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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23 21:33 조회 7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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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 <<표해록>>의 루트를 답사한 이번의 장정, 그리고 그에 대한 소개는 몇 학기 강의에 맞먹는 깊이와 감동을 주는 쾌거로군요.

'나도 참여했었더라면...'하는 아쉬움으로 이 글을 읽고, 사진들을 감상하고 있는 중이오. 하기야 지난 2월에는 연구실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갈 정도로 바빴지만 말이오.

언제 다시 한 번 도전해봅시다. 사실 연행노정 답사보다도 더 의미있는 것이 최부가 지나온 해로를 답사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로서는 우연히 만난 시련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걷게 된 '멀고 먼 길'은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만큼이나 고통스럽고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수고 많으셨소. 더구나 그 고생 끝에 얻어온 수확물을 이곳에 풀어놓고, 모든 이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카메선생의 도타운 뜻이야말로 현대의 공부하는 사람들 모두가 귀감으로 삼아야겠지요.


늘 탐구하는 카메선생의 의욕과 투지를 배우며

백규서옥 문객들과 함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바이오.


사일구날에


백규



>지난 2월, <표해록>의 저자인 최부선생의 흔적을 따라 500여년전의 절강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난다는 것은 늘 가슴이 떨립니다. 역사속의 인물을 만나기위해 <표해록>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

>년전부터 개인적인 관심으로 <최부표해루트답사>를 모색하여 오던중, 우연히 최부표해기념사업회의 답사일정을 알게되어 합류하였습니다.

>

>특히 이번 답사에서는 최부선생의 흔적을 찾아가는 답사 이외에도 독립운동유적지인 '임시정부 항주시대'의 유적과 옛 '고려사' 터 의 답사도 병행하였습니다.

>

>아래는 그 일정의 대략입니다. (카메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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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부 표해루트 답사]

>

>◈답사기간: 2005년 2월 17일- 2월 21일

>◈답사지역: 항주(고려사 터),영해(표해록기념비), 임해고성(신라방-신라무역기지), 도저성(최부심문장소), 안탕산

>◈답사루트: 인천-항주-영해-월계-도저성-임해-항주-인천

>◆답사의의: 본 답사는 중국의 세계적 3대 기행문의 하나인 <표해록>의 최부 일행 43명이 갖은 고초를 겪었던 중국표류루트를 답사하게 된다. 특히 최부 일행이 등륙한 장소(현재는 희망소학교 구내)에 <최부 표류 사적비>가 건립되어 있어 그 현장을 답사하고, 최초의 심문장소인 도저성등을 답사하는등 한중교류사의 중요한 사건중 하나인 최부표해루트 답사를 통해 최부선생의 충효정신과 불굴의 선비정신들을 추체험하게 된다.

>

>◈ 기타: 최부표해루트 답사는 연행록전집(민족문화추진회)제1권의 첫 장에 수록되었다. 일반적인 연행루트와는 차이가 있다.

>해상표류이후 중국강남지역, 특히 경항대운하를 거쳐간 최초의 조선인으로서 북경이후의 여정은 연행노정을 따라 귀국하게 되었다.

>

>◈주요답사참가자:

>1. 최부표해기념사업회

>2. 최부선생후손(탐진최씨성지공파 종친회,나주나씨종친회등)

>3. 나주시 관계자

>4. 한중역사배낭여행전문집단'CHINA路' (카메듀서+4인)

>5. 북경대학교 갈진가교수

>6. 중국소설가 왕금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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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지역에 대한 소개]

>

>◈영해(寧海)

>◇최부표해록사적비

>최부표해록사적비는 영해현 월계촌 월계소학교(희망소학교) 구내에 2002년 7월 11일에 건립되었다. 사적비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

> “최부(1454-1504)의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이며, 본관은 탐진(耽津), 조선 전라도 나주인으로 조선시대의 문사였다. 1487년에 홍문관 부교리를 역임하였고, 왕의 명을 받아 제주도 추쇄경차관으로 임명되었다. 1488년(명 홍치 원년, 조선 성종 19년) 부친상의 부고를 받고 제주에서 바다를 건너 귀향하다가, 폭풍으로 인하여 동승한 42명과 함께 14일간 바다를 표류하였다. 중국 절강(浙江) 영파부(寧波府)에 애써 접근했지만, 해안에 오르지 못하고 다시 표류하여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 우두외양의 해안에 상륙하였다. 그 때 절강성 동해안에서는 여러 번 일본 해적단의 침입을 받았기에, 최부일행도 처음에는 일본 해적단으로 오인을 받았다. 그러나 후에 조선인 신분임이 밝혀지자, 곳곳에서 존대를 받았고 명나라 황제와 지방 관리들의 상도 받았다. 최부는 중국에서 135일간 체류하였는데, 우두외양에 상륙하여 도저, 건도, 월계, 영해, 봉화, 영파, 자계, 여요, 상우, 소흥, 소산을 거쳐 항주에 도착한 후, 항주에서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를 따라 가흥, 오강, 소주, 상주, 진강, 양주, 고우, 회안, 숙천, 비주, 서주, 패현, 제녕, 임청, 덕주, 창주, 정해, 천진, 통주, 북경을 거쳐 옥전, 풍윤, 난주, 산해관, 영원, 광녕, 반산, 안산을 경유하여 요양에 도착하였다. 요양에서 연산관, 통원보, 풍성, 탕산성, 구연성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러 배로 귀국하였는데, 여정이 8000여 리에 달하였다.

>

>최부는 중국기행문 표해록을 펴냈다. 이 책은 중문으로 쓴 것인데 《중원을 묘사한 거필》이라고도 한다. 중국 명나라의 해안방비․정치제도․운하도시․지리민속․언어문화와 두 나라 관계 등을 연구하는데, 중국 사기에 기록되지 않았거나, 미흡한 부분의 자료들을 제공하였다. 1573년 외손 유희춘(柳希春)이 발간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일본에서는 1769년 청전군금(淸田君錦)에 의해 일본어로 번역되었고 제목을《唐土行程記》라고 고쳤다. 미국에서는 1965년 John Meskill 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이름은《錦南漂海綠注》이다. 최부의 후예인 최기홍(崔基泓)은 1979년에 중문표해록을 본국문으로 번역하였다. 이 국외 한문서적이 세상에 나온지 500년 후인 1992년에 갈진가(葛振家)의 평가․소개를 거쳐 비로소 이 책에 묘사된 곳에 나타나게 되었다.

>

> 최부 선생은 그 일행이 필담을 통하여 중국 관민과 의사소통한 것을 생동하게 기록하였다. 장보(張輔)의 《送朝鮮崔校理序》에 그 미담들이 기록되었는데, 청나라 광서년간의 영해현지(寧海縣志)에 그 기록이 있다. 영해 사람들은 이 미담들을 회상하며, 대륙과 반도간에 서로 의좋게 거래해온 역사․문화적 관계를 널리 전파하고 있다. 이 비문은 그 사람들이 감동하여 쓴 문장이다.”

>                                  2001년 12월 25일

>                                  葛振家 識

>

>◇월계순검사성(越溪巡檢司城) 비문

>“원나라 때부터 왜구는 월계현 해안을 침범하여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여 인민의 고통은 이루말 할 수 없었다. 왜구의 침범을 방어하기 위하여 명홍무 3년(1370) 주원장은 해안의 요소에 위, 소, 사의 각급 변방기구를 설치, 군대를 주둔시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위와 소는 군대 편제로서 국가가 군대를 파견 수비케 하였으며, 사는 순검사로 불리우는 지역부대로서 현의 내항(內港) 방비를 담당하였다. 명정통 13년(1448) 현의 부지사인 유창이 월계순검사 성을 수축하였는바, 이는 당시 정두(亭頭)의 관문이었다. 성은 정두강가의 작은 상강(上崗)산 위에 위치, 정두강을 굽어보며 멀리 정두산과 마주대하며 현을 수비하고 있었다. 성벽은 타원형으로 남,북의 약 265미터, 동,서 약 200미터이며 둘레의 길이는 약 800미터이며, 성벽의 높이는 약 6미터, 성의 문은 동쪽을 향하고 있었으며 성내에 병사가 주둔하며 삼엄한 경비를 맡고 있었다. 청강희 9년(1670) 순검사성은 월계남 군영과 마주대하고 있는 정두산상의 월계북 군영으로 나누어졌다. 막사는 180개, 최대 병력은 500명이었다. 남, 북의 양 군영은 마치 철겸(鐵鉗, 죄인의 목에 씌우는 칼로서 刑具의 일종)의 형태로 현성의 안전을 지키고 있었다.

>

>명가정 40년(1561) 4월, 왜구가 영해, 대주, 월계, 도저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할 당시 척계광 장군은 용산에서 왜구와 대전하여 승리하였다.

>

>명홍치 원년(1488) 윤정월 3일, 조선국 홍문관 부교리 최부 일행 43명이 제주에서 고향에 돌아가다, 도중 폭풍을 만나 해상을 표류한 지 14일 만에 우두외양 근처의 작은 어촌에 등륙한 후, 월계순검사성에 체류하여 군민의 열정적인 환대를 받았다. 월계순검사성은 중국과 조선 인민의 우의를 나누었던 역이었던 셈이다. 현재 산강(山崗)위에는 아직도 월계순검사성의 유적이 남아 있다. 남아있는 성벽을 보고 있노라면 당시의 용맹스러운 군기와 병사의 위용이 연상된다.”

>

>최부의 기술:

>1488년 윤 1월 25일:월계순검사에 도착하다

>그들과 헤어져 바다를 지날 때 적용은 “이 바다를 가자면 서쪽으로 천태산을 볼 수 있는데 오늘은 마침 구름과 안개가 뒤덮여 볼 수가 없다”고 아쉬워하였다.

>저녁때 영해현 월계순검사에 도착하였다. 성은 산꼭대기에 있었으며 무장한 군졸들이 바닷가에 늘어 서 있었다. 적용은 그 부하와 함께 배에서 내려 성 안으로 들어가 유숙하였으나 우리 일행은 바닷가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

>1488년 1월 26일: 영해현을 지나다

>순검사 맞은편 강가에 월계포(越溪鋪)가 있었는데 그 앞에서 배를 내려 강가를 따라 걸었다. 강은 해구(海口)로 통하여 매우 광활하였는데 그 강의 발원지는 알 수 었었다....다시 길을 계속하여 백교령(百嶠嶺)에 도착하자 군졸 20여 명이 가마를 메고 와 우리를 맞아 주었다.

>

>◈임해:

>임해는 유구한 역사, 찬란한 문화,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지닌 도시로서, 1000년 여의 역사를 자랑하는 옛 대주부성이다. 명승지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북경의 만리장성의 자매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강남장성(江南長城)을 꼽을 수 있다.현재는 국가 제일의 ‘위생도시’로서 명성이 자자하고,왜적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중국의 영웅인 척계광 장군의 고향이며, 지리 자연 박물관이기도 하다. 관광객들은 이 곳의 근교에 있는 ‘도저고성’에서 시공을 넘나들며 명,청의 고가(古家)와 거리, 우리 선인들(최부 일행)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임해고성(臨海古城):

> 임해고성은 1000년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고성(古城)으로, 유교․불교․도교의 문화가 온축(蘊蓄)되어 있으며, 지질학의 박물관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주변에는 도저고성(桃渚古城)의 국보급 문화유산이 있으며, 도저성 전투의 영웅인 척계광(戚繼光)장군의 고향이기도 하다. 시내에는 동진(東晋: 317~420)때부터 축성된 총 길이 6km 여에 달하는 장성이 있는데, 비왜(備倭), 해수(海水), 해풍(海風)용으로 쌓았다 한다. 1700년 간의 변천을 겪은 양자강 이남의 “강남장성(江南長城)”은 만리장성이 모델이 되었다 하여 만리장성의 자매성(姉妹城)이라 부르고 있다. 강남장성을 기념하는 장성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성내에는 신라의 무역상과 사신들이 묵었던 신라방(新羅坊)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674년 신라 보민왕의 태자의 즉위식이 성내에서 거행되었다 한다. 또한 당나라 때  범죄자가 처형된 네거리 등 자양고가(紫陽古街)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당나라 건축 양식으로 유일무이한 용흥사(龍興寺)가 있으며, 성밖에 흐르고 있는 영강(靈江)에는 신라인들이 해상무역으로 사용했던 부두의 유적이 남아 있다.

>

>◇도저고성(桃渚古城):

> 도저고성은 임해(臨海)시 동남쪽 60km 지점에 위치한 명(明)대의 항왜(抗倭)유적지로 1963년 성인민정부가 성급중점문물보호단위(省級中点文物保護單位)로, 1993년에는 성급풍경명승구(省級風景名勝區)로 지정하였다가 2001년에는 국가급 문물유적지로 승격한 중국 최대의 항왜 유적지이다.

>

> 도저고성은 1387년 9월에 축성을 시작하였으며, 초기에는 토성이었으며, 성내에 해문위천호소(海門衛千戶所)가 있던 곳이다. 1439년 5월 왜구가 도저에 침입, 갖은 만행을 저질러 뼈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었다. 이에 격분한 조정과 군민이 1442년 오늘날의 도저성을 축성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

> 1559년 4월 왜구가 재차 침입, 14일간 도저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도저성의 영웅, 척계광(戚繼光)과 군민이 분연히 맞서 왜구를 성내에 한 발자욱도 진입시키지 않고 격퇴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역사는 이를 가리켜 도저의 전투(桃渚之役)로 기록하여 이를 기리고 있다.

>

> 성내에는 성벽과 동․서․남의 3개의 고성문(古城門), 명대(明代)의 거리, 청대(淸代)의 고택(古宅)이 원래의 형태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택에 도저 주민이 현재 거주하며 활보하고 있는 데, 관광객들에게는 고금시공(古今時空)이 혼연되어 있는 이 역사와 현실 사이에서 그저 망연자실(茫然自失)할 뿐이다.

>

> 표해록의 최부(崔溥)는 1488년 1월 19일부터 1월 23일까지 도저소에 머물며 변경을 침범한 왜인(倭人)으로 몰려 비왜파총관(備倭把總官)으로부터 심문을 받았다.

>

>절강성 작가인 왕금룡선생의 고증:

>“도저성에서 최부 등은 처음으로 조사를 받았는데, 왜구가 아닌 것으로 인정되었다. 손님으로서 그들은 어디에 배치되었을까? 표해록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 일행은 한 공관에 이르러 거기에서 머물도록 허락되었다”, “날이 저물었는데 천호 등 관원 7-8명이 큰 탁자를 놓고 탁자 부변에 서서…”, “공술이 끝난 후 숙사에 들어갔는데 숙사를 종자들과는 달리 정해주었다.”「표해록, 윤 1월 19일」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을 머물도록 허락한 공관은 바로 千戶所署 내에 있다. 그들이 휴식한 곳은 “별관”이다. 별관은 다른 공관이다. 비록 所署안에 있지 않지만 소서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러면 도저천호소서는 어디에 있을까? 지금 도저성 내에 아직도 아문(衙門)유적이 남아 있다. 원래 청나라 좌영수비아문이 세워져 있었는데 청 함풍 신유년(1861)에 불에 타버렸다. 군수 유오(劉璈)가 동치 7년(1868)에 돈을 지급하여 여기로 옮기게 되었다. 도저성의 군사분포에 의해 동시에 강남 여러 곳의 왜구와 맞서 싸운 성을 찾아본 바에 의하면 ,필자는 명나라 도저천호소서가 청나라 아문에 세워졌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청나라 아문은 명나라 천호소서의 유적지에 세워진 것이다. 이 유적지는 성내의 후소산(后所山)남쪽 기슭에 있는데 앞에 고루(鼓樓)가 있고, 큰 길이 남문으로 직통하고 있다. 아서(衙署)관원과 문서왕래는 모두 남문으로 출입하게 되어 있다. 그때 천호인 진화, 허청 등은 남문으로 들어왔고 최부 등은 서문으로 입성하였다.”

>

>

>최부의 기술:

>

> 1488년 윤 1월 19일: 도저소에 도착하다

> “이정, 효지, 상리 등이 서로 교대하여 나를 업고 고개 하나를 넘어 20리쯤되는 한 성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이 해문위의 도저소였다. 성을 중심으로 전후 7~8리 거리에는 군졸이 갑옷을 입고 창, 총, 방패 등으로 무장하고 지키고 있었다. 그 성에는 중문(重門)이 있었고 문은 철로 되어 있었다. 성곽위에는 성을 수비하는 초소가 줄 지워 세워져 있었고 성안에는 점포가 즐비 하였으며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물자가 풍부한 듯 보였다. 우리 일행은 한 공관에 이르러 거기에서 머물도록 허락되었다, 그런데 내 모습이 뼈만 남게 여윈데다가 관복은 진흙투성이로 보는 사람이 기절할 정도였다…”

>

>1488년 윤 1월 21일: 도저소에 머물다

>한 백발노인이 와 있기에 내가 물었다.

>“천태산과 안탕산은 여기서 얼마나 되오?”

>“천태산은 천태현 북쪽에 있는데 여기서 이틀쯤 가면 되고, 천태산 남쪽에서 하루쯤 가면 안탕산이 있소.”

>“이 성의 주산(主山)은 어느 산이오?”

>“석주산(石柱山)이오.” 노인이 나를 잡아끌고 문 밖으로 나와 한 산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석주산이오”하였다. 산은 정말 석벽이 산을 이루고 있었는데 산꼭대기에는 여섯 개의 큰 바위가 마치 기둥처럼 서 있었다.

>

>1488년 윤 1월 23일: 도저소를 출발하다

>적용, 허청, 왕광 등은 우리 일행과 함께 산장(山場)과 오두(烏頭)등 두 고개를 넘었다. 그 사이에는 큰 내가 있었는데 오두재밑에도 감계(鑑溪)라는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허청은 우리를 보고 시냇가로 오라고 하여 인가에다 밥을 시켜 같이 먹은 다음 다시 출발하였다. 당두(塘頭)와 포봉(蒲峯)등을 지나 밤중에 길가에 있는 절에 이르러 유숙하였는데 그 앞 마을이 바로 선암리(仙岩里)였다.

>

>1488년 윤 1월 24일: 건도소에 도착하다

>새벽에 천암리(穿岩里)를 지났다.동네 서쪽에 있는 산 위에 깍아지른 듯한 석벽이 높이 솟아 있고 활 모양으로 가운데가 높게 휜 큰 굴이 있었는데 마치 무지개와 같은 문이 있어서 동네 이름도 천암리라고 지은 것 같았다.

>◈안탕산(雁蕩山)

>안탕산은 절강성 악청시(浙江省岳淸市) 경내에 위치. 산정에 호수가 있고 갈대가 무성하며 수풀이 있어 가을 기러기들의 주숙처로 되어 “안탕”(雁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안탕산은 “해상명산”(海上名山), “환중절승”(寰重絶勝)으로 불리고 있으며 고대에는 “동남제일산”(東南第一山)로 불리우고 기이하고 수려한 산수로 해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풍경구 총면적은 450 k㎡, 5000 여개 명소가 있다. 영봉(靈峰), 영암(零岩), 삼절폭(三折瀑), 대용추(大龍湫), 안호(雁湖), 양각동(羊角洞), 현승문(顯勝門), 선교(仙橋) 8 개 명소로 나뉜다. 그중 “二靈一龍”은 “안탕삼절”(安蕩三絶)로 불린다. 안탕산은 커다란 산수화를 방불케 한다. 산봉, 동굴, 암석, 돌, 폭포, 샘물, 문門)은 그림 속의 아름다운 선들이다. 우뚝 선 기봉은 여러 가지 자태를 나타내 기묘하고 수려하며 오랜 동굴은 밝고 넓어 관저 같거나 깊고 굴곡이 심해 미궁과도 같다. 또 동굴 속에 동굴이 있고 괴석도 사람모양, 물체모양으로 생동하고 폭포가 하늘에 걸리고 안개가 자욱하여 마치 꿈속 같다. 또 맑은 샘물은 졸졸 흘러 사람들의 가슴을 맑게 해준다. 안탕산은 지리위치에 따라 남안탕(南雁蕩), 중안탕(中雁蕩), 북안탕(北安蕩)으로 나뉜다. 중안탕은 백악기 무늬암석을 위주로 하는 화산암체, 태풍의 침식과 단열로 굴곡적이고 아아하고 기이한 지형을 형성하였다. 명소 내에는 기이한 산 봉우리, 큰돌(巨石), 그윽한 골짜기,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안탕산은 당(唐)나라, 송(宋)나라 이래 승려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산중에 마애가 수많고 고찰들이 널려있으며 비문이 그림 같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아주 많아 문사 보물고(文史寶庫) 로 손색없다.

>

>◈항주(杭州):

>  항주는 절강성의 성도. 예로부터 “하늘에 천당이 있고 지상에 소주, 항주가 있다”는 말대  로 산과 호수와 정원에 둘러싸인 고도이며. 경(북경)~항(항주) 대운하(1,794km)의 기점이기도 하다. 수나라때부터 항주라 불리기 시작했다. 소주에서 버스로 3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510여 년전 조선의 선비로 절강성에 표착한 최부는 그의 저술 『표해록』에서 다음과 같이 항주에 관해 기술한 바가 있다. “항주는 동남지방 제일의 도시로 가옥이 밀집되어 있으며, 시장에는 금은이 가득차 있고 사람들은 수 놓은 비단으로 몸을 두르고 있었다. 바다에는 무역선이 줄지어 정박하여 있었고 거리의 환락가에는 술과 노래가 끊이지 않았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이 질 줄 모르며, 팔절(입춘, 춘분, 입하, 하지 입추, 추분, 입동, 동지)이 다 봄으로 경치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정말이지 별천지라 아니할 수 없었다”.(1488. 2. 6.~2. 12.)

>

>◇서호(西湖): 항주성의 서쪽에 있는 까닭에 붙여진 이름으로 시문에도 서자(西子)호 혹은 서시(西施)호라 표현되고 있는데 이처럼 이 호수의 아름다은 풍경을 미녀에 견주고도 있다. 서호유람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곳으로 그 가운데 평호추월각(平湖推月閣)이 유명하다. 또한 서호 중심에는 호심정(湖心亭)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삼담인월(三潭印月)이 있다. 삼담인월은 물속에 세 개의 탑을 세운 것으로, 달 그림자 셋이 물에 드리워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 의하면 소동파가 호수의 진흙땅을 메웠을 때 그 표식으로 세웠다고 한다. 참고로 중국의 5대 담수호는 동정호, 화양호, 태호, 서호, 홍택호가 있으며, 중국의 4대 미인으로는 삼국지에 나오는 초선, 왕소군, 서시, 양귀비를 말한다.

>

>◇영은사(靈隱寺): 서호의 북쪽에 북고봉(北高峰) 기슭에 있는 절로서 326년에 인도의 승 혜리(慧理)가 창건하였으나, 당나라때 배불운동으로 불에 타 없어졌는데, 오월국인 왕인 전류가 재건했다. 이때 유명한 오배나한당(五百羅漢堂)이 세워졌다. 현재의 것은 19세기 이후에 재건. 이 절의 별칭인“운림선사(雲林禪寺)” 의 액자는 청나라의 강희제의 서필이다. 영은사에서  경내에는 그윽함이 흐르고 대나무가 많으며 바위 또한 널려있어 옛 절로서 분위기가 한껏 깃들어 있다. 절의 문앞에는 비래봉(飛來峰)이라는 바위가 솟아 있는데, 혜리가 이 바위를 보고 “천축 영취산의 소령(小嶺)이 날아 온 것 같다” 라면서 절을 창건한 까닭에 비래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한다. 서호 까지는 버스로 약 10분 정도가 소요된다.

>


200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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