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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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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55 조회 14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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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얼마 전 서울대의 조동일선생을 연구실로 찾아뵌 적이 있다. 그런데 책으로 가득 차 있던 연구실이 텅 비어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여쭈니 이제 정리할 때가 되어 대부분의 책들은 새로 마련한 집에 옮기고, 나머지 책들은 학과 사무실에 넘겨주었다는 대답이셨다. 정년이 앞으로도 여러 해 남았거늘 누가 밀어낸다고 어찌하여 이 불세출의 대학자께서는 그리도 부지런히 당신의 자취를 정리해가시는가. 나는 놀라고 말았다. 정년 후에는 유유자적하시겠노라고, 당신의 출판기념회 석상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지내실지 의문스럽다는 것이 모인 사람들 대부분의 중론이었지만, 어쨌든 노년기에 접어든 학자가 평생의 업을 정리해가시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나는 지금까지 '늙는다'는 것을 한 번도 나의 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운이 좋아 20대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20대에 대학의 전임이 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남자들이라면 모두 군대라는 델 가서 3년이란 긴 세월을 고뇌 속에서 보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운이 좋아 해군장교로 임관되어 해군사관학교에서 '당당한' 교수로 대접받으며 3년을 보낼 수 있었다. 전역후 이십칠팔세의 팔팔한 나이로 대학의 전임이 되어가 보니 30 넘은 학생들도 수두룩 하였다. 그러니 나에게 '늙음'이란 단어를 생각할 여지가 없었던 것도 당연했다. 그곳에 2년 반 정도 있다가 현재의 학교로 부임한 당시의 나이가 갓 30이었다. 당시 같은 학과의 최연소 선배교수와 무려 10년 이상이나 어린 나이였다. 이 학교에 부임하고 나서 10여년 가까이 지나면서야 비로소 내 또래의 교수들이 같은 대학에 신임교수로 부임해오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나보다 어린 교수들이 여러 명 늘어나긴 했으나 여전히 나는 나에 관해서 '늙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학생과 말을 주고받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나이를 말했을 때 그 녀석은 내가 자기 아버지와 동갑이라는 것이었다. 뭐라고? 아, 그 사이에 나는 대학생 학부모의 반열에 편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 큰 아이가 이제 고1이지만, 이 녀석도 이제 두 해만 더 지나면 대학생이 아닌가. 기껏 논문 서너편이나 책 한 두권 쓰면 그 시간이야 훌쩍 넘어갈 것이 아닌가. 그로부터 나는 내 나이에 관해, 늙는다는 것에 관해 조심스럽게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젊음의 패기와 오만 속에서 '南柯一夢'의 순간을 보내고 이제 늙음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때, 늙음을 준비해야할 때가 된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우선 돈에 인색하지 말아야겠다. 나는 주변에 있는 인생의 선후배들과 직접, 간접으로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가장 추하고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은 '적은 돈'에 인색한 경우다. 곁에서 보기에 그런대로 먹고 사는 데 어려움은 없는 듯 한데도 돈에 관하여 보여주는 태도나 생각들은 놀라울 정도다. 특히 본격적인 노년기라 생각되는 50대 이상의 선배들이 보여주는 인색함은 가련할 정도다. 기껏 써 보아야 기천원일텐데, 기천원을 아끼기 위해 손상 받는 무형의 자산에 대하여 그들은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보면서 나는 새삼 결심한다. 적은 돈일망정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베풀어야 한다고. 몇 푼의 돈을 아끼면서 어떻게 자신의 '고명한' 철학을 그들에게 주입하려 하는가. 물론 돈으로 그들의 환심을 사야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 푼돈에 인색한 사람으로부터는 매사에 배울 것이 결코 없다는 점을 적어도 나는 수십년간의 관찰을 통해 체득하였다. 언젠가 한동안 머물던 곳에 한 노학자가 있었다. 이 분의 특징은 돈을 봉투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점이었다. 그리고 어딜 가든 젊은 사람들보다 앞서서 계산대로 달려나가신다. 젊은 사람들이 호주머니 깊숙히 넣어둔 지갑을 '망설이며(?)' 꺼내드는 사이에 잽싸게 봉투째 계산대 위에 내놓곤 하시는 거였다. 참으로 호탕한 광경이었다. 통사정 끝에 몇번 내가 계산을 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 분이 참석하시는 어떤 모임에서든 이런 광경은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번번이 봉투째 사시면서도 "저번에는 내가 샀으니 이번에는 네놈이 사야지"하는 째째한 생각을 하시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돈의 액수를 따져보면 그렇게 '엄청난' 돈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보여주시는 '넉넉함'은 우리 모두를 즐겁게 했고, 그 분을 마음으로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 분이 그렇게 함으로써 무언가 현실적인 이익을 구하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요즈음같이 더러운 선거판에 끼어들자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분은 '사람은 늙어가면서 젊은이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실천하신 것 뿐이었다. 나는 그 후 내 주변에 널려 있는 '다라운' 인생의 선배들을 간혹 목격하면서 그 분의 지혜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나이 먹어가면서 물욕이나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일지도 모른다. 부양해야할 가족 등 돈 쓸 곳이 많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큰 돈'이 아니다. 단돈 10원이라도 재벌의 10억에 맞먹는 감동을 주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 푼돈을 아까워하는 '다라움' 때문에, 젊은이의 마음을 잃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을까. 젊은이들은 돈을 가지고(아니 돈의 액수를 가지고) 선배들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구체적 사례들을 통하여 마음의 폭과 깊이를 짐작하려는 것일 뿐이다. 젊은이들이 당장의 이해관계 때문에 늙은이들을 박절하게 대하지는 못해도 그렇게 '다라운' 존재에게 무엇이 아쉬워 마음까지 주겠는가. 명심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푼돈을 아끼지는 않으려 한다. 기회 닿는대로 내가 먼저 내 호주머니의 봉투를 꺼내놓으려 한다. 이거야말로 늙어가는 자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바야흐로 40대의 중반에 들어섰다. 정년제도가 현재와 같이 유지된다면, 앞으로 20여년의 기간이 남아있다. 정년퇴임은 새로운 생의 시작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활을, 다른 즐거움을 누리면서 생을 마치라는 암시가 아닌가 싶다. 내가 65세에 정년을 한다면, 대학에서만 무려 4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50대에 들어서면 거주하는 집과 떨어진 곳에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려 한다. 그 후보지는 1순위가 강화도, 2순위가 홍천, 3순위가 담양이다. 기회 있는대로 이들 지역을 답사하고 있으나 땅값이 만만치 않아 아직 손을 대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50을 넘어서면 '자갈논을 팔아서라도' 땅을 마련하여 자그마한 집 한 채를 지을 생각이다. 밖으로는 텃밭을 가꿀 수 있고, 집안에는 서재와 응접실 겸 세미나실을 갖출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곳에 대부분의 책을 옮겨놓은 다음 50대 중후반부터는 본격적인 이곳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한다. 50대 후반에 들어서면 이 곳에 둥지를 틀고 연구실과 강의실을 오가면서 진행중인 연구과제들을 정리하는 한 편, 지나온 학구생활을 정리한다. 이 시기가 되면 학교 안의 연구실 또한 새롭게 꾸민다. 웬만 하면 허름하고 잡다한 집기들을 치우고, 바닥에는 카펫을 새롭게 깐다. 중앙에는 푹신한 소파와 의자들을 여러 개 들여놓고, 한 쪽켠에는 약간 큰 냉장고와 찬장을 갖춘다. 냉장고에는 언제나 꺼내 마실 수 있는 음료수와 음식들을, 찬장에는 특히 젊은이들이 좋아할만한 과자류와 각종 커피나 차 등을 준비해둔다. 춥지 않은 계절에는 문을 늘 열어둔 채 찾아오는 학생들이나 젊은 학자들을 맞아들인다. 그리고, 차를 나누면서 그들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고 학문을 담론한다. 연구실에는 난초 한 분 정도는 늘 꽃을 피우고 있으며, 간혹 강렬한 향기의 장미도 한 묶음 정도 화병에 꽂혀 있다. 대학 안팎에서 후배들이나 학생들이 찾아오고, 이들은 언제나 나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학과의 일에는 전혀 간섭을 하지 않는다. 이 때쯤이면 30, 40대의 패기 넘치는 후배교수들이 정열을 가지고 학과의 중추가 되어 있을 것 아닌가. 그러니 60대의 늙은 몸과 마음으로 무엇 때문에 이들에게 사사건건 간섭할 것이며, 이들의 기를 꺾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보직도 그렇다. 늙은이들이 보직을 '꿰어차고' 있으면, 그 대학은 언제 발전하나? 대학의 보직은 총장이 알랑거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떡덩어리'도 아니고,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인사치레'로 주어지는 선물도 아니다. 진정으로 대학과 학문이 발전하기를 기원한다면, 대학내의 모든 보직은 30대 교수들에게 맡겨져야 한다. 한참 학문적으로 뻗어나갈 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역시 대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명제를 생각한다면 잠시나마 그런 봉사를 마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대학에서 보직을 수행하려면 수십년을 내다볼 수 있는 안목과 패기는 물론 변화에 대처할만한 순발력 또한 필수적이다. 그런데 어째서 대학의 보직은 다 늙어빠진 50대 후반이나 60대들이 맡아야 하는가. 이들에게 무슨 비전이 있고, 비호처럼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갈만한 순발력인들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나는 50대 중반에 들어서면 학과의 잡다한 일들을 모두 30대의 후배들에게 맡기고 간섭을 안할 생각이다. 그들이 잘해줄 텐데, 무슨 욕심으로 사사건건 학과일에 간섭할 것이냐. 그리고, 그런 일에 관심 가질 시간이나 여유도 없을 것이다. 학교에 오면 후학들과 학문적 담론을 펼치고, 내 서재에 가면 진행중인 연구과제의 수행과 내 학문의 마무리에 바쁠텐데 어떻게 강사들의 시간배정이나 조교의 선임 등 자질구레한 일들에 신경을 쓸 수가 있으랴.

그렇게 10년 정도의 기간을 보내고 정년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는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만약 명예교수제도가 그 때까지 존속된다 해도 나는 과감히 뿌리칠 것이다. 대학에서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 일을 해왔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옛일을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할 일이다. 내가 몸 담아온 직장과 그 일들을 후배들의 손에 완전히 맡겨주는 것이 떠나는 자의 예의이자 미학이다. 떠나면 그 뿐, 무슨 미련을 남겨둘 필요가 있으랴.

나는 평소부터 산에 가면 산사람이 되고 싶었고, 바다에 가면 어부가 되고 싶었다. 물론 농촌에서 나고 자랐으니 농부가 될 소질은 이미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집 앞 텃밭에 약간의 남새와 약초를 가꾸고 집 뒤쪽으로는 시누대와 왕대밭을 조성할 것이다. 그리고 대밭 뒤쪽으로는 사슴과 염소, 거위 등을 놓아 기를만한 공간을 만들 생각이다. 그리고, 텃밭 아래에는 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들을 기르고 연못 주변에는 빙 둘러 평상들을 놓아두려한다.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물길을 졸졸 연못으로 흘러들게 하고 그 어구에 작은 물레방아를 설치하겠다. 망아지나 한우 한 마리를 키우면서, 틈날 때마다 그 놈을 끌거나 등에 올라타고 내 집 주변을 빙빙 돌고 싶다. 집 안에는 넓은 서재와 응접실 외에 사랑방을 꾸미는 등 이 집에 오는 손님들이 거처하면서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도록 편리한 시설을 만들겠다. 그리고, 평소부터 운영하던 내 홈페이지를 좀더 확대하여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젊은 학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것이다. 나를 찾아오는 후학들을 마다할 이유는 없으니, 그 집의 상당부분은 이들을 위한 시설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들이 언제든 찾아와 세미나실에서 학문적 대화를 나누고 대자연을 호흡하며 다시 힘을 얻고 돌아갈 수 있도록 나는 내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미고자 하는 것이다. 간혹 기분이 내키면 그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산에 오르거나 바다에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뿐, 그들에게 인간적인 미련을 두지는 않을 것이다. 내 문과 마음은 늘 열려 있으니 언제든 오고싶으면 오고 가고 싶은 때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년 이후 가꾸어야 할 삶은 집착하지 않는 그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안식할 수 있고, 무한한 가능성을 마음으로 가꿀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강화도에 안착한다면, 나는 반은 어부의 생활로 반은 산사람의 생활로 보낼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외국이나 국내 여행을 즐길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관광은 아니고, 내가 새로이 관심을 갖고자 하는 우리나라나 세계 여러나라의 고서들을 수집하려는, 이른바 '탐서여행'이다. 그런 여행들을 통하여 나는 나의 컬렉션을 풍부하게 하고 그를 통하여 많은 후학들에게 보다 양질의 학문적 서비스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홍천이나 담양에 안착한다면 산사람 혹은 들사람으로 지낼 것이다. 아름다운 산의 동물들과 식물들을 찾아 조사하고, 무분별한 자연의 훼손으로부터 그것들을 지키는 데 진력할 생각이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주변만은 울창한 대나무숲, 멋진 나무들의 바다로 가꿀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늙어 죽을 때 때투성이의 오두막이 아닌 세계적인 귀중도서의 컬렉션을 안고있는 아담한 건물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나무숲을 남길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뛰어노는 몇 마리의 사슴, 토끼, 소들과 싱싱한 물고기들도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를 따르던 후학들이 대를 이어 그 보금자리를 내 뜻대로 가꾸어 주겠지?

나는 이렇게 늙어가려 한다.


2002-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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