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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23 15:28 조회 34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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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연행록] 1. 다시 밟아 본 역사속의 길

광활한 요동벌…'울 만한 곳이요 울어야 할 곳'

200여년 전 嚥巖 박지원의 탄성 실감

신문물 넘나들던 '韓中 2천년 실크로드'

급격한 공업화에 옛 영화 찾기어려워 


연행(燕行)이란 중국 청나라의 수도였던 연경(燕京)으로 가는 길을 뜻한다. 연경은 지금의 베이징(北京)이고, 조선의 연행 사신들이 남긴 기록이 '연행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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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는 창간 37주년을 기념해 조선시대 연행 사신들이 갔던 길을 다시 밟으며 '신(新)연행록'을 연재한다.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소장 유홍준 교수)와 공동 기획한 이 시리즈를 통해 한.중 문화교류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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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에서 베이징(北京)까지 2천리, 요동 평야를 에돌아 산하이관(山海關) 너머 오늘날 베이징이라 불리는 연경(燕京)에 이르는 길은 한.중 문화교류의 대동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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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천년 동안 이 길을 따라 양국의 무수한 사신들이 오가며, 조공(朝貢)을 통한 교역과 함께, 새로운 학문과 사상과 예술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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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불교.기독교가 들어온 것도, 문익점(文益漸)이 목화씨를 숨겨 들여온 것도 이 길이며, 수많은 조선의 학자들이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 것도 이 길이었다. 우리는 그 역사의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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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답사는 조선시대 3대 연행록(燕行錄)이라 불리는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老稼齋)연행록', 홍대용(洪大容)의 '을병(乙丙) 연행록',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를 기본 텍스트로 삼고, 김태준 교수가 그들이 밥 먹고 잠잔 곳을 빠짐없이 작성해낸 일정표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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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맥을 잡자면 압록강을 넘으면 봉황성(鳳凰城)을 거쳐 랴오양(遼陽), 선양(瀋陽)까지 계속 북으로 올라간 다음 요동평야를 가로질러 만리장성이 발해만과 맞닿은 산하이관에 다다르고 여기서 곧장 연경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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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2천61리, 32일 여정이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열하까지 또 2백67㎞, 약 7백리 길이 더해진다. 우리는 그 길을 전세 버스로 9박10일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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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답사는 압록강변 단둥(丹東)의 호산(虎山)에서 시작했다. 호산의 장성(長城)에 올라 강 건너 남쪽을 바라보니 길게 뻗은 산자락 끄트머리 능선에 오롯이 서있는 의주의 통군정(統軍亭)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연경으로 가는 이들은 누구든 저 산마루 정자에 올라 이역 땅을 바라보며 감회를 읊었다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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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우리는 만주땅 호산에서 의주의 통군정을 바라보며 불가불 건너뛴 서울~의주 천리길을 망연히 그려볼 뿐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신의주와 단둥을 잇는 철교가 우리를 세계와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슴 속에 담으며 봉황성을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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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건너온 연행사신.학자들은 봉황성에 닿기 전에 구련성(九連城)과 책문(柵門)이라는 국경선에서 하루씩 묵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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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거리가 1백 리나 되니 그것이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는데, 박태근 선생은 당시의 국경은 선(線)의 개념이 아니라 지역개념이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박지선 선생은 '노가재연행록'을 이끌어 책문 근처에서는 양국 상인들의 교역이 암암리에 성행했다고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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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문을 지나 얼마 되지 않아 차창 밖으로 홀연히 준수하게 생긴 우람한 봉황산이 나타났다. 봉황산은 아무리 보아도 한반도 어느 한쪽을 뚝 떼어온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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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신 가는 자들은 이 산을 보면서 고향을 다시 생각했고, 여기를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으로 추정하며 양만춘이 활을 쏘아 당태종의 한쪽 눈알을 빼버린 그 기상을 시로 읊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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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산에서 랴오양으로 가는 길은 천산(千山)산맥을 타고 넘는 멀고도 험한 길이다. 산길이 끝나고 태자하(太子河)라는 아련한 전설의 강이 나타나자 우리의 눈앞에는 옥수수밭이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광활한 요동평야가 끝간 데 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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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한 지평선을 볼 수 없는 좁은 땅덩이에서 사는 우리들로서는 누구든 감동치 않을 수 없었다. 연암 박지원도 그 장대함에 감격하여 "참으로 울 만한 곳이요, 울어야 할 곳이다(好哭場,可以哭矣)"라고 했다. 그러나 항시 무엇을 그릴까 긴장하고 있던 임옥상 화백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야! 이건 너무 그릴 게 없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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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양은 역사상 요동벌판의 중심이었다. 고구려와 피터지게 싸우던 연(燕)나라 모용씨(慕容氏)가 수도로 삼은 이후, 거란족의 요(遼)나라, 여진족의 금(金)나라 모두가 도읍에 준하는 거점으로 삼았고 청(淸)나라가 처음 도읍한 곳도 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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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청나라의 수도가 선양으로 옮겨진 뒤 랴오양은 요동의 권좌를 내주고 오늘날에는 화학공장이 들어선 인구 1백만명의 공업도시로 바뀌어 고도(古都)의 정취나 품격은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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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 시내 한복판에 우뚝 선 높이 70m의 요동 백탑(白塔)만이 그 옛날을 증언해 주고 있다. 11세기 요나라 때 세워진 이 팔각 13층 대리석 전탑(塼塔)은 우리 사신들에게 대륙적 스케일과 이국 정취를 한껏 심어준 요동의 명물로, 안목이 까다로운 안병욱 교수조차 정교한 조각과 가지런한 비례감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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랴오양과 가까이 있는 선양은 청나라 옛 도읍답게 고궁(故宮)과 함께 청태조 누르하치의 복릉(福陵), 조선시대 선비들이 '붉은 큰 돼지'라는 뜻으로 홍태시(紅泰豕)라고 부른 청태종 황타이지(皇太極)의 소릉(昭陵)이 건재하고 있다. 그 모두가 만주족의 옛 영광을 말해주는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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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날의 선양은 동북 3성(랴오닝.지린.헤이룽장성)의 중심이 되어 인구 7백만명의 중국 4대 도시로 급성장하면서 마구잡이 개발과 도시 빈민의 처절한 삶으로 뒤엉켜 마치 30년 전의 서울을 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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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 시내에는 역사의 강, 훈허(渾河)가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른 아침 산책 삼아 강변으로 나가보니 강 건너 빈민들이 '목공(木工)''전공(電工)''문짝수리'라고 적힌 피켓을 달고 시내 인력시장으로 달려가는 길고 긴 자전거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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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서 훈허의 흐린 물길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자니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만주족의 서러운 처지가 마치 내 일인 양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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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한족(漢族)은 일찍이 변방을 소수민족으로 전락시키는 중화정책(中華政策)을 써왔다. 그 결과 요나라의 거란족, 원나라의 몽고족, 청나라의 만주족들은 모두 오늘날 변방의 소수민족으로 겨우 자치구를 만들어 사는 차별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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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할 때 동아시아 변방의 한 소수민족인 우리의 처지는 얼마나 당당한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 모국(母國)을 갖고 있는 민족은 몽고족과 조선족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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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은 동아시아 역사상 기적 같은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민족적 자립을 위해 대국과 벌인 완강한 저항과 투쟁, 그리고 현명한 외교적 처신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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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의 '붉은 큰 돼지' 무덤 앞에서는 한명기 교수가 삼학사(三學士)와 병자호란 때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의 비극적 삶을 감동적으로 강의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다면 그런 아픔의 대가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던가를 나는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단호히 말하련다. 바로 그분들의 그런 희생 속에 우리 민족은 독립국가로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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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은 인간은 슬플 때만 우는 것이 아니라 답답한 마음을 씻어내는 통쾌감이 일어날 때도 운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는 "참으로 울 만한 곳이요, 울어야 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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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명지대 교수.국제한국학연구소장>


200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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