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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과 문화, 그리고 종로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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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48 조회 14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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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과 문화, 그리고 종로서적


우리가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4강에 오른 일은 아무리 자랑해도 지나침이 없다. 태극 전사들의 분투 덕분에 우리는 가위 눌려 왔던 정치, 외교, 경제, 사회적 질곡으로부터 얼마간 벗어날 수 있었다. 벗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흡사 모든 분야에서 세계의 지도 그룹으로 부상한 듯 우리 모두는 ‘붕 떠 있는’, 이른바 최면의 상태에 몰입해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아무리 좋게 보아 주어도 지금의 상황은 우리의 실제보다 많이 부풀어 있다. 축구가 떠 오른 만큼 우리의 모든 면들도 함께  떠 올라 주었으면 좋겠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뜻 있는 인사들이 월드컵 이후의 상황을 걱정하는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아무도 이 순간 우리의 암울한 현실을 말하지 못한다. 흡사 말했다가는 ‘매국노’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우리 주변을 맴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말할 건 해야 한다. 대통령의 아들 문제도, 겉도는 정치권과 민생의 문제도, 정신문화 퇴락의 현장도 더욱더 소리 높여 짚고 넘어가야 한다. 화려했던 축제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보기 싫어 팽개쳐 두었던 현실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

월드컵의 환희가 우리의 현실로 직결만 된다면야 무어 걱정이겠는가? 그러나 기쁨의 절정에서 평균 이하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을 맛 보는 일이 드물지 않음은 세상사의 이치다. 그런 점에서 남들이 모두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를 때 다시 마주치게 될 절망에 대비하는 사람들이 가급적 많아야 한다. 남들이 환호할 때 침착하면서도 단호하게 비판할 줄 아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입 달린 사람들은 모두 월드컵의 경제적인 효과만을 말하니, 월드컵 이후의 경제사정에 대해서는 낙관하기로 하자.

우리가 계속되는 월드컵의 승전보에 도취되어 있는 순간, 그간 도서 유통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종로서적이 넘어졌다. 그곳은 필자가 학창시절부터 내 집 드나들 듯 하던 곳이다. 아직도 한국 문화산업의 중심은 도서의 출판과 유통이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경쟁상대들이 많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무시할 수 없는 한국문화산업의 한 부분이었다. 이 사건을 나라 전체로 확대시키면 어느 재벌 하나가 쓰러진 것과 맞먹는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이 사건을 크게 유념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듯 하다. 월드컵으로 출판계는 철 이른 서리를 맞은 셈이고, 여기에 곧 닥칠 두 차례 선거(재 보선, 대선)는 ‘된 서리’로 작용할 것이다. 종로서적의 퇴출은 그 불행의 서막일 수 있다. 우리가 월드컵의 승전보에 도취되어 있는 순간 벌어진 이 사건은 바야흐로 쓰러져 가고 있는 우리 문화계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확한 데이터를 입수한 것은 아니나, 종로서적이 퇴출된 이후 주변의 대형 서점들의 매출이 크게 늘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바 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대형 매장이 사라졌으니 인접 매장의 매출이 늘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현실은 책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줄었거나 원래 수요 자체가 미미했음을 반증한다. 동시에 그것은 월드컵 이후의 상황 또한 암울할 것임을 예고하는 지표이기도 하다.

월드컵이 끝난 후 사람들의 관심을 책으로 되돌릴 뾰족한 방책이란 있을 수 없다. 선진국은 지식과 교양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를 말한다. 입만 열면 21세기가 지식기반사회임을 일컬으면서 출판산업을 활성화시킬 아이디어 하나 내놓지 못하는 현실이다. 월드컵의 축제가 끝나고 나면, 화려한 폭죽 대신 온갖 비방과 중상모략이 판치는 무협소설과 같은 선거정국이 펼쳐질텐데 그 속에서 무슨 책을 읽을 것이며 우리의 문화를 꽃 피워갈 사색의 씨앗 또한 뿌려질 수 있겠는가?
<2002. 9. 9.>


200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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