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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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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44 조회 13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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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을 보며


 그 옛날 최치원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 견일은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고 못을 박았다. 아무리 최치원이 불세출의 천재이긴 했으나 천만리 물 건너로 유학 보내면서 아버지가 한 말 치고는 좀 지나쳤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의 아버지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애틋한 마음을 숨기면서까지 강하게 ‘격려해준’ 그 아버지의 훌륭함과, 그 말을 ‘약으로’ 잘 받아들여 끝내 성공한 그 아들의 훌륭함이 잘 어울려 천년 뒤인 오늘날까지 미담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교육열은 지나치게 뜨거웠고, 그런 교육열 덕택에 좁고 척박한 땅덩어리로도 다른 민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최치원 아버지의 교육열은 지금도 이 땅에서 반복되고 있다. 20세기부터 구미권 대학으로의 유학이 본격화 되더니 20세기말부터는 꽤 많은 수의 초중등학생들까지 그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교통과 통신의 수단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미국이나 캐나다는 비행기로 10시간이 훨씬 넘게 걸리는 먼 땅이다. 산 설고 물 선 그곳. 말도 통하지 않고 사고방식마저 너무 다른 그곳으로 고사리손을 흔들며 떠나는 자식들을 보는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이야 오죽하랴! 배고픔도 추위도 모른 채 매사를 부모의 보살핌에만 의존해 살던 철부지들을 저 먼 나라에 보내야만 하는 이 땅의 부모들이 가슴 가득 안고 있는 불안과 수심을, 비행기에 몸을 싣고 ‘룰루랄라’ 휘파람 불며 떠나가는 그 녀석들이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최치원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지금의 아버지들도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하라!”는 강한 주문을 내놓곤 하지만, 그들의 가슴 그득 고이는 ‘눈물’이야 자식놈들이 어이 알 수 있으리?

내일이면 큰 아이가 공부하러 집을 떠난다. 공부가 웬만하면 모두들 의대며 약대 등 돈 될 분야만을 찾는 시속(時俗)과 달리 ‘자신이 좋아하는’ 이공학에서 꿈을 이루겠다며 KAIST를 택한 그가 든든하다. 뿐이랴? 멀쩡한 청춘만 썩일 뿐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생각되는 ‘고3’을 건너 뛴 사실은 생각할수록 ‘곰지다.’ 이제 만으로 열여섯. 집 떠나던 최치원보다는 서너살 많지만, 어리기는 매 일반이다. 그의 면전에 대고 “10년 안에 박사학위를 못 따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매몰차게 말할 용기는 없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 그곳을 선택했다면, 분명 그 정도야 심중에 두고 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훨씬 멋진 인생의 계획을 갖고 있으리라 믿기 때문에 나는 담담한 마음으로 그의 건강과 행운만을 빌어줄 뿐이다.

나도 그랬다. 나는 만 열네살에 공부한답시고 고향을 떠났다. 고향 떠난 지 30년이 훌쩍 지났다. 무슨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지금의 나 자신을 생각하면 한심할 때가 없지 않다. 과연 그 나이의 나를 떠나 보내던 아버지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까? 평생 두 지겟머리 사이에서 땀 흘리며 살아오신 나의 부모는 부푼 마음보다는 걱정과 불안이 한 가슴 가득했을 것이다. 전화가 있나? 교통이 좋은가? 한 번 소식을 전하려면 20일 넘게 걸리던 편지가 유일했다. 30리길 면소재지의 우체국에나 가야 볼 수 있던 손잡이 돌리는 방식의 전화기도 우리에겐 무용지물이었다. 내가 전화를 받을만한 곳에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겨우 십대 초반의 ‘생촌놈’을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대도시로 무작정 보내놓고 가슴앓이를 하셨을 부모님의 노심초사를, 지금 내 아들을 ‘내 집보다 더 좋은 곳에’ 보내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그래, 그렇다. 자식이 어찌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으랴? 그리고, 알아주기를 바란들 무엇하랴? 그러나, 세상의 아들들이 이것만은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부모들 대부분은 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들에게 물질로 호강시켜줄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험한 세파 속에서도 자신의 두 발로 서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러나 이왕이면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민족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부모에게 자부심을 안겨 주는 것. 이 시대의 부모로서 그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2009-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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