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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에게 교양교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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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46 조회 14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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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자유공론> 421호(2002. 4. 1.)에 실려 있습니다.

 


지식인들에게 교양교육을...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새삼스럽게 지식인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그간 지식인 집단이 사회의 핵심세력으로 존재하여 왔음에도, 정작 시대와 사회의 변화 앞에서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적 시각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쟁은 우리 사회에 과연 전통적 의미의 지식인이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될 것이고, 결국 지식인 집단의 존립근거까지 뒤흔들 가능성 또한 크다. 특히 현 정부에 의해 ‘신지식인’이라는 생소한 용어가 만들어짐으로써 이런 상황은 더욱 가속화되는 느낌마저 없지 않다.

특정한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붙여주는 기능적 개념으로서의 ‘신지식인’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인정되나, 지식인의 보편적인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제너럴리스트(generalist)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전통시대의 지식인이었던 선비들 역시 그랬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주경야독(晝耕夜讀)하고 분노를 참으며 욕심을 막고 음식을 절제하고 말을 삼가야 하는 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생활 수칙이었다. 뿐만 아니라 임금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직간(直諫)‧극언(極言)하여 올바로 인도하는 것 또한 그들의 의무였다. 이처럼 개인적인 욕구충족이나 영리의 도모에 종사할 수 없는 것이 선비 본연의 모습이었으며, 유교적 교양서 내지는 수신서를 읽으며 독선기신(獨善其身)‧겸선천하(兼善天下)하는 것이 그들 공부의 전부였다. 말하자면 그 시대 지식인들의 이상형이 바로 실천적 교양인이었던 것이다.

시대가 급격히 변하여 옛날에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이념이나 고정관념이 사라지면서 이른바 다원화된 사회가 도래하였다. 개성과 다양성이 중시되고 탈규범의 변화를 바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적 기풍이 모든 분야에 휘몰아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만큼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구지식인이든 신지식인이든 모든 것이 변화된 시대에도 ‘변함없이’ 사람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는 점은 이 시대의 지식인들을 또 다른 차원에서 압박한다. 특히 어려운 일은 지금의 지식인들이 옛날의 선비들과 같은 교양인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 지식인이란 1차적으로 상식적인 교양인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인간상이다. 다시 말하면 제너럴리스트로서의 사물지나 사실지를 투철하게 갖추고 있으면서도 도덕적‧양심적 가치 혹은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하는 교양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래 들어 인문학적 소양을 중심으로 하는 교양인이나 교양교육에 대하여 우리처럼 인색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 얼마전 미국의 한 유명 대학에 체류할 때, 교양교육의 현장이 궁금하여 ‘그리스‧로마 고전’ 강좌에 참여해 본 적이 있는데, 강의실을 가득 메운 학생들의 열기가 대단했다. 호기심이 일어 주변에 있던 10여명의 학생들에게 그들의 전공을 물으니, 대부분 이공계 학생들이었다. 이공계 학생들이 교양으로서의 고전 공부에 몰두하는 그러한 풍경이 후진국 인문학자인 내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간 우리는 OECD에 가입만 하면 선진국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기구에 가입한지 몇 년이 지났어도 우리가 선진국이 되기는커녕 지금의 자리에서 자꾸만 주춤거릴 뿐이다. 이 시점에서 자꾸만 나라가 이상하게 꼬여가는 모습을 조금만 눈여겨 보면, ‘교양 부재’의 현실에도 그 원인의 일단이 있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그동안 의식주의 어려움을 해결하느라 교양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교양교육 부실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대학교육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교양교육의 부실은 심각하다. ‘교양인의 육성’이라는 명제를 교육의 이념으로 내세운 대학들도 있긴 하나, 현재 우리나라의 교양교육은 거의 없어도 그만인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대학권력의 상당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실용주의자들의 눈에 교양교육이란 전공학점만 갉아먹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지금도 상당수의 대학에서는 스포츠나 영어회화, 심지어 기초과학 과목들까지 ‘교양과정’ 속에 넣어 운영하고 있다. 말하자면 소속이 불분명하거나 딱히 어느 곳에 소속시키기 귀찮은 분야를 교양이란 범주 안으로 몰아 넣은 셈이니 교양에 대한 몰이해 치고는 지나치다. 교육정책당국과 대학사회는 오도된 신자유주의에 사로잡혀 교양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중견 국민들을 교양인으로 만드는 데 실패했을뿐더러 궁극적으로는 나라의 중추인 지식인들마저 ‘무교양’의 극치로 만들어가고 있다.

교양을 의미하는 영어 ‘컬처(culture)’의 원래 뜻이 ‘경작(耕作)’인 점에서 보듯, 교양이란 인간의 정신을 계발하여 완성된 인격을 지향하는 자양분이다. 또한 그것은 구체적인 지식들을 바탕으로 통합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인문학적 소양이며, 인간을 무한한 가능태로 만드는 요체이기도 하다. 교양을 결여한 전문가나 지식인은 기능인의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 단순한 기능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은 자아성찰의 토대를 제공하는 교양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유교적 전통을 버리고 근대교육이 시작된 이래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양교육을 시켜본 적이 없다. 자연스럽게 전통사회의 교양인이자 지식인이었던 선비의 전통 또한 끊어진지 오래다.

현재와 미래의 지식인들을 옛날의 선비로 되돌릴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전한 교양인이자 상식인이면 지식인이 될 기본 자격으로는 충분하다고 본다. 지식인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거나 무거운 덕목을 강요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부터라도 건전한 교양교육을 통하여 시대에 맞는 지식인을 길러내는 방향으로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200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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