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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 만난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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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6:59 조회 21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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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월간 "들숨날숨" 49호(2003. 5. 1.)의 '종교마당'에 실려 있습니다.


북경에서 만난 천주교

                                                                              조규익

 겨울의 막바지 추위로 북경은 얼어 있었다. 살갗이 아린 건 고비사막으로부터 날아오는 모래바람 때문이었으리라. 심양에서 단동으로, 단동에서 다시 북경까지 짚어간 4천릿길. 그 옛날 조선조 연행사들이 도보로 오고가던 바로 그 길이었다. 조상들이 몇 달 걸려 걷고 또 걷던 그 길을 우리는 열흘만에 주파했다. 감조차 잡히지 않을만큼 드넓은 요동들판. 지평선에서 뜨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대국의 위용에 기가 막혔을 조상들의 마음을 우리가 과연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짚신 감발대신 최신식 버스에 몸을 싣고 두터운 옷으로 무장한 채 그분네들의 노정을 추체험追體驗하겠노라 나선 길이 겸연쩍었다. 그러나 그 분들이 도처에서 놀라운 일들을 체험했듯이, 우리 또한 그랬다. 요녕성과 하북성을 가로지르는 동안 나를 괴롭히던 북만주의 칼바람, 그 바람에 얼어붙었던 내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경이를 체험했다. 마지막 노정, 북경에서 천주교를 만난 것이다.
참으로 운 좋게도 우리는 마테오리치Matteo Ricci 신부를 비롯한 명 청대 서양 선교사들의 묘역을 친견하고, 초기 중국 천주교의 긴장된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북경행정학원의 여삼락余三樂교수와 연결된 덕분이었다. 그곳은 마테오리치, 아담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유송령A. Hallerstein, 포우관A. Gogeisl 등 수십명의 선교사들이 중국 천주교의 산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는 현장이었다. 마테오리치나 아담샬이 천주교의 씨앗을 중국에만 뿌린 것은 아니다. 천주교의 조선 전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세 번에 걸쳐 북경을 내왕한 실학자 지봉芝峯 이수광李 光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천주실의}를 소개했고, 성호星湖 이익李瀷도 {천주실의}의 발문을 쓴 바 있다. 그 뿐인가. 병자호란 후 심양에 볼모로 잡혀있다가 1644년 북경으로 옮겨가 아담 샬과 친교를 맺고 천문 수학 천주교 등에 흠뻑 빠져 들었던 소현세자, 서장관인 아버지를 수행하여 북경에 왔다가 1784년 그라몽Gramont신부로부터 조선인 최초로 영세를 받은 만천蔓川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등은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가다듬은 장본인들이다. 그 마테오리치 신부가 1605년에 세웠고, 아담 샬 신부가 1650년에 다시 세웠으며, 1904년 새로이 중수한 북경 천주교 남당南堂에서 나는 조상들이 느꼈을 경이와 당혹감을 다시 느낀 것이다. 
유창한 영어로 중국 천주교의 긍지를 설명하기에 바쁘던 중국인 장천로張天路신부는 우리의 손을 끌고 한국 천주교회 신자들이 새겨준 기념동판을 보여 주었다. 그 동판에는 하느님의 복음이 북경을 통해 조선에 전해진 지 200주년이나 되었음을 명시하는 글자들이 선명했다. 지금도 많은 한국인들이 수 없이 그곳을 방문하여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확인하고 간다는 장신부의 설명이었다. 중국 천주교에 대한 장신부의 자부심이 지나친 듯 하여 오기가 발동한 나는 물었다. 공산당 지배하의 중국에 과연 종교의 자유가 있느냐고. 기다렸다는 듯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있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당만 해도 신도수 4천여명의 거대한 규모였다. 주일마다 미사에 참여하는 각국 외교관들을 위해 영어미사까지 드리고 있으니 중국 천주교야말로 세계화를 이미 이룬 게 아니냐는 사족까지 다는 것이었다. 답답하게만 생각해왔던 사회주의 중국은 그렇게 바뀌어 있었다.
조선조 당대에만 700여회. 연행에 참가한 삼사三使들 대부분은 벼슬로나 학식으로나 그 시대를 대표하던 식자들이었다. 경이로운 체험에 몸을 떨었을 선각자들의 마음자리. 그들이 남긴 상당수의 기행문에서 우리는 그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동지사행에 서장관 홍억洪檍의 자제군관으로 수행하여 조선 지식인의 명민함을 과시한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 연경을 방문했을 때가 1766년, 그로부터 32년후에 서유문徐有聞은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이 북경에서 천주교를 만났다. 서유문으로부터 205년후에 북경을 찾은 나도 천주교를 만났다. 독실한(?) 천주교도 아내 덕분에 천주교가 생소하지 않은 나와 달리 그들이 받은 문화적 충격은 대단했을 거라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수 있을까.  서유문의 표현을 빌어보자. "북쪽 벽 위의 중앙에 한 사람의 화상을 그렸으니 계집의 상이요, 머리를 풀어 좌우로 두 가락을 드리우고 눈을 치떠 하늘을 바라보니, 무한한 생각과 근심하는 거동이라. 이것이 곧 천주라 하는 사람이니, 형체와 의복이 다 공중에 띄워 서 있는 모양이요, 서 있는 곳이 깊은 감실과 같으니, 첫 번 볼 제는 조각상인가 여겼더니, 가까이 간 후에야 그림인 줄을 깨달았으니 나이 30세 남짓한 계집이요, 얼굴빛이 누르고 눈두덩이 심히 검푸르니, 이는 항상 눈을 치떠 그러한가 싶고, 입은 것은 소매 넓은 긴 옷이로되 옷주름과 섶을 이은 것이 분명하여 움직일 듯하니, 천하에 이상한 그림의 격식이요…아이 안은 모양을 그렸으되 아이는 눈을 부릅떠 놀라는 형상이다. 부인이 어루만져 근심하는 모습이요…천상에는 사방으로 구름이 에워쌌으되 어린아이들이 구름 속에서 머리를 내밀어 보는 것이 그 수를 헤아리지 못하며…"
서양인들을 만나기도 힘들었으려니와, 서양인의 모습으로 그려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천사들의 화상을 보고 놀란 마음을 그려낸 이 글을 보고 오늘날의 누군들 포복절도하지 않겠는가.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과학사상가 홍대용은 천주당에서 천주교 뿐만 아니라 서양의 과학문명 또한 만났다. 자명종의 원리를 곰곰 생각하기도 하고, 파이프오르간의 원리와 연주법을 즉석에서 터득하여 멋진 연주까지 거뜬히 해냈다.
담헌은 천주당에서 서양인 사제 유송령과 포우관을 만났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 때까지도 조선은 중화中華와 오랑캐를 나누어 보던 차별적 세계관인 화이관華夷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당대 노론계 지식인들의 보편적 세계관이었고, 담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새로운 문물과 인물들을 만나면서 생각은 바뀌어갔다. 북경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오랑캐와 중화, 귀와 천의 구분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바뀔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화이론을 청산하고 북학北學의 기수로 변한 데에는 천주교와의 만남도 한 몫 했으리라. "하늘로부터 보면 사람과 사물이 마찬가지"라는 [의산문답] 속의 단언이야말로 만물에 고루 비치는 천주의 사랑을 말한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까. 북경에서 만난 과학문명이나 천주교를 통해 세계의 근원에 대한 반성적 인식에 도달한 사례가 어찌 담헌 뿐이었으리오. '말이 충성되고 미더우며 행실이 도탑고 공경스러우면 비록 오랑캐 지방이라도 가히 행하리라'는 공자의 말을 빌어 천주당 구경을 합리화한 것을 보면, 고집스럽고 자존심 강한 서유문이나 그에게 천주당의 소식을 전해준 치형에게도 얼마간 생각의 변화가 일었던 모양이다.
작은 나라를 보전코자 만릿길을 마다 않고 드나들던 중원. 고심참담 속에 걸음걸음 떨구었을 피눈물과 함께 수시로 발동되던 호기심과 지혜는 조상들에게 깨달음의 지평을 열어 주었다. 담헌과 서유문이 친견한 북경 천주당의 예수고상과 성모마리아. 한 알의 겨자씨가 창대한 결실을 맺듯, 들불처럼 번져가던 한국 천주교 초기의 모습을 남천주당의 성모상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분명 그건 내게 하나의 감동이었다. 그러나, 북경에서 내 마음에 뿌려진 겨자씨는 언제쯤 싹을 틔울지...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00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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