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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는 유족들의 마음을 우선적으로 어루만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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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1-05-13 17:01 조회 14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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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 답고 세상이 세상 다우려면 각각에 걸 맞는 최소한의 기본과 `양식`만큼은 지켜야 한다. 말이 아닌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이 인간의 기본이며 양식이다. 인간의 기본이나 양식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이야말로 인간의 허울을 뒤집어 쓴 짐승일 따름이다. 더구나 그런 `인간 아닌 인간들`이 모여 인간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집단이야말로 무력한 개인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폭력의 주체일 뿐이다.


첨단을 걷는다고 자부하는 kaist의 실험실에서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사건의 비극적인 전말은 언론을 통해 알려질만큼 알려졌으므로 이 자리에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완벽하지 못한 존재인 만큼 사고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사고가 일어난 이상, 그에 대한 사후 처리는 완벽해야 하고, 두 번 다시 같은 사고가 일어나게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그 사고의 처리 과정을 보며 그간 우리가 신물나게 경험해온 이 나라의 후진성을 다시금 `치 떨리게`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고의 문제점은 세 가지다. 첫째 사고의 원인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 둘째 집단의 책임성과 도덕성 부재, 셋째 국가적 재난 관리 시스템의 부재 등이다.


산업화 시대 이후 우리는 매년 엄청난 사고를 당해오고 있지만, 유사한 사고들의 반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고 실천한다면 막을 수 있는 것들임에도 말이다. 그래서 똑 같은 사고들이 일어날 때마다 언론에서는 `인재(人災)`라는 단어만 반복할 뿐이다. 근본적인 대책은 말 뿐이고, 다수 국민들의 동정심에 호소하여 성금이나 모금하는 한심한 작태를 반복할 뿐이다.
두번 째 문제는 더 심각하다. `시스템`에 관련된 사항이므로 언젠간 좋아질 거라는 희망이라도 가져볼 수는 있는 것이 첫번 째 문제다. 그러나, 두번 째 문제는 시스템의 여부에 관계 없이 우리 사회가 언제나 갖추고 있어야 할 내면적이며 기본적인 요건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도덕과 양심의 문제이므로 인간이라면 도망칠 수 없는 올가미이기도 하다.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피해자의 부모를 찾아가 해당 교직원들의 면책 탄원서에 도장이나 받아간 kaist 당국자들이야말로, `인면수심(人面獸心)`으로밖에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방어본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단 한 번만이라도 피해자 부모의 입장을 헤아려 보았다면, 적어도 그럴 순 없는 일이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격언도 있다. 그들 생각으로는 경황 없는 부모에게 달려들어 면책 탄원서에 도장이나 받는 것이 자신들의 유일한 `살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법적으로 `면책`이 된다한들 얼마나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럼으로써 양심의 가책과 인간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회의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텐데 말이다. 애당초 자신들의 과오에 대하여 `죽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각오와 참회로 사고 처리에 나섰더라면, 피해자 부모의 아픈 마음은 얼마간 치유될 수 있었을 것이며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또한 얼마간 누그러뜨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실 제대로 된 대통령이나 과기부장관, kaist원장이라면 사건 즉시 부모를 찾아가 눈물로 참회했어야 한다. 순수하게 과학도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는 한 젊은이를 죽여놓고 그리도 무심할 수 있단 말인가. 이공계 기피 시대에 남이 가지 않는 길을 홀로 가고 있는 `귀한 젊음`을 그리도 쉽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라를 경영하고 학교를 운영하는 데 이보다 더 중차대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행정부는 물론이고,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양심적이었어야 할 kaist 당국의 합리성과 도덕성은 이 사건을 계기로 처절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이 나라 과학과 지성의 최후의 보루라고 여겨왔던 kaist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조만간 회복하기 어렵게 되었다.
선진 산업국을 지향한다는 나라에서 이런 사건에 대한 예방과 처리의 지침 하나 마련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행정부의 당국자들이나 해당 대학, 교수들은 도대체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얼마나 더 이런 `원시적`인 사고가 반복되어야 국가적인 관리 체계의 필요성을 깨닫는단 말인가. 사고가 일어나면 적당히 얼버무리고, 몇 푼 성금이나 거두어 유족들에게 전하면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당국자들의 한심함은 그저 속수무책일 뿐이다.


대학에 몸 담고 있는 필자는 `이공계 푸대접`의 현실야말로 우리나라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보고 있다. 중진국의 언저리에서 서성이고 있는 우리나라를 21세기에 선진국으로 진입시킬 힘은 kaist에서 나올 수 있다고 믿어 왔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공계 공동화 현상은 조만간 우리나라를 세계적 경쟁의 대열에서 밀어낼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aist가 있고, 그곳에서 꿈을 키우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가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필자 역시 큰 아이를 망설임 없이 kaist로 진학시켰다. 평소 kaist에 대하여 선망과 기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의대와 약대를 고집하는 남들과 달리 나는 일관되게 그곳을 추천한 것이다. 큰 아이가 kaist에 합격한 날 나는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무수히 쾌재를 불렀다. 그 날 나는 벅찬 희망을 내 가슴에 심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수천 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좀 성급하긴 하지만, 큰 아이로 하여금 그곳을 선택하게 한 나의 짧은 안목에 땅이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고 싹을 보면 열매를 안다고 했다. 어찌 다른 분야는 모두 괜찮은데 유독 이번 사건이 터진 그 분야에만 문제가 있겠는가. `나라가 이 모양인데 유독 kaist만 선진적일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에 이르면 더 이상 `우리나라가 싫다`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꾸중할 힘이 내겐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당국자들은 피해자 부모를 찾아가 눈물로 사죄해야 한다. 그거야말로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깨닫는 그 순간이 가장 이른 때다. 자기 실험실에서 사고가 발생하여 학생이 죽었는데, 어찌 해당 교수들에게 죄가 없는가. 자신이 관할하는 대학 실험실에서 학생이 죽어나갔는데, 어찌 대학 당국자들은 담담할 수 있는가. 국가가 운영하는 대학 실험실에서 학생이 죽어 나갔는데 행정부의 당국자들은 어찌 그리도 무심할 수 있는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당사자들이 책임을 한사코 `피하려는` 비겁함이 이 나라를 멍들게 한다.
당신들이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면, 학생을 가르치는 스승이라면 한 번이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참회해 보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이 나라 과학의 리딩그룹이라는 자부심을 버려야 하며 학생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간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당연히 이 시점으로부터 이 나라의 `이공계 기피 현상`은 가속화될 것이며, 그로 인해 나라는 끝간 데 없는 후진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비극적인 일이다.


2003. 6. 28.

백규


200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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