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사회의 파수꾼 > 에세이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에세이

전통사회의 파수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06 조회 120회 댓글 0건

본문

전통사회의 파수꾼

 

몇 해전에 돌아가신 학계의 원로 한 분은 항상 큼직한 가방을 둘러메고 다니셨다. 그 속에는 노트, 녹음기, 카메라, 칼, 망치 등 없는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 '학문은 발로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다니셨다. 국문학은 물론 고문서학이나 도자기까지 섭렵하신 만큼 현장답사 또한 그토록 중시하신 듯 하다. 필자도 몇번인가 흉내를 내보려 한 적이 있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자료가 있다는 곳이면 열 일을 제쳐두고 찾아나선다거나 문헌들에 나타나는 지역을 남 몰래 찾아가는 일 등은 한 동안 그런 선학을 모방하고자 한 덕에 얻은 습관이다.

필자와 같은 국문학도에게 남달리 주어지는 혜택이란 대개 1년에 한 두 번씩이나마 학생들과 답사여행을 떠나는 일이다. 우리가 주로 찾게 되는 곳은 전통사회의 요소들이 얼마라도 남아 있는 자연부락이다. 그러나 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탐사하지 못하고 매번 장소를 바꾸는 것은 전통적인 요소들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는, 우리의 안목과 준비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한 번 이상 찾아갈 만한 매력이 없다는 데에 그 큰 이유가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있다. 우선 무형의 문화재들은 연례적으로 벌어지는 언론 매체나 정부 주최의 경연대회 덕분에 "세련된 모습"으로 속속 재편성되거나 치장되어 더 이상 원형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할머니들도 김매기 노래나 길쌈노래 대신 읍내 노래방과 라디오 혹은 텔레비전에서 익힌 신식 노래들을 통하여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려는 의욕들을 보이게 되었다. 텔레비전이 아낙네들의 눈물과 웃음을 번갈아 강요하는 것은 농촌이라하여 도시와 다를 바 없으니 할머니의 무릎팍에서 아이들의 귀로 전승되던 옛날 이야기도 더 이상은 남아날 도리가 없다. 동네에 초상이 나면 노소가 모두 모여 주검을 묻어주고 노래로 합심하여 달구질을 단단히 해주는 것이 전래 풍속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자리엔 동네사람들의 노랫소리 대신 굴삭기의 굉음만이 가득하다. 전기가 들어오고 버스가 마을 어귀를 돌면서 골짜기 가득 모여살던 '도깨비나 귀신들'도 모두 사라졌다. 무분별한 개발로 산중턱의 암벽에 새겨져 있던 글씨나 그림들이 사라진지도 이미 오래다. 지도에 올라 있지 않은 마을과 골짜기들도 동네 노인들의 흐릿한 기억을 통해서나 겨우 그것들의 이름이 지닌 전통사회의 흔적과 유래를 찾을 수 있을 따름이다. 동네에 몇 사람 남지 않은 노인들의 노리개 주머니 안 쪽 깊숙히 말라 붙어 있는 옛날 이야기들을 헤집어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더욱이 이것들을 찾아 나선 우리들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그들의 비웃음과 무관심은 앞으로 우리가 또 다시 전통사회의 흔적이나마 찾아보고자 나설 의욕을 가질 수 있을지 걱정스럽게 한다. 이와같이 전통사회의 표층은 완벽하게 사라졌고, 이면 또한 극심한 변이와 파괴의 마지막 단계에 놓여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다고는 해도 전통사회의 현재와 미래가 이처럼 암담하기만 할까? 필자는 지금까지 답사한 여러 지역들에서 꽤 희망적인 조짐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바로 젊은 교사들이나 공무원, 서예학원 원장 등을 비롯한 지역사회의 지식인들이 향토사학자로 활약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종래의 연로한 인사들에서 젊고 의식있는 지식인들로 향토사학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급속한 전통사회의 파괴가 불가피한 것이 대세라면, 지역사나 문화의 전승, 보존, 연구 등을 위해 소신있는 지역 전문가의 활약은 긴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한국의 향토사학자들은 생계를 도외시하고 지역사회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애착심 하나만으로 버티는, 이 땅의 정신적 파수꾼들이다. 전통과 문화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지 않는 그들의 순수함이 지역사회의 전통을 온전하게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21세기에는 국가와 민족의 正體性이 더욱더 강하게 요구될 것이며 그것이 국가경쟁력의 근간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만큼 지역문화학회나 향토사학회의 활성화를 통하여 지역문화 전문가들을 양성하고 후원하는 체제를 국가적으로 갖추어나가야 하리라 본다.
 

2002-06-2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개인정보처리방침 서비스이용약관

:::白圭書屋:::
대표자 : 조규익 | Tel : 010-4320-8442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 E-mail : kicho@ssu.ac.kr

Copyright ©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