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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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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23 17:27 조회 11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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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은 어떻게 나왔는가?


노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붕당(朋黨)을 알아야 한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세력이 정국을 주도한다. 그 전엔 훈구파가 정권을 잡았으나, 지방에서 올라온 사림이라 불리는 신진 세력이 훈구파에게 도전한다. 그로 인해 네 번의 사화[士禍, 흔히 사림세력이 입은 화]를 거치면서 사림세력은 탕진되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림들이 결국 훈구파를 꺾고 사림이 세력을 잡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선조의 재위 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말하자면 그 전에는 훈구파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지방에서 상경한 사림파의 세력에 눌려 훈구파는 궁궐에서 완전히 축출되는 것이다. 결국 정국을 주도할 세력은 사림파 일파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전엔 훈구파가 있어서 그 일파를 공동의 적으로 삼아 단결했으나, 훈구파가 없어진 마당에 이젠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이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복잡다단한 붕당인 것이다.

붕당이란 이해관계에 따라 나뉜 당파들을 일컫는다. 훈구파를 꺾은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것이 그 시초였다. 사림파에는 김효원과 심의겸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당대 사림파의 양대 산맥이었다.

그러던 중 척신(戚臣)정치의 잔재[외척(外戚)정치 즉 왕비를 배출한 가문이 집권하는 것을 말함]를 둘러싼 갈등이 붕당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후 사림파의 소장 층에서는 김효원에게 붙고, 노장 층에서는 심의겸에 붙게 되었다. 사림파가 둘로 갈라져 싸우게 되었는데, 이것을 붕당의 시초였다.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어 동인이라 불렀고,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 서인이라 불렸다. 이처럼 붕당이란 사림파가 정치적[정파]⋅학문적[유교윤리 혹은 철학]으로 나누어진 파당을 말한다. 이런 붕당을 바탕으로 서로를 견제⋅비판하면서 올바른 정치를 유도하게 되었는데, 결국 이는 조선조 왕도정치의 기반으로 작용했다.

이 과정에서 언제까지나 각 파벌의 힘이 같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막강한 심의겸 파인  서인세력이 승승장구함으로써 김효원 파인 동인을 이기게 되었다. 결국 서인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서인들도 얼마 가지 못하여 다시 파벌이 분화되면서 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생겨난 붕당이 바로 노론과 소론이다.

여기까지 말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엔 훈구파가 권력을 잡다가 지방에서 올라온 사림파와 대결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훈구파는 네 번의 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그 후 살아남은 사림파가 지방에서 올라와 다시 훈구파와 격전을 벌이면서 그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다. 그 후 정권을 장악한 사림파 내부의 파벌들 간에 투쟁이 생겨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이 생겨난다. 그들 가운데 소장파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이고, 노장파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었다.

서인과 투쟁을 통해 동인을 분열시켜 남인[정약용 등의 실학자들이 남인 세력임]과 북인으로 갈라지게 했고, 북인을 축출한 다음 남인을 공격했다.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한 남인도 낙향하면서 서인은 다시 정권을 잡는다.  

그 후 서인세력은 내부적인 갈등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된다. 즉 송시열이란 노장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 노론이며, 윤증이란 소장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 소론이었다. 이들은 또 피나는 싸움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좀 더 전문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노론은 소론(少論)과 함께 앞 시기의 서인(西人)에서 갈라져 나왔다. 17세기 말엽 숙종 초기에 서인 내부에는 정치운영 방식, 훈신(勳臣)·척신(戚臣) 등 특권세력과의 제휴, 남인(南人)에 대한 처리 등 여러 문제를 둘러싸고 입장의 차이가 나타났으며, 거기에 지도자인 송시열(宋時烈)과 그 제자 윤증(尹拯) 사이의 불화가 거듭되는 상황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나의 정파를 이루어 남구만(南九萬) 등을 중심으로 결집한 소론과 대립하였다.


숙종 대에는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정쟁(政爭)의 축을 이루었으나, 남인이 중앙정국에서 몰락한 뒤 경종 대와 영조 대에는 소론과 대립하면서 중앙정치를 주도하였다. 특히 경종이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동생인 연잉군(延礽君:뒤의 영조)을 후원한 것이 반대파인 소론에게 반역으로 몰려,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大臣)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처형되는 사건[辛壬士禍]을 겪음으로서 소론과의 융화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뒤에 소론을 반격하여 소론 4대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제거하였고, 소론이 주도하고 남인이 참여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한 뒤로는 조정에서 확고한 우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영조와 정조가 탕평책(蕩平策)으로 붕당을 깨고 국왕의 국정운영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국왕의 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가 점점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전통적인 붕당의 의미는 퇴색되어 갔다.


18세기 말에는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높이는 데 찬동하는가의 입장 차이에 따라 시파(時派)와 벽파(僻派)가 대립하였다. 그것은 노론 자체의 분기라고 설명되는 경우가 많지만, 남인과 소론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그 이후 노론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던 데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시파와 벽파는 노론 내부의 분열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에 의한 결집이었다. 노론의 명분과 이념은 19세기 이후로도 존속하였으나, 정권을 잡아 정부를 운영하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노론의 사상은 대개 이이(李珥)를 거쳐 김장생(金長生)·송시열에 의하여 조선식으로 소화된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였고 이단을 적극적으로 배격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중원에서 명(明)나라의 멸망으로 끊어진 천하의 정통성을 조선이 이어받았다는 조선중화사상(朝鮮中華思想)과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으로 국가의 정체성과 사회질서를 유지하려 하였다.


또 정치이념에서는 사족(士族)의 정치주도권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정파를 군자가 모인 군자당(君子黨)으로 여기고 반대당을 소인당(小人黨)으로 규정함으로써 반대파의 숙청과 권력독점을 합리화하였다. 이러한 이념은 남인과 소론 등에 의하여 비판받았고, 내부에서도 세계의 객관적인 인식과 이용후생을 강조하는 북학파(北學派)가 성장함으로써 극복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회정책은 대상인과 대지주의 입장을 대변하였다고 설명되기도 하지만 적극적인 해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공리공담에 빠져서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저버린 채, 낡은 질서와 기득권의 유지에 집착하였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지만, 근래에는 그들이 오랜 시간 사회를 주도할 수 있었던 힘과 논리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2012-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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