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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단칼에'式 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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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56 조회 14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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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조선일보 2002년 10월 7일자에 실려 있습니다.


  '돈으로 단칼에' 式 발상
                                                   
                                                                              조규익
           
말도 많았던 BK21의 핵심사업이 올해 예산 배정에서 제외됨으로써, 시작하자마자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기초학문 육성을 위해 수백억의 재원을 투입했던 사업은 과제 선정 작업을 끝내고도 돈이 남아 추가로 공모, 심사 중이다. 인기가 하락하는 이공계가 아우성을 치자 이번엔 이공계 해외유학생들에게 학비를 대주기로 하고 수백억을 마련했다 한다. 지금 세상에 웬만한 것은 돈으로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고 하나, 그것만으로 되지 않는 일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BK21이나 기초학문 육성책이 시행되면서 누구의 말대로 '이제 기초학문 분야도 힘좀 펴게 되었다'는 착각을 가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 속칭 '보따리 장사'로 전전하던 박사학위 취득자들 상당수가 제대로 된 연구비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좋은 시절은 시작되자마자 끝나게 되는 듯하다. 그간의 정책 기조로 보아 갖가지 명목의 비인기 분야 진흥책이라는 것들도 마찬가지의 운명이 될 것을 점치기는 어렵지 않다. 농사와도 같은 것이 바로 학문정책이다. 기상이변 못지 않게 농부의 조급증도 농사를 망치는 원인이 된다. 검푸른 볏잎들이 일렁대는 옆집 논과 자신의 논이 너무 차이 난다고 느낀 농부는 '특단의 처방'을 내린다. 토질이나 벼의 품종, 물 관리, 평소에 기울인 이웃 농부의 노력 등은 생각지도 않고, 당장 이웃 논들과 같아지거나 앞서려는 욕심에 그만 화학비료를 듬뿍 퍼붓는다. 불가피해서 화학비료를 사용할 경우라도 다양한 요소들의 비율이 맞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당장 겉으로 표가 난다는 이점 때문에 농부는 질소비료만을 듬뿍 뿌려준 것이다.

  기초학문 氣 펴는가 했더니

 과연 며칠 뒤부터 그 논의 벼는 겉보기에 생육이 왕성해지고 검푸르게 변한다. 옆 논들과 비교해보며 그 농부는 대단히 만족해하고 자랑스러워 한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 그 논의 벼들은 저항력이 약해져 도열병을 비롯한 각종 병에 걸린 채 시름거리다가 결국 형편없는 몰골로 전락하고 만다. 긴 안목으로 토질이나 농작물의 뿌리, 뼈대 등을 찬찬히 보강해나갈 생각은 못하고, 겉으로나마 우선 남과 뒤지기 싫다는 미련한 오기와 어리석음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만 것이다.

  학문정책의 기본은 農心

엄청난 재원을 한시적으로 투입하여 SCI 등재 논문수가 반짝 늘어났다고 자위하는 정책 입안자들은 화학비료를 듬뿍 먹고 검푸르게 변한 논을 보며 즐거워 하는 농부와 다를 바 없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학문의 부진은 학문 인프라의 부실과 사회적 기반의 미비 등에 주된 원인이 있지만, 특히 학문에 대한 정부당국 대학 운영주체의 철학 부족 등은 무엇보다도 심각하다. 강의실 환경, 연구실과 실험실 환경, 도서관 환경, 각종 통신 환경 등이 과연 학문적 업적의 생산에 타당하게 되어 있는가? 교수들의 연구에 대한 행정적 재정적 지원은 지속적으로 확충되고 있으며, 연구 결과에 대한 평가는 엄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기업이나 연구소 등 졸업생들을 흡수할만한 사회적 여건은 개선되고 있는가? 학문 발전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는 제고되고 있는가? 등 기본적으로 보강되어야 할 분야들은 무수하다. 이들 문제는 시급하면서도 꾸준히 투자해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좋아하는 '단방식' 접근법만으로는 개선될 수 없는 사항들이다. 이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학문과 대학은 영속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학문 인프라의 구축과 강화에 나서야 할 때이고, 그 기본은 농심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새해 예산안 심의를 하는 국회의원들도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숭실대교수/국문학


2002-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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