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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연초의 화두, 시 2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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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24 04:28 조회 14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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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현 선생님, 겨울의 끝자락에서 만나 뵙습니다. 그저 해오던 버릇대로 방학에 일을 몰아서 하다보니 선생님을 비롯한 고운님들께 소홀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일은 핑게이겠지요. 게으름과 비능률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부쩍 물건 찾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원래 책상이나 방바닥에 이것저것 늘어놓고 작업을 하는 게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었는데, 그것들 사이로 떨어뜨린 생각을 하루 종일 찾아 헤매는 일이 허다합니다. 며칠 무심하게 지내다 보면 바로 발치에 오도마니 않아 있곤 하는데,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무슨 원리로 설명해야 되나요?^^

  몇 개의 거멀못을 찾아 방바닥을 헤매다 보면 머릿 속으로는 다 되어 있는 논문을 마무리하는 데 구상부터 시작하여 머리 속으로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더 걸립니다. 비능률의 극치이지요.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차근차근 깔끔하게 정리하면서 진행하면 이런 일이 없을 것인데, 그건 바로 게으름 때문이지요. 그래서 게으름과 비능률은 제겐 동의어라고 할 수 있지요.

요즘 들어 선생님의 시를 접하면 달관의 멋이 느껴져서 더욱 좋습니다. 시 속에서 뜨거운 열정으로 가파른 등성이 길, 거친 돌길, 질퍽한 늪길 등을 힘겹게 지나 오신 다음 드디어 보드라운 모래가 얇게 덮인 평탄한 길을 휘파람 불며 걸어 가시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뵙게 됩니다.

저도 언젠가 모퉁이에 작은 약국이 있고 바다가 보이는 아담한 마을에, 하얀 목련 나무가 서너 그루 내다 보이는 안식처를 꾸몄으면 하는 꿈을 가꾸고 있습니다. 되도록 한 옥타브가 넘어가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이 좋겠지요. 바야흐로 지금이 난세(亂世) 아닌가요? 난세에 현자(賢者)들은 피세(避世)한다 했는데, 지금 그들은 모두 어디에 숨어 있고, 머리에 뿔 여럿 달린 괴물들만 난리 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때엔 어디로 숨어야 할까요?

시인들은 천기(天機)를 안다고 한 것이 옛날 어른들 말씀인데, 아무래도 선생님의 시를 많이 읽어야 그 천기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 부디 많은 시를 올려 주셔서 저로 하여금 이 난세를 피해 어디로 어떻게 숨어야 할지, 살아 갈 방도 좀 알려주십시오.


아 참, 사모님은 좀 어떠신지요? 늘 고생하실 선생님과 사모님이 추위 속에 떠오릅니다. 추어탕 말고는 새롭게 발견한 음식이 아직 없습니다. 추어탕이라도 괜찮다 하시면 조만간 뫼시겠습니다. 시간 나실 때 연락 주십시오.  그리고  지금까지처럼 늘 건강하십시오.


임진년 2월 13일


백규 드림


>백규 선생님!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방학에도 바쁘시지요?

>늘 건승하시기 빕니다.

>정이 넘치는 백규서옥에 가끔 와서 좋은 자료 잘 읽고 있습니다.

>

>졸시로 새해인사에 대신합니다. 혼자 생각해본 연초의 화두일 뿐입니다.

>저는 집에서 아기자기하게 잘 지내요. 24시간 돌봐주는 요양사를 집에 상주시키니

>한결 편하고 한가합니다.

>

>글쓰기는 여전히 열심히 하는데, 요즘은 문학회 동인지 참여작가 22인의 글을

>작가별로 읽고 감상문 쓰기를 하여 마쳤습니다. 동인 카페에 게시하니 다들

>좋아하더군요. 창작도 재미있지만 감상문 쓰기도 무척 즐거워요.

>

>그 감상문을 3회 연재로 여기 게시할까 합니다. 괜찮겠지요? 제 경우, 평론은

>어림없는 말이고 그저 독서운동 또는 감상문 쓰기 차원에서 해본 일입니다.

>금년에는 창작과 감상문 쓰기를 병행하자는 것이 저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  

>

>

>조용히 사는 즐거움        /아현 이재관

>

>

>은퇴한 친구가

>‘조용히 사는 즐거움’이란 책을 써서 전해주기에

>은퇴하면 저절로 조용해지는 거 아냐?

>허물없이 한 마디 했더니

>안 보이던 것 안 들리던 것을 찾아보란다.

>

>아, 언젠가 동백 흐드러진 남해의 고요 속에

>혼자 글을 쓰던 너의 서재를 훔쳐보며

>숨을 멈출 만큼 신기해했었지

>보이는 것 들리는 것만도 아파 죽겠는데

>무엇을 쓰고 있는 것이냐

>

>두 눈 뜨고 산다는 게 무엇인지

>멍하니 걷다가

>모퉁이에 유리문 두 짝, 글씨도 희미하여

>거기 약국이 있다는 걸 이제 알았다.

>흰 가운 흰 머리의 할머니 약사가 안쓰러워

>영감님은 뭘 하세요

>물으려다 진통제만 사들고 조용히 나왔다.  

>

>앓던 것만도 못 견뎌 또 진통제 먹을 시간인데

>주먹만 한 눈송이가 퍼붓기 시작했다.

>목련 가지의 파르르 떠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

>

>

>

>보리밟기        /아현 이재관

>

>

>맛은 덜하지만 일은 확실한데

>자존심 상하는 비정규직

>

>보리는 인터넷을 뒤지다 소리 지른다.

>입춘이면 아직 언 땅,

>지구 멀리 우주가 심상치 않다!

>아이슬란드 화산이 또 터졌다!

>

>봄인 게야,

>집이 흔들리고

>뿌리 없이 몸 크는 땅속인 게야.

>여전(如前)한 정규직들이 쑤군쑤군 하더니

>흑맥주나 하러 가잔다.    

>

>남녘 보리밟기,

>오, 그거라면

>보리는 시작부터 슬그머니 취해

>산색인풍전(山色因風轉) 하리니

>

>위층이 모르는 꿈을

>어두운 지하층은 매일 꾸는 거라네.

>재를 뿜는 화산 아래

>벗겨지고 문드러진 폐허의 대지를

>꾹꾹 모른 체 밟다보면

>청산유기골(靑山有奇骨) 하리니.

>---------

>

>

>* 산색인풍전(山色因風轉)

>= 대원대사의 시 중에서, “산 색깔은 바람 따라 갈리고 샘 소리는 비를 만나 열렸다.”

>

>* 청산유기골(靑山有奇骨)

>= 연담대사의 시 중에서, “백운은 정해진 마음이 없고 청산엔 기묘한 골격이 있다.”

>======================

>


201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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