 모방의 귀재라고 폄하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모방을 통한 자기화에 성공한 것이다. 그 성공이 바로 그들의 현재를 이룬 원동력이다. 그들 역시 역사적으로 외래문물의 일방적 수입국이었으나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 지금까지 모방이나 수입에만 열을 올리며 자기 반성과 검증을 도외시해온 우리나라 학계의 처지에서 결코 그들을 비웃을 수는 없다. 일본인들이 명치 시대에 번역해놓은 서양의 용어들이 지금 우리 학문 용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이 땅의 학자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지금 이 땅의 학자들은 마음놓고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일본인들이 수입 번역해놓은 수 많은 용어들을 피해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서양의 문화나 학문, 혹은 그 용어들을 그럴 듯하게 번역한 저변에는 서양의 그것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철저한 이해와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고민이나 고통 없이 그들이 만들어 놓은 용어들을 일방적으로 빌어다 쓰기만 했다. 그 뿐인가. 최근까지 일부 인사들은 서양의 고전들을 번역한다고 하면서 기껏 일본의 번역서들을 갖다가 베끼기 일쑤였다. 흔히 중역(重譯)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서양의 고전들에 대한 일본식 해석을 그대로 옮겨놓는 작업에 불과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한 번도 우리의 주체적인 자각과 노력을 통하여 외국문물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던 셈이다.
표면적으로나마 식민상황이 해소된 이후에도 베끼기의 행각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 일본이라는 중개상만을 통하다가 이젠 선진국의 생산자들과 직거래하는 통로를 하나 더 개척하게 된 것이다. 대략 60년대부터 우리나라 학계에는 다양한 서구의 학설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횡행하게 되었다. 인문과학 사회과학 이학 공학 예술학 등등 무수한 학문의 분야들에서 뒤질세라 서양의 학문을 수입하기에 바쁘고, 부지런한 수입상들은 이 땅의 학계를 주름잡으며 기득권을 행사하기에 바쁘다.



한동안 '세계화'만이 우리의 미래를 보장할 듯 떠들던 적이 있었다. 세계화의 기본 개념조차 모르는 정치인들의 구호로부터 시작된 이 소동은 이 땅의 혼돈을 집약하여 보여준 비극적 사건이었다. 그들은 국적이나 자아 정체성의 포기가 바로 세계화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화란 무엇인가? 남에게 나를 열고 남을 받아들이는 것, 즉 나와 남 사이에 엄존하는 비생산적인 울타리를 없애는 것이다. 나와 남의 호혜적 공존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우선 내가 누구고 남이 누구인지 알아야 열든지 닫든지 할 것 아닌가? 이 땅에서 영어를 공용화하겠다는 발상이나 대학에서 전공강의를 영어로 하라는 최근의 발상은 속된 말로 '오줌 똥 못 가리는' 자들의 세계화 논리가 필연적으로 귀착되는 함정이다. 제 나라 말로 목이 터져라 소리쳐도 못 알아듣는 전공 강의를 영어로 하라니, 지금 제 정신들을 가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영어가 필요하면 영어교육을 제대로 하면 된다!
바야흐로 때 묻지 않은 몇몇 소장학자들 사이에 미미하나마 일고 있는 '우리 말로 학문하기'의 움직임은 그래서 소중하다. '우리 말로 학문하기'를 좀더 쉽게 풀자면 "우리 말과 글로 만들어진 용어로 학문하기"가 될 것이다. 동 서양을 막론하고 근대화가 '자아 각성'으로부터 일어난 정신 운동이라면,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땅의 근대화는 싹 트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이 땅의 깨어있는 학자들이 극소수라는 점이다. 당연히 그들의 말은 흔히 대다수 '그렇고 그런' 군상들의 웅성거림에 묻히고 말 우려가 크다. 학계의 기득권을 나누어 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말은 그렇다 쳐도, 우리의 글자는 만든 주체와 역사가 분명하고 효율적이라는 점에서 세계가 인정하는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단순히 공휴일로 지정하는 데 그칠 일이 아니다. 한국인이라면 오히려 어떻게든 그것을 '세계화'시킬 방안 마련에 부심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그럼에도 그나마 공휴일에서마저 제외시킨 사례는 이 나라의 학계 정계가 보여준 '몰자각'의 극치다. 주체적 자각 없는 공직자들이나 학자들이 이 나라를 잘못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무턱댄 한글전용론자들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일본식 용어이든 미국식 용어이든 한글로만 쓰면 된다는 듯한 논리를 빨리 벗어나야 하는데, 쉽지 않아 보인다. 아직 우리는 '감히' 우리말로 우리 학문의 용어를 만들어 쓸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언제까지 이 땅의 학자들은 어쭙쟎은 수입상 역할이나 지속할 것인가. 말과 글은 생각의 표현 수단이되 다시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을 일정한 방향으로 몰아간다는 점에서 '우리 말로 학문하기'는 우리의 정체성 회복을 위한 선결 조건이다. 암흑의 나락에서 헤매고 있는 이 땅의 학자들이 과연 언제쯤이나 근대화의 기치를 들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언제쯤이나 우리가 만든 '우리말 용어'로 학문을 하게 될 것인가.
<2002. 9. 9.>


200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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