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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01-23 17:39 조회 20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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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文宗) 때인 대강(大康) 연간(서기 1075~1084)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 문인이 지은 것이다. 지금 간략하게 싣는다.]


천지가 개벽한 이래 이 땅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 임금과 신하의 명칭도 없었다. 다만 아도간(我刀干)ㆍ여도간(汝刀干)ㆍ피력간(彼刀干)ㆍ오도간(五刀干)ㆍ유수간(留水干)ㆍ유천간(留天干)ㆍ신천간(神天干)ㆍ오천간(五天干)ㆍ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이 있었는데, 이들 추장이 백성들을 통솔하였으니, 모두 10,000호에 75,000명이었다. 백성들은 대부분 산이나 들에 살면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고 밭을 갈아 밥을 먹었다.


후한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서기 42) 3월 계욕일(禊浴日, 음력 첫 사일(巳日)에 물가에서 몸을 씻고 모여서 술을 마시는 날이다.)에 그들이 살았던 북쪽 구지(龜旨)[이것은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마치 10마리의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 같다고 해서 이렇게 불렀다.]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났다. 200~300명 정도가 이곳에 모이자 사람 말소리가 들렸는데 그 형체를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났다.


“여기에 사람이 있는가?”

구간들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구간들이 대답하였다.

“구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하시길, 이곳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려온 것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위에서 흙을 파면서 노래하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어라. 그렇게 하면 곧 대왕을 맞이하게 되어 기뻐 춤을 추게 될 것이다.”


구간들이 그 말처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얼마 되지 않아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붉은 줄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 속에 금상자가 있었고, 상자를 열어 보니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면서 그 알을 향해 수없이 절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보자기에 싸서 안고 아도가의 집으로 가서 탁자 위에 두고는 모두들 흩어졌다.


12일이 지난 그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개의 알이 어린 아이로 변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뛰어났다. 곧 평상에 앉히고 사람들이 절을 하며 축하하고 극진히 공경하였다. 아이들은 나날이 커졌는데, 십여 일이 지나자 키가 9척이나 되어 은(殷)나라의 탕왕(湯王) 같았고 얼굴은 용처럼 생겨서 한(漢)나라의 고조(高祖) 같았다. 여덟 가지 색깔의 눈썹은 당(唐)나라의 요(堯)임금 같았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虞)나라의 순(舜)임금 같았다.


그 달 보름에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首路)라고 하였는데, 혹은 수릉(首陵)[수릉은 세상을 떠난 뒤의 시호이다.]이라고도 하였다. 나라는 대가락(大駕洛)이라 불렀는데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였다. 곧 여섯 가야의 하나였다. 나머지 다섯 명도 각각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동쪽으로는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蒼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임시로 궁궐을 짓고 살았는데, 검소한 것을 바랄 뿐이어서 이엉의 끝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만든 계단도 3자밖에 되지 않았다.


[文廟朝 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開闢之後 此地未有邦國之號 亦無君臣之稱 越有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神天干五天干神鬼干等九干者 是酋長 領總百姓 凡一萬戶 七萬五千人 多以自都山野 鑿井而飮 耕田而食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禊浴之日 所居北龜旨[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 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 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 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爲何 對云 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玆故降矣 爾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踴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忻而歌舞 未幾 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裹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 俱伸百拜 尋還裹著 抱持而歸乃我刀家 寘榻上 其衆各散

過浹辰 翌日平明 衆庶復相聚集開合 而六卵化爲童子 容貌甚偉 仍坐於床 衆庶拜賀 盡恭敬止 日日而大 踰十餘晨昏 身長九尺 則殷之天乙 顔如龍焉 則漢之高祖 眉之八彩 則有唐之高 眼之重瞳 則有虞之舜

於其月望日卽位也 始現故諱首路 或云首陵[首陵是崩後諡也]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餘五人 各歸爲五伽耶主 東以黃山江 西南以蒼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耶山 南而爲國尾 俾創假宮而入御 但要質儉 茅茨不剪 土階三尺


2년 계묘(서기 43) 봄 정월에 왕이 말하였다.

“짐이 수도를 정하려고 한다.”

그리고는 임시로 지은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畓坪)[이것은 옛날부터 묵혀 오던 밭인데, 새로 경작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답(畓)은 곧 문(文)의 속자이다.]으로 나아가 사방의 산악들을 바라보다가,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이곳은 땅이 좁아 여뀌잎 같지만, 지세가 빼어나고 특이하여 16나한(羅漢)이 살만한 곳이다. 하물며 하나에서 셋을 이루고 셋에서 칠을 이루니, 일곱 분의 성인이 머물 땅으로 여기가 참으로 적합하다. 이 땅을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래서 1,500보 둘레의 외곽성을 쌓고 궁궐과 전각,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고, 창고 등의 터를 정한 뒤, 궁궐로 돌아왔다. 두루 나라 안의 장정과 인부와 장인들을 징발하여, 그 달 20일에 성을 쌓아서 3월 10일이 되어 공사를 마쳤다. 그리고 궁궐과 여러 집들은 농한기를 기다려서 지었으니, 그 해 10월에 시작해서 갑진년(서기 44) 2월에 완성하였다. 좋은 날을 받아 새 궁궐에 들어가서 모든 정사를 처리하고 여러 업무도 부지런히 처리하였다.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임신을 하였는데, 10달이 되어서 알을 낳았다. 알은 사람으로 변하였는데 그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그는 바다를 항해해 가야에 왔는데, 키가 3척이었고 머리 둘레가 1척이었다. 그는 흔연히 대궐로 들어가서 왕에게 말하였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왕이 말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명해 왕위에 오르게 하였고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이 편안하도록 하였으니, 감히 천명을 어기어 그대에게 왕위를 줄 수는 없소. 또 감히 내 나라와 백성을 그대에게 줄 수도 없소.”


그러자 탈해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술법으로 겨루어 보겠는가?”

왕이 말하였다.

“좋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매로 변하자 왕은 독수리로 변하였다. 탈해가 또 참새로 변하자 왕은 새매가 되었다. 이러는 사이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본래의 몸으로 돌아오자 왕도 다시 본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탈해가 곧 엎드려서 항복하며 말하였다.

“제가 술법을 다투는 마당에,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죽음을 면한 것은, 모두 성인이 살생을 싫어하는 어진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왕과 함께 왕위를 다투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탈해는 곧 절을 하고 나가서는, 인근 교외의 나루터에 이르러서 중국에서 온 배가 다니는 물길을 따라 가려고 하였다. 왕은 그가 머물면서 난리를 꾀할까 걱정이 되어서 급히 수군 500척을 보내어 뒤쫓도록 하였다. 하지만 탈해는 계림의 땅 안으로 달아났기 때문에 수군들은 모두 그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여기에 실린 기록은 신라의 것과 많이 다르다.


二年癸卯春正月 王若曰 朕欲定置京都 仍駕幸假宮之南新畓坪[是古來閑田 新耕作故云也 畓乃俗文也]四望山嶽 顧左右曰 此地狹小如蓼葉 然而秀異 可爲十六羅漢住地 何況自一成三 自三成七 七聖住地 固合于是 托土開彊 終然允臧歟 築置一千五百步周廻羅城 宮禁殿宇 及諸有司屋宇 武庫倉禀之地 事訖還宮 徧徵國內丁壯人夫工匠 以其月二十日 資始金湯 曁三月十日役畢 其宮闕屋舍 侯農隙而作之 經始于厥年十月 逮甲辰二月而成 涓吉辰御新宮 理萬機而懃庶務

忽有琓夏國含達王之夫人妊娠 彌月生卵 卵化爲人 名曰脫解 從海而來 身長三尺 頭圍一尺 悅焉詣闕 語於王云 我欲奪王之位 故來耳 王答曰 天命我俾卽于位 將令安國中而綏下民 不敢違天之命 以與之位 又不敢以吾國吾民 付囑於汝 解云 若爾可爭其術 王曰 可也 俄頃之間 解化爲鷹 王化爲鷲 又解化爲雀 王化爲鸇 于此際也 寸陰未移 解還本身 王亦復然 解乃伏膺曰 僕也適於角術之場 鷹之於鷲 雀之於鸇 獲免焉 此盖聖人惡殺之仁而然乎 僕之與王 爭位良難 便拜辭而出 到鄰郊外頭 將中朝來泊之水道而行 王竊恐滯留謀亂 急發舟師五百艘而追之 解奔入雞林地界 舟師盡還 事記所載 多異與新羅


건무(建武) 24년 무신(서기 48) 7월 29일, 구간들이 조회할 때 왕에게 아뢰었다.

“대왕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래로 아직까지 아름다운 배필을 만나지 못하셨습니다. 청하옵건대, 신들의 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골라 대궐로 들여보내 배필로 삼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짐이 이곳에 온 것은 하늘의 명이고 짐의 배필로 왕후가 되는 것도 하늘의 명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그리고는 곧 유천간(留天干)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좋은 말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도록 하고, 다시 신귀간(神鬼干)에게 명하여서 승점(乘岾)[망산도는 수도 남쪽 섬이다. 승점은 수도 아래에 있는 속국이다.]에 가도록 하였다.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 모퉁이부터 붉은색 돛을 달고 붉은색 깃발을 휘날리는 배가 북쪽으로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섬 위에서 횃불을 올리자 배에 있던 사람들이 다투어 땅으로 내려왔다. 그들이 앞다투어 달려오자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 궁궐로 달려와서 아뢰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이윽고 구간들을 보내어 목란으로 만든 키를 바로 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얼른 궁궐로 모시려고 하자, 왕후가 말하였다.

“나는 그대들을 평소에 몰랐는데, 어찌 경솔히 따라갈 수 있겠소.”


그래서 유천간 등이 돌아와서 왕후의 말을 아뢰었다. 왕은 그렇다고 여기고는 관리들을 거느리고 행차하였다. 궁궐에서 서남쪽으로 60보 정도 떨어진 곳의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궐로 만들고 왕후를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에 있는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산 위에서 쉬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예물로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다. 그밖에 따라온 신하 두 명이 있었는데, 이름이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었고 이들의 아내는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라고 하였다. 또 종까지 헤아리면 20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가져온 수놓은 비단과 옷과 옷감, 금과 은, 주옥과 옥 등의 장신구는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왕후가 왕의 임시 궁궐로 점점 다가오자, 왕이 나가서 맞아들여 함께 장막으로 만든 궁궐로 들어갔다. 왕후를 따라온 여러 신하들도 모두 계단 아래로 나아가서 임금님을 뵙고는 곧장 물러났다. 왕이 관리에게 명하여 신하의 부부를 인도하게 하고 말하였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 주어 편히 머물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방 하나에 5~6명씩 편히 머물 수 있도록 하라.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잘 수 있도록 하라. 의복과 비단과 금은보화 등은 군사들을 모아서 지키도록 하라.”


그리고 왕과 왕비가 함께 침전에 들자, 왕후는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인 금년 5월에 부왕께서 황후와 함께 저를 돌아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꿈에 함께 하늘나라의 상제님을 뵈었단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국의 시조 수로를 하늘이 내려 보내어 왕위에 앉았으니, 신령스럽고 거룩한 이는 오직 그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새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지만 아직까지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다. 경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 그의 배필로 삼아라.’라고 하시고는 말씀을 마치자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단다. 눈을 뜬 뒤에도 상제의 말씀이 여전히 귀에 있는 듯하구나. 너는 여기서 얼른 부모와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거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다 저 멀리와 하늘 저 멀리까지 당신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였다.

“짐은 태어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서, 공주가 저 멀리서부터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그래서 신하들이 왕비를 들이라고 청하였지만 감히 따르지 않았소. 지금에서야 현숙한 분께서 이렇게 스스로 오셨으니 이 사람에게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오.”


드디어 혼인하여 맑은 밤을 두 번 지내고 하루 낮을 지냈다. 그리고 드디어 타고 왔던 배를 돌려보냈다. 뱃사공들은 모두 15명이었는데, 각각 쌀 10섬과 베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8월 1일에 대궐로 돌아왔는데, 왕은 왕비와 함께 수레를 탔고 왕후를 따라온 신하의 부부도 나란히 수레를 탔다. 중국에서 가져온 여러 물건들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왔으니, 물시계가 정오에 가까웠을 때였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였고 신하 부부와 노비들도 빈 집 두 채에 나누어 들어가도록 하였다. 그밖의 종자들은 20여 칸 되는 집 한 채를 주고 인원 수에 따라 나누어 있게 하였으며, 날마다 필요한 물건을 넉넉하게 주었다. 그들이 가져온 보물은 대궐의 창고에 보관하고 왕후의 사계절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屬建武二十四年戊申七月二十七日 九干等朝謁之次 獻言曰 大王降靈已來好仇未得 請臣等所有處女絶好者 選入宮闈 俾爲伉儷 王曰 朕降于玆 天命也 配朕而作后 亦天之命 卿等無慮

遂命留天干 押輕舟 持駿馬 到望山島立待 申命神鬼干 就乘岾[望山島 京南島嶼也 乘岾 輦下國也] 忽自海之西南隅 掛緋帆 張茜旗 而指乎北 留天等 先擧火於島上 則競渡下陸 爭奔而來 神鬼望之 走入闕奏之 上聞欣欣 尋遣九干等 整蘭橈 揚桂楫而迎之 旋欲陪入內 王后乃曰 我與爾等素昧平生 焉敢輕忽相隨而去 留天等返達后之語 王然之 率有司動蹕 從闕下西南六十步許地 山邊設幔殿祗候

王后於山外別浦津頭 維舟登陸 憩於高嶠 解所著綾袴爲贄 遺于山靈也 其他侍從媵臣二員 名曰申輔趙匡 其妻二人 號慕貞慕良 或臧獲幷計二十餘口 所賚錦繡綾羅 衣裳疋段 金銀珠玉 瓊玖服玩器 不可勝記

王后漸近行在 上出迎之 同入帷宮 媵臣已下衆人 就階下而見之卽退 上命有司 引媵臣夫妻曰 人各以一房安置 已下臧獲各一房五六人安置 給之以蘭液蕙醑 寢之以文茵彩薦 至於衣服疋段寶貨之類 多以軍夫遴集而護之

於是王與后共在御國寢 從容語王曰 妾是阿踰陁國公主也 姓許名黃玉 年二八矣 在本國時 今年五月中 父王與皇后 顧妾而語曰 爺孃一昨夢中 同見皇天上帝 謂曰 駕洛國元君首露者 天所降而俾御大寶 乃神乃聖 惟其人乎 且以新莅家邦 未定匹偶 卿等須遣公主而配之 言訖升天 形開之後 上帝之言 其猶在耳 你於此而忽辭親 向彼乎往矣 妾也浮海遐尋於蒸棗 移天夐赴於蟠桃 螓首敢叨 龍顔是近 王答曰 朕生而頗聖 先知公主自遠而屆 下臣有納妃之請 不敢從焉 今也淑質自臻 眇躬多幸 遂以合歡 兩過淸宵 一經白晝 於是遂還來船 篙工楫師共有十有五人 各賜糧粳米十碩 布三十疋 令歸本國

八月一日廻鑾 與后同輦 媵臣夫妻 齊鑣並駕 其漢肆雜物 咸使乘載 徐徐入闕 時銅壺欲午 王后爰處中宮 勅賜媵臣夫妻私屬空閑二室分入 餘外從者 以賓舘一坐二十餘間 酌定人數 區別安置 日給豐羨 其所載珍物 藏於內庫 以爲王后四時之費


하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구간들은 모두 관리들의 우두머리인데도, 그 지위나 명칭이 모두 다 소인이나 농부들의 이름과 같아서 고관의 칭호가 아니니, 만약 외국에 전해진다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드디어 아도(我刀)를 아궁(我躬)으로 고치고, 여도(汝刀)를 여해(汝諧)로 피도(彼刀)를 피장(彼藏)으로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으로 고쳤다.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의 명칭은 위 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래 글자만 고쳐서 유공(留功)과 유덕(留德)으로 하고, 신천(神天)은 신도(神道)로 고치고 오천(五天)은 오능(五能)으로 고쳤으며, 신귀(神鬼)는 음은 바꾸지 않고 그 뜻만 고쳐서 신귀(臣貴)라고 하였다.


그리고 계림(雞林)의 관직과 의례를 가져다 각간(角干)ㆍ아질간(阿叱干)ㆍ급간(級干)의 등급을 두었다. 그리고 그 아래의 관료는 주나라와 한나라의 제도에 따라 나누어 정하였다. 그러니 이것은 옛것을 고쳐 새것을 만들어서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로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잘 다스려서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였으니, 그 교화가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그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게 되었다. 더욱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고 양에 음이 있는 것과 같았으니, 그 공로는 마치 도산씨(塗山氏)가 하(夏)나라를 돕고 당원(唐媛)이 요(姚)를 일으키는 것과 같았다. 그 해에 왕후가 곰을 얻는 꿈을 꾸고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一日上語臣下曰 九干等 俱爲庶僚之長 其位與名 皆是宵人野夫之號 頓非簪履職位之稱 儻化外傳聞 必有嗤笑之恥 遂改我刀爲我躬 汝刀爲汝諧 彼刀爲彼藏 五刀爲五常 留水留天之名 不動上字 改下字留功留德 神天改爲神道 五天改爲五能 神鬼之音不易 改訓爲臣貴 取雞林職儀 置角干阿叱干級干之秩 其下官僚 以周制漢儀而分定之 斯所以革古鼎新 設官分職之道歟

於是乎理國齊家 愛民如子 其敎不肅而威 其政不嚴而理 況與王后而居也 比如天之有地 日之有月 陽之有陰 其功也 塗山翼夏 唐媛興姚 頻年有夢 得熊羆之兆 誕生太子居登公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서기 189) 3월 1일에 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1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이 마치 땅이 꺼지듯이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했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처음에 올 때 닻줄을 내리고 건너오던 나루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였고, 비단 바지를 벗었던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하였으며, 붉은 기를 달고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하였다.


왕후를 따라온 신하 천부경 신보(申輔)와 종정감 조광(趙匡) 등은 가락국에 온 지 30년 동안 각각 딸 둘을 낳았다. 이들 부부는 1~2년이 지나 모두 죽었고, 그 나머지 노비들도 가락국에 온지 7~8년이 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고, 오로지 고향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다가 모두 고향 땅을 향해 머리를 두고 죽었다. 그들이 머물렀던 객관은 텅 비어 아무도 없었다.


왕은 늘 혼자 잠들며 슬피 탄식하다가 10년 뒤인 헌제(獻帝) 건안(建安) 4년 기묘(서기 199)에 세상을 떠났으니 수명이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이 마치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으니, 왕후가 죽었을 때보다 더 심하였다. 곧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1장이며 둘레가 300보였다. 여기서 장례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불렀다. 그 아들인 거등왕(居登王)부터 9대손인 구형왕(仇衡王)에 이르기까지 이 사당에 배향하였다. 반드시 매년 정월 3일과 7일, 5월 5일과 8월 15일이면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로 제사 지냈는데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一日 后崩 壽一百五十七 國人如嘆坤崩 葬於龜旨東北塢 遂欲不忘子愛下民之惠 因號初來纜頭村 曰主浦村 解陵袴高岡 曰綾峴 茜旗行入海涯 曰旗出邊

媵臣泉府卿申輔 宗正監趙匡等 到國三十年後 各産二女焉 夫與婦踰一二年 而皆抛信也 其餘臧獲之輩 自來七八年間 未有玆孶生 唯抱懷士之悲 皆首丘而沒 所舍賓館 圓其無人

元君乃每歌鰥枕 悲嘆良多 隔二五歲 以獻帝建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而殂落 壽一百五十八歲矣 國中之人 若亡天只 悲慟甚於后崩之日 遂於闕之艮方平地 造立殯宮 高一丈 周三百步而葬之 號首陵王廟也 自嗣子居登王 洎九代孫仇衡之享是廟 須以每歲孟春三之日 七之日 仲夏重五之日 仲秋初五之日 十五之日 豐潔之奠 相繼不絶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 용삭(龍朔) 원년 신유(서기 661) 3월 모일에 왕이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왕의 9세손 구형왕(仇衡王)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 거느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庶云) 잡간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께서 짐을 낳으셨다. 이러한 이유로 시조 수로왕께서는 과인에게 있어서 15대 시조가 된다. 그 분이 다스렸던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 분을 장사지낸 사당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종묘와 합하여서 계속해서 제사 지내도록 하라.”


그리고 관리를 옛터에 보내 사당에서 가까운 상상전(上上田) 30경을 주어 제사 지내는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이를 왕위전(王位田)이라고 부르고 본래의 토지에 붙여주었다. 왕의 17대 손인 갱세(賡世) 급간이 조정의 뜻을 삼가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였다. 매년 때가 되면 술과 식혜를 만들고 떡과 밥, 차와 과일 등 여러 가지 제물을 갖추어서 제사를 지냈으니,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 그 제사일도 거등왕(居登王)이 정한 5일을 빠뜨리지 않았으니, 이렇게 정성스럽게 지내어서 우리들에게까지 이르렀다. 거등왕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서기 199)에 별실을 설치한 이후로 구형왕 말년까지 내려오면서 330년 동안 지내는 제사는 오랜 세월 동안 변하지 않고 내려왔다. 그러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뒤부터 용삭 원년 신유(서기 661)까지 60년 동안 이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는 혹 거르기도 하였다. 아름답도다, 문무왕(文武王)[법민왕의 시호이다.]이여! 먼저 조상을 받들어 효성을 다하는구나! 끊어졌던 제사를 이어 다시 행하였구나!


洎新羅第三十王法敏龍朔元年辛酉三月日 有制曰 朕是伽耶國元君九代孫仇衡王之降于當國也 所率來子世宗之子 率友公之子 庶云匝干之女 文明皇后 寔生我玆者 玆故元君於幼冲人 乃爲十五代始祖也 所御國者已曾敗 所葬廟者今尙存 合于宗祧 續乃祀事

仍遣使於黍離之址納取近廟上上田三十頃 爲供營之資 號稱王位田 付屬本土 王之十七代孫賡世級干 祗禀朝旨 主掌厥田 每歲時釀醪醴 設以餠飯茶菓庶羞等奠 年年不墜 其祭日 不失居登王之所定年內五日也 芬苾孝祀 於是乎在於我 自居登王卽位己卯年置便房 降及 仇衡朝末來 三百三十載之中 享廟禮典 永無違者 其乃仇衡失位去國 逮龍朔元年辛酉 六十年之間 享是廟禮 或闕如也 美矣哉 文武王[法敏王諡也]先奉尊祖 孝乎惟孝 繼泯絶之祀 復行之也


신라 말에 충지(忠至) 잡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금관(金官)의 높은 성을 쳐서 성주장군이 되었다. 그런데 영규(英規) 아간(阿干)이 장군의 위세를 빌려 사당의 제사를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냈는데, 단오날이 되어 사당에 고하다가 아무 이유 없이 들보가 무너져 깔려 죽었다. 그러자 성주장군이 혼자 말하기를, ‘다행히 전세의 인연으로 분수에 넘치게 거룩하신 왕께서 다스리던 나라의 성에서 제사를 받들게 되었으니, 내 마땅히 그 모습을 그리고 향을 피우고 등불을 밝혀 그 은혜를 갚아야겠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무늬 있는 비단 3자에 그 모습을 그려 벽 위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불을 밝혀 우러러보며 공손하게 모시었다. 그러길 3일째 되는 날 영정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땅바닥에 고였는데 거의 한 말이나 되었다. 장군이 크게 놀라서 그 그림을 받들고 사당으로 나아가 불살랐다.


그리고 그 즉시 수로왕의 직계손이 규림(圭林)을 불러서 말하였다.

“어제도 이런 좋지 못한 일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거듭될 수 있는가? 이것은 필시 사당의 혼령이 내가 그림을 그려서 공양하는 것이 불손하다고 진노하신 것이리라. 영규는 이미 죽었고 나도 너무나 이상하게 여겨 그 그림을 이미 불태워버렸으니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다. 경은 수로왕의 직계 후손이니 예전처럼 제사를 지내는 것이 참으로 합당할 것이다.”


이리하여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는데 나이 88세가 되어서 죽었다.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이어서 제사를 지냈다. 단오일 알묘제(謁廟祭) 때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미친 증세가 일어나 사당에 와서는 간원의 제물을 치워버리고 자기가 준비한 제물을 차려 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술잔을 세 번 올리기도 전에 갑자기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죽었다. 그래서 옛 사람들 말에 “함부로 지내는 제사에는 복이 없고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라고 하였는데, 지난번에는 영규가 그랬고 나중에는 준필이 그랬으니, 이들 부자를 두고 이르는 말이던가?


新羅季末 有忠至匝干者 攻取金官高城 而爲城主將軍 爰有英規阿干 假威於將軍 奪廟享而淫祀 當端午而致告祠堂 梁無故折墜 因覆壓而死焉 於是將軍自謂 宿因多幸 辱爲聖王所御國城之奠 宜我畫其眞影 香燈供之 以酬玄恩 遂以鮫絹三尺 摸出眞影 安於壁上 旦夕膏炷 瞻仰虔至 才三日 影之二目 流下血淚 而貯於地上 幾一斗矣 將軍大懼 捧持其眞 就廟而焚之

卽召王之眞孫圭林而謂曰 昨有不祥事 一何重疊 是必廟之威靈 震怒余之圖畫 而供養不孫 英規旣死 余甚怪畏 影已燒矣 必受陰誅 卿是王之眞孫 信合依舊以祭之

圭林繼世奠酹 年及八十八歲而卒 其子間元卿 續而克禋 端午日謁廟之祭 英規之子俊必又發狂 來詣廟 俾徹間元之奠 以己奠陳享 三獻未終 得暴疾 歸家而斃 然古人有言 淫祀無福 反受其殃 前有英規 後有俊必 父子之謂乎


또 도적들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다고 여기고는 이를 훔쳐가려고 하였다. 도둑들이 처음 왔을 때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에 살을 먹인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와서는 사방으로 비 오듯 화살을 쏘아대어 7~8명이 죽자 도적들이 달아났다. 며칠이 지나 다시 왔을 때는 30여 자나 되는 큰 구렁이가 눈에서 번갯불을 번쩍이며 사당 옆에서 나와 8~9명을 물어 죽였다. 겨우 살아난 자들도 죄다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흩어져 도망쳤다. 그래서 왕릉의 안팎에 반드시 신령스러운 존재가 있어서 왕릉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又有賊徒 謂廟中多有金玉 將來盜焉 初之來者也 有躬擐甲冑 張弓挾矢 猛士一人從廟中出 四面雨射 中殺七八人 賊徒奔走 數日再來 有大蟒長三十餘尺 眼光如電 自廟旁出 咬殺八九人 粗得完免者 皆僵仆而散 故知陵園表裡 必有神物護之


건안(建安) 4년 기묘(서기 199)에 처음 사당을 세운 뒤에 지금 임금님께서 나라를 다스리신 지 31년째인 대강(大康) 2년 병진(서기 1076)까지 무릇 878년이나 되었지만, 쌓아올린 아름다운 흙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 당시 심었던 아름다운 나무들도 마르지도 썩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그곳에 장식한 수많은 옥조각도 부서지지 않았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신체부(辛替否)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고 무너지지 않은 무덤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 가락국은 옛날에 망하였으니 체부의 말이 맞는다고 하겠지만, 수로왕의 사당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으니 체부의 말은 믿을 것이 못된다.


自建安四年己卯始造 逮今上御國三十一載大康二年丙辰 凡八百七十八年 所封美土 不騫不崩 所植佳木 不枯不朽 況所排列萬蘊玉之片片 亦不頹坼 由是觀之 辛替否曰 自古迄今 豈有不亡之國 不破之墳 唯此駕洛國之昔曾亡 則替否之言有徵矣 首露廟之不毁 則替否之言 未足信也


이 중에는 또 수로왕을 사모해서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 29일이면 일반 백성들과 아전과 군졸들이 승점(乘岾)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며 환호하면서 동쪽과 서쪽을 바라본다. 건장한 사내들이 좌우로 나뉘어서, 한쪽은 망산도(望山島)에서 말을 타고 육지를 향해 내달리고, 한쪽은 뱃머리를 둥실 띄워 물에서 서로 밀면서 북쪽 고포(古浦)를 향하여 앞다투어 달려간다. 대체로 이것은 옛날 유천간과 신귀간 등이 허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에게 보고하던 흔적인 것이다.


此中更有戲樂思慕之事 每以七月二十九日 土人吏卒 陟乘岾 設帷幕 酒食歡呼 而東西送目 壯健人夫 分類以左右之 自望山島 駿蹄駸駸 而競湊於陸鷁首泛泛 而相推於水 北指古浦而爭趨 盖此昔留天 神鬼等 望后之來 急促告君之遺跡也


나라가 망한 뒤로 대대로 그 이름이 달랐다. 신라 제31대 정명왕(政明王)이 왕위에 올랐던 개요(開耀) 원년 신사(서기 681)에는, 이곳을 금관경(金官京)이라 하여 태수를 두었다. 그 뒤 259년이 지나 우리 태조가 통합한 뒤에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였고 배안사(排岸使)를 둔 것이 48년 동안이었다. 그 다음에는 임해군(臨海郡)이나 김해부(金海府)가 되었으며 도호부(都護府)를 둔 것이 27년 동안이었다. 또 방어사(防禦使)를 둔 것이 64년 동안이었다.


國亡之後 代代稱號不一 新羅第三十一政明王卽位 開耀元年辛巳 號爲金官京 置太守 後二百五十九年 屬我太祖統合之後 代代爲臨海縣 置排岸使 四十八年也 次爲臨海郡或爲金海府 置都護府 二十七年也 又置防禦使 六十四年也


순화(淳化) 2년(서기 991)에 김해부 양전사(量田使)였던 중대부 조문선(趙文善)이 이렇게 조사하여 아뢰었다.

“수로왕릉 사당에 소속된 밭이 너무 많으니, 마땅히 옛 관례대로 15결로 하고 그 나머지는 나누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일을 담당한 관서에서 장계를 올리자 조정에서 왕의 뜻을 알리며 말하였다.

“하늘이 내린 알이 거룩한 군왕으로 변화하여서 왕위에 있으면서 수명이 158세였다. 저 삼황(三皇) 이래로 이에 비길 만한 이가 없었다. 수로왕이 세상을 떠난 뒤, 조상 때부터 사당에 밭을 소속시켜 왔는데, 지금에 와서 이를 없앤다는 것은 참으로 의아스럽고 두려운 일이다.”


이렇게 말하고는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가 거듭 아뢰자 조정에서도 그렇다고 여겨서, 밭의 반은 사당에 소속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나머지 반은 김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그래서 절사(節使)[양전사를 말한다.]가 조정의 명을 받아 절반은 사당에 소속시키고 나머지 절반은 김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지급하였다. 일이 거의 끝나갈 즈음 양전사가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갑자기 7~8명의 귀신을 보았는데, 밧줄을 쥐고 칼을 잡고 와서 말하였다.

“네 죄가 가장 크니 베어 죽여야겠다.”


양전사는 형을 받는다는 말에 너무나 괴로워하다가 깜짝 놀라서 깨었다. 그리고 곧 병이 들었는데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중에 달아나다가 그 병이 더 심해져 관문을 지나다 죽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로 양전도장(量田都帳) 에는 도장이 찍혀 있지 않았다. 뒤에 명을 받고 도착한 양전사가 그 밭을 조사해보니 11결 12부 9속으로, 부족한 것이 3결 87부 1속이었다. 그래서 없어진 밭을 조사하여 중앙과 지방 관청에 보고하자 넉넉하게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淳化二年 金海府量田使中大夫趙文善申省狀稱 首露陵王廟屬田結數多也 宜以十五結仍舊貫 其餘分折於府之役丁 所司傳狀奏聞 時廟朝宣旨曰 天所降卵 化爲聖君 居位而延齡 則一百五十八年也 自彼三皇而下 鮮克比肩者歟 崩後自先代 俾屬廟之隴畝 而今減除 良堪疑懼 而不允 使又申省 朝廷然之 半不動於陵廟中 半分給於鄕人之丁也 節使[量田使稱也] 受朝旨 乃以半屬於陵園 半以支給於府之徭役戶丁也 幾臨事畢 而甚勞倦 忽一夕夢見七八介鬼神 執縲紲握刀劒而至云 儞有大憝 故加斬戮 其使以謂受刑而慟楚 驚懼而覺 仍有疾瘵 勿令人知之 宵遁而行 其病不間 渡關而死 是故量田都帳不著印也 後人奉使來 審檢厥田 十一結十二負九束也 不足者三結八十七負一束矣 乃推鞫斜入處 報告內外官 勅理足支給焉


이 외에도 또 고금에 탄식할 만한 일이 있다. 수로왕의 8대손인 김질왕(金銍王)은 매우 부지런히 정무를 보았고, 또 불법을 정성스럽게 받들었다. 시조모인 허황후(許皇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가(元嘉) 29년 임진(서기 452)에 수로왕과 황후가 결혼한 곳에 절을 창건하고 왕후사(王后寺)라고 하였다. 관리를 보내 그 근처의 밭 10결을 측량하고 불법승 삼보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이 절이 생긴 뒤 500년 뒤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 절에 바친 밭과 땔나무를 마련하는 땅이 모두 300결이나 되었다. 그러자 절의 삼강(三綱)이 왕후사가 절의 땔나무를 마련하는 땅 동남쪽 안에 있다고 하여 절을 철폐하고 농장으로 만들었다. 가을에 추수하여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먹이는 외양간으로 만들고 말았으니, 슬픈 일이로다!


세조 이하 9대손의 연대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명(銘)은 이러하다.


천지가 처음 열리니

해와 달이 비로소 밝아졌다네.

인륜이 비록 생겼지만

임금의 자리는 없었다네.

중국 왕조는 여러 번 생겼지만

우리나라에는 서울이 나누어져서,

계림이 먼저 정하였고

가락이 뒤에 생겼다네.

다스릴 자 없었으니

누가 백성을 보살필까.

드디어 하느님께서

이 백성들을 돌아 보셨다네.

그래서 하늘이 제왕의 징표를 주고

특별히 정령(精靈)을 내려 보내셨다네.

산 속에 알을 내리셨는데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다네.

그 안은 아직도 막막했고

그 밖도 역시 어두컴컴했다네.

바라보면 모습이 없는 듯했지만

들어보면 소리가 있었다네.

무리들이 노래하고 아뢰었고

무리들이 춤을 추며 바치었다네.

이레가 지난 뒤에야

일시에 안정되었다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었고

하늘은 더욱 푸르렀다네.

여섯 개의 둥근 알이 내려왔는데

한 가닥 자줏빛 끈에 매달렸다네.

낯선 곳 이상한 땅에

집들이 연이어 있었다네.

구경하는 이 담장처럼 둘렀고

보는 이들 무수히 모여들었다네.

다섯은 각 고을로 갔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다네.

같은 때 같은 행적

형과 동생이 같았다네.

실로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낳아서

이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다네.

왕위에 처음 오르자

온 천하가 맑아졌다네.

대궐은 옛날 제도를 따랐고

흙 계단은 오히려 평범했다네.

만 가지 정사 비로소 힘써서

여러 정사를 시행했다네.

기울어지지도 치우치지도 않아

오직 한결같이 정밀했다네.

길 가던 자는 길을 먼저 가라 사양하고

농사짓는 이들은 밭 갈기 먼저 하라 양보했다네.

사방이 모두 편안해지고

만백성 태평성대를 맞았다네.

이윽고 풀잎의 이슬이 마르는 것처럼

장수하던 수명 보전하지 못하였다네.

하늘과 땅의 기운이 변하였고

온 백성이 모두 슬퍼했다네.

그 행적은 금빛처럼 빛났고

그 명성은 옥처럼 울렸다네.

후손이 끊어지지 않아

사당의 제사 향기로웠다네.

세월이 비록 흘러도

그 규범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았다네.


又有古今所嘆息者 元君八代孫金銍王 克勤爲政 又切崇眞 爲世祖母許皇后奉資冥福 以元嘉二十九年壬辰 於元君與皇后合婚之地創寺 額曰王后寺 遣使審量近側平田十結 以爲供億三寶之費 自有是寺五百年後 置長遊寺 所納田柴幷三百結 於是右寺三綱 以王后寺在寺柴地東南標內 罷寺爲莊 作秋收冬藏之場 秣馬養牛之廐 悲夫 世祖已下九代孫曆數 委錄于下

銘曰

元胎肇啓 利眼初明 人倫雖誕 君位未成

中朝累世 東國分京 鷄林先定 駕洛後營

自無銓宰 誰察民氓 遂玆玄造 顧彼蒼生

用授符命 特遣精靈 山中降卵 霧裏藏形

內猶漠漠 外亦冥冥 望如無象 聞乃有聲

群歌而奏 衆舞而呈 七日而後 一時所寧

風吹雲卷 空碧天靑 下六圓卵 垂一紫纓

殊方異土 比屋連甍 觀者如堵 覩者如羹

五歸各邑 一在玆城 同時同迹 如弟如兄

實天生德 爲世作程 寶位初陟 寰區欲淸

華構徵古 土階尙平 萬機始勉 庶政施行

無偏無儻 惟一惟精 行者讓路 農者讓耕

四方奠枕 萬姓迓衡 俄晞薤露 靡保椿齡

乾坤變氣 朝野痛情 金相其躅 玉振其聲

來苗不絶 薦藻惟馨 日月雖逝 規儀不傾


거등왕(居登王): 아버지는 수로왕(首露王)이고 어머니는 허왕후(許王后)이다. 건안 4년 기묘(서기 199) 3월 23일에 왕위에 올라 3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가, 가평(嘉平) 5년 계유(서기 253) 9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으로 태자 마품(麻品)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서는 “성은 김씨이니, 대개 나라의 시조가 금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김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마품왕(麻品王): 마품(馬品)이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가평 5년 계유(서기 253)에 왕위에 올라, 3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영평(永平) 원년 신해(서기 291) 1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종정감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로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왕(居叱彌王):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영평 원년(서기 291)에 왕위에 올라, 5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영화(永和) 2년 병오(서기 346) 7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아궁(阿躬) 아간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 이품(伊品)을 낳았다.


이시품왕(伊尸品王): 김씨이다. 영화 2년(서기 346)에 왕위에 올라, 6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의희(義熙) 3년 정미(서기 407) 4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왕(坐知王):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 3년(서기 407)에 왕위에 올라 용녀(傭女)에게 장가 들었는데, 그 여자의 친척들에게 벼슬을 주어서 나라가 어지러워졌다. 그래서 계림이 가락국을 치려고 하였는데, 가락국의 신하인 박원도(朴元道)가 말하였다.


“유초(遺草)를 깎아도 털이 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 어떻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그 어디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또 점쟁이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풀이에서 ‘소인들을 물리치면 군자들이 와서 도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주역(周易) 괘의 내용을 살펴보십시오.”


왕은 이 말이 옳다고 여기고 용녀를 내쳐 하산도(荷山島)로 귀양 보냈다. 그리고 정치를 고쳐 길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1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영초(永初) 2년 신유(서기 421) 5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도녕(道寧) 대아간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취희왕(吹希王): 질가(叱嘉)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영초 2년(서기 421)에 왕위에 올라, 3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원가(元嘉) 28년 신묘(서기 451) 2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진사(進思) 각간의 딸 인덕(仁德)으로, 왕자 질지(銍知)를 낳았다.


질지왕(銍知王):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 28년(서기 451)에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 시조와 허황옥(許黃玉)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가 처음 수로왕과 만나 혼인한 곳에 절을 짓고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을 바쳐 그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4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영명(永明) 10년 임신(서기 492) 10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김상(金相) 사간의 딸 방원(邦媛)이며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


겸지왕(鉗知王):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 10년(서기 492)에 왕위에 올라 3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정광(正光) 2년 신축(서기 521) 4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출충(出忠) 각간의 딸 숙(淑)으로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구형왕(仇衡王): 김씨이다. 정광 2년(서기 521)에 왕위에 올라, 42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보정(保定) 2년 임오(서기 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적의 수는 많고 아군의 수는 적었기 때문에 맞서 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형제인 탈지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卒支公) 등과 함께 항복하여 신라로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世宗) 각간, 둘째는 무도(茂刀) 각간, 셋째는 무득(茂得) 각간이다. 개황록(開皇錄) 에서는, “양(梁)나라 대통(大通) 4년 임자(서기 532)에 신라에 항복했다.”라고 하였다.


居登王 父首露王 母許王后 建安四年己卯三月十三日卽位 治五十五年 嘉平五年癸酉九月十七日崩 王妃泉府卿申輔女慕貞 生太子麻品 開皇曆云 姓金氏 盖國世祖從金卵而生 故以金爲姓爾

麻品王 一云馬品 金氏 嘉平五年癸酉卽位 治三十九年 永平元年五年辛亥一月二十九日崩 王妃宗正監趙匡孫女好仇 生太子居叱彌

居叱彌王 一云今勿 金氏 永平元年卽位 治五十六年 永和二年丙午七月八日崩 王妃阿躬阿干孫女阿志 生王子伊品

伊尸品王 金氏 永和二年卽位 治六十二年 義熙三年丁未四月十日崩 王妃司農卿克忠女貞信 生王子坐知

坐知王 一云金叱 義熙三年卽位 娶傭女以女黨爲官 國內擾亂 鷄林國以謀欲伐 有一臣名朴元道 諫曰 遺草閱閱亦含羽 況乃人乎 天亡地陷 人保何基 又卜士筮得解卦 其辭曰 解而拇 朋至斯孚 君鑑易卦乎 王謝曰 可 擯傭女 貶於荷山島 改行其政 長御安民也 治十五年 永初二年辛酉五月十二日崩 王妃道寧大阿干女福壽 生子吹希

吹希王 一云叱嘉 金氏 永初二年卽位 治三十一年 元嘉二十八年辛卯二月三日崩 王妃進思角干女仁德 生王子銍知

銍知王 一云金銍王 元嘉二十八年卽位 明年 爲世祖許黃玉王后 奉資冥福 於初與世祖合御之地創寺 曰王后寺 納田十結充之 治四十二年 永明十年壬申十月四日崩 王妃金相沙干女邦媛 生王子鉗知

鉗知王 一云金鉗王 永明十年卽位 治三十年正光二年辛丑四月七日崩 王妃出忠角干女淑 生王子仇衡

仇衡王 金氏 正光二年卽位 治四十二年 保定二年壬午九月 新羅第二十四君眞興王 興兵薄伐 王使親軍卒 彼衆我寡 不堪對戰也 仍遣同氣脫知爾叱今 留在於國 王子上孫卒支公等 降入新羅 王妃分叱水爾叱女桂花 生三子 一世宗角干 二茂刀角干 三茂得角干 開皇錄云 梁中大通四年壬子 降于新羅


논평하여 말한다.

“ 삼국사(三國史) 를 살펴보면, ‘구형왕이 양나라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서기 532)에 신라에 국토를 바치고 항복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건무 18년 임인(서기 42)부터 구형왕 말년의 임자년(서기 532)까지 490년이 된다. 만일 다른 기록으로 고증한다면, 국토를 바친 것은 위(魏)나라 보정 2년 임오(서기 562)이니, 30년을 더하여서 모두 520년이나 된다. 이 두 설을 모두 기록해 놓는다.”


議曰 案三國史 仇衡以梁中大通四年壬子 納土投羅 則計自首露初卽位東漢建武十八年壬寅 至仇衡末壬子 得四百九十年矣 若以此記考之 納土在元魏保定二年壬午 則更三十年 總五百二十年矣 今兩存之


2014-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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